가장에 따라 가족의 고통이 결정됐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만 봐도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군경과 서북청년단(서청) 등 토벌대는 1949년 1월17일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민 1000여명을 모은 뒤 경찰·군인·공무원 가족을 골라 살려주고 300여명을 살해했다.

주민 450여 명이 학살된 북촌리는 피해가 상당히 컸던 마을 가운데 하나다. 제주도는 2007년부터 약 16억 원을 들여 해당 위령비를 비롯해 ‘너븐숭이4·3 공원’ 등을 건립했다. 제주 4·3을 처음으로 기록한 작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1978년) 문학 기념비도 설치했다. ‘순이삼촌’ 무대는 이 동네다.

▲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영위’ 사진=장슬기 기자
▲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영위’ 사진=장슬기 기자

4·3 이후, 생존 여성의 경우 순경 가족은 보훈청에서 연금 혜택이 뒤따랐지만 나머지 가족에겐 경찰 조사·감시와 연좌제라는 족쇄가 이어졌다.

13살 때 4·3을 겪은 김인근씨는 ‘폭도들이 오빠를 데려갔고, 이후 경찰이 가족을 폭도로 규정했다’고 증언했다. 토벌대는 오빠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답한 김씨 가족에게 심한 폭력을 가했다. 군인들은 산달인 올케 언니를 죽였고 어머니에게 총 7발을 쐈다. 가족들은 폭도로 규정됐다. 아버지는 저수지에서 총살됐다.

토벌대가 어머니를 잡아가자 오빠가 산에서 내려와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풀려났지만 아픈 몸으로 오래 살지 못했다. 오빠는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김씨는 오빠를 폭도로 규정하지 않았고 폭도와 경찰에 의해 이유 없이 쫓기는 인물로 기억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가족이 오빠로 인해 희생됐다고 이해했다. 물론 억울한 희생이었다고도 생각했다.

27살에 4·3을 겪은 현신봉씨는 가해자를 시아주버니로 규정했다. 시아주버니가 폭도였기 때문에 시부모님 등 가족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현씨 남편 정기봉씨는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자수해 약 18년을 철창 안에서 보냈다. 김씨와 현씨 모두 ‘폭도의 가족’이었다.

토벌대를 피해 많은 사람이 산으로 도망갔다. 토벌대는 사라진 자 대신 그의 아내를 죽였다. 아내 등 가족을 대신 살해하는 것을 ‘대살(代殺)’이라 부른다. 서귀포시 대정읍에 사는 이형욱씨가 사라진 사이에 토벌대는 이씨 아내를 대살했다. 이씨는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평생 혼자 살았다.

▲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영위’ 희생자 명단. 사진=장슬기 기자
▲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영위’ 희생자 명단. 사진=장슬기 기자

무차별 학살에서도 작동하는 차별

일상의 사소한 차별이 죽음의 기록에서 확대됐다. 평소대로 기록은 가부장과 식솔을 구분했다.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영위’ 위령비에는 1949년 군인에게 학살당한 주민들 명단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김○○ 모(母)’, ‘한○○ 처(妻)’, ‘이○○ 녀(女)’, ‘홍○○ 자(子)’ 위령비를 본 시민들은 희생자들을 남성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된다.

문아무개씨 두 딸은 4·3 당시 희생됐다. 위령비에 ‘문○○ 녀’가 두 번 등장했다. 기록자가 희생자들을 차별했다고 볼 순 없다. 한국사회가 이름 없는 이들을 호주에 소속시켰을 뿐이다. 위령비에 새겨진 이름들은 국가 폭력의 잔혹함을 나타낸 동시에 학살 상황과 그 이후에 가부장제가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보여준다. 4·3은 제주로 한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 역사다.

장기간 대량 학살 사건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겹치며 한 개인의 삶이 결정됐다. 여성들은 가족을 위해 경찰·군인과 정략결혼 했다. 오금숙의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 인권 피해 사례’에는 약혼한 남성 홍경토라는 교사를 살리기 위해 서북청년단원의 결혼 요구를 받은 교사 정아무개씨 이야기가 있다. 정씨는 무장 투쟁과 무관했지만 약혼자라도 살리겠다는 마음에 강제 결혼을 선택했다. 

성폭력 역시 비일비재했다. 권귀숙 제주대 교수는 “아방도 없고 허난 밥도 없고”란 글에서 “겨울에 여자 옷을 벗기고 성폭행했고 여자와 남자를 강제로 성교시키기도 했다”며 가장 악랄했던 가해자를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과 서청단장 김재능이라고 전했다.

성폭력 원인에 대해 권 교수는 “여성을 괴롭힘으로써 상대편 남자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있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며 “무엇보다 여성 지위가 낮은 문화권에서 여성 몸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 작가 강요배의 작품 '젖먹이' 사진=제주4·3미술제 홈페이지
▲ 작가 강요배의 작품 '젖먹이' 사진=제주4·3미술제 홈페이지

폭력이 흐르는 방향

이처럼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가해졌다. 육지에서 섬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젖을 빨던 아이에게로. 평화와 저항의 움직임은 약자에 집중할 때 기록된다. 4·3 당시 여성들은 여성 해방을 주장했고, 문맹 퇴치 교육, 축첩과 조혼을 반대하는 등 봉건제 타파에도 관심을 뒀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친일 경찰 청산 등을 외쳤던 것 역시 4·3의 저항 정신이다.

제주 4·3 당시 토벌대는 양민 학살을 ‘공산주의 소탕’으로 정당화했다. 토벌대는 ‘악(惡)’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 주민 김현필씨는 1999년 9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토벌대들이) 늙은 남자 노인들은 굽혀서 기어가라고 하고 위에는 아가씨들을 태웠다. 그 당시 이를 피하는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다. 젊은 아가씨들도 늙은 남자 노인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말했다.)”

학살자들이 지키려던 건 남녀나 노소로 대표되는 ‘위계’였다. 전 세계를 둘로 쪼갠 냉전 시대에 대한민국이라는 반공국가에서 가부장적 사회 권위주의 문화가 어떻게 중첩됐는지, 4·3에 녹아있다.

※ 참고 문헌

권귀숙, “아방도 없고 허난 밥도 없고”-제주 4·3의 여성사
박경열, 제주 여성 생애담에 나타난 4·3의 상대적 진실-김인근과 현신봉의 생애담을 중심으로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4·3 길을 걷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회 제주 4.3사건, 1999년 9월12일 방송)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