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노동조합(위원장 박준동) 설문조사 결과 사내에서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여성 조합원이 12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노조는 지난 20일부터 23일까지 여성 조합원 57명을 대상으로 사내 성폭력 실태 여론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여기자 10명 가운데 최소 2명이 성희롱·성추행 피해를 겪었지만 대부분 2차 피해 우려 등의 이유로 공론화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27일 발행된 노보를 보면 ‘회사 내에서 성희롱·성추행·성폭행 등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12명이 모두 ‘있다’고 답했다. 이는 여성 조합원(57명)의 21%에 달하는 수치다. 이 가운데엔 “(성폭력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포기했다. 항상 퇴사할 생각”이라는 응답자도 있었다.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한 12명 가운데 문제를 공론화하고 해결을 시도했다는 응답자는 2명에 불과했다. 피해 유형을 묻는 질문(복수 응답)에서 ‘성폭행’이라는 응답은 없었지만 ‘언어적 성희롱’(12명)과 ‘부적절한 신체 접촉’(11명)은 비슷하게 나타났다.

성폭력 사실이 공론화하지 않은 이유(복수 응답)로는 ‘소문, 업무상 불이익 등 2차 피해가 걱정돼서’(8명)가 가장 많았고 ‘가해자가 합당한 징계를 받지 않을 것 같아서’, ‘문제가 커지기를 바라지 않는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에’가 각각 7명으로 뒤를 이었다.

‘부서장·총무국장 등 공식 계통상의 관리자가 남성이어서’(4명),‘ 사후 입증이 어려워서’(2명) 공론화하지 못했다는 응답도 있었다.

▲ 서울 중구 태평로에 위치한 조선일보 사옥.
▲ 서울 중구 태평로에 위치한 조선일보 사옥.
노조는 주관식 문항을 통해 응답자 의견을 수렴했다. 노보에는 “우리 회사는 가해자가 명백한 사과 없이 피해자와 같은 부서나 옆 부서에 근무한다”,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는데도 가해자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걸 봤다. 이런 식이니 아무도 문제제기를 못한다” 등의 목소리가 실렸다. 

“가해자가 확실하게 징계를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평소 성희롱하던 사람도 조심하고, 피해자도 당황하지 않고 현장에서 바로 항의할 수 있다”, “회사에서 인정하는 기자들이 가해자가 돼도 엄격한 징계를 내려야 한다”며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징계를 촉구하는 견해도 있었다.

이 밖에도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한 조합원은 “오너가 나서서 ‘상습범’으로 회자되는 일부 간부·기자들에게 확실하게 경각심을 줘야 한다”며 “사장이 나서지 않으면 그들은 거칠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강압적인 음주·회식 문화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노조는 “폭탄주를 강요하고 노래방 등으로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여성을 배제하는 ‘펜스 룰’에 대한 우려도 덧붙였다.

실제 한 조합원은 “여자 후배와는 단둘이 밥을 먹지 않는다고 공언하는 분들이 이미 있었다”며 “여자를 동료가 아닌 이성으로 보는 태도가 어처구니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더해 “남성 일색인 간부진 구성이 문제다. 룰을 정하는 이들이 모두 남자라서 여기자는 늘 마이너리티로 인식된다”, “여기자가 데스크가 되면 술 먹고 놀아야 하는 남자들을 통솔하기 어렵다느니, 남성 위주인 고급 취재원을 밀착 마크하기 힘들다는 등 온갖 이유로 한직으로 밀어낸다” 등 남성 기득권 중심의 사내 문화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애는 누가 키우냐”, “남편 밥은 차려주고 다니냐”는 등 성차별 발언을 문제 삼기도 했다.

조합원들은 이진동 전 TV조선 사회부장의 성폭행 의혹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자회사에서 터진 일이지만 이번 일을 자정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조합원은 이 전 부장 사건을 첫 보도한 월간조선이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보도한 것을 두고 “우리 조직의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보도 경위를 파악해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투 운동’과 함께 커지는 여성 조합원들 목소리가 조선일보 사내 성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실제 조선일보 사내에선 성추행 신고가 접수돼 회사는 관련 사안을 조사 중이다. 

조선일보 관계자는 가해자로 지목된 A기자에 대해 지난 23일 미디어오늘에 “신고가 접수됨에 따라 사내 규정에 따라 절차를 밟고 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노조를 중심으로 사내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 조선일보를 둘러싼 여론은 ‘고(故) 장자연 성상납 강요 사건’ 재조사를 촉구하며 조선일보에 답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성폭력을 고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청와대 국민 청원 참여자는 지난 23일 기준으로 20만 명을 돌파했다.

‘장자연 문건’에는 유력 언론사 사주, 방송사 PD, 경제계 인사 등이 장씨에게 술시중과 성접대를 요구했다고 적혀 있어 사회적 파장이 컸다. 특히 ‘조선일보 방사장’이라는 대목도 나와 조선일보 인사의 연루 가능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지난 26일 회의를 열고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검찰에 권고키로 했다. 이 사건 공소시효가 지난 만큼 재수사가 이뤄질 가능성은 낮지만 당시 검찰 수사라인이 직무를 유기했는지 등은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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