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적폐 청산이 시작됐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처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방송심의를 총괄한 김아무개 전 팀장이 제3자로 위장해 ‘대리 민원’을 대거 작성한 사실을 확인하고 파면을 결정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전 위원장, 이전 부위원장들이 자신에게 ‘대리민원’을 작성하라고 지시해 46건의 민원을 조작했다”는 담당 팀장의 진술을 확보했다. 이날 발표를 통해 드러난 핵심 사안이다.

그런데 ‘몸통’은 드러나지 않았다. 담당 팀장의 ‘파면’이 20일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팀장은 시킨 일을 한 실무자에 불과하다. 전 위원장과 부위원장들이 어떤 이유로 ‘부당한’ 지시를 내렸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이 19일 방송회관에서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민경중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이 19일 방송회관에서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 증거들은 일관되게 이전 정부 청와대와 국정원을 향하고 있다. 이날 방통심의위가 공개한 청부민원 대표사례들은 당시 ‘정부’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거나 정부여당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대응한 이슈라는 점에서 방통심의위 사무처 역시 이전 정부 차원에서 ‘청부 심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심증은 복수의 문건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KBS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다. 당시 이 프로그램은 건국 과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이유로 지상파 재허가 때 감점을 받는 중징계인 법정제재를 받았다.

주목해야 할 건 당시 흐름이다. 당시 이인호 KBS 이사장은 “이 다큐를 본 사람들로부터 ‘내용이 편향됐다’는 항의 전화를 사방에서 받았다”고 강조하면서 편성에 개입한다. 뉴라이트 색채를 보이는 매체들 역시 해당 다큐멘터리를 비판하고 나섰다.

공교롭게도 청와대 역시 이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다. 지난해 언론노조 KBS본부가 공개한 청와대 문건에 따르면 이병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5년 3월 23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2월 초에 방영된 ‘뿌리 깊은 미래’는 건국 가치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면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제재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김 전 팀장이 민원을 넣은 사안 중 2013년 MBC가 방송 뉴스 배경화면에 국산 헬기 도입 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정’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얼굴 옆에 인공기를 나란히 배치했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은 것은 ‘대통령을 위한 심의’를 했음을 시사한다. 사드배치 관련 외신 오역 등 JTBC 뉴스에 집중적으로 ‘민원 조작’이 이뤄진 것도 수혜자는 정부였다.

청부 민원의 배경에 권력기관이 있다는 점은 지난해 JTBC가 ‘청와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찰 문건’을 보도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난 바 있다. 문건에서 인터뷰 대상으로 등장하는 이전 방통심의위 부위원장은 “국정원 등에서 제보가 왔는데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엔 편법으로 게시판에 사람을 동원해 글을 쓰기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정원이 청부심의를 넣었다는 사실을 이전 방통심의위  부위원장이 실토하고 이를 청와대가 체크한 것은 청부 심의에 청와대와 국정원이 연루돼 있다는 정황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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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정부에 불리한 보도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방통심의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회의록 2014년 7월2일자에는 “문창극 KBS 보도-중징계-방심위”라는 대목이 있으며 이후부터 심의와 관련한 방통심의위의 일거수일투족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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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직원성향은 물론 운영 전반에 개입한 정황이 담긴 청와대 문건.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직원성향은 물론 운영 전반에 개입한 정황이 담긴 청와대 문건.

2014년 청와대는 ‘방통심의위 직원성향 분석’ 문건을 작성하면서 사실상의 사찰 행위까지 했다. 해당 문건에 따르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팀장급 간부의 실명을 언급하며 A팀장에 대해 ‘진보성향’, B팀장에 대해 ‘부친이 야당에 수차례 공천신청’ 했다고 썼고 특별위원들의 성향까지 분석하고 있다. 내부 조력자의 도움 없이는 작성할 수 없는 내용이다.

물론, 방통심의위의 조사가 제한적인 이유는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다. 이번 문제는 사무처 차원에서 비위 행위가 드러난 직원에 대한 감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따라서 김 전 팀장 개인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 전 팀장이 7년 동안 방송심의를 총괄해왔다는 점에서 비교적 중대한 사안이 밝혀졌지만 청와대 개입 정황이 이미 드러난 통신심의 규정 개정, 국정원 개입 정황이 드러난 좋은 프로그램 시상 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파헤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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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심의위 사무처는 이번 파면 결정이 “정치심의, 편파심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4일 강상현 방통심의위원장은 4기 방통심의위 기자회견 때 ‘적폐청산’을 강조했고 과거의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정치심의’ 논란을 잠재우려면 이미 정황이 드러난 사안들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무처가 아닌 방통심의위원회 차원의 ‘적폐청산’기구 구성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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