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내린 동아사태에 대한 ‘결정’을 꼼꼼히 살펴보시고 합당한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돌아오는 3월이면 저희 동아투위원들이 동아일보사에서 강제 축출된 지 43년이 됩니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 전에 꼭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가려는 대통령님의 의지를 믿습니다.”

지난해 12월 박종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은 청와대에 청원을 등록했다.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 ‘자유 언론 수호’ 투쟁을 펼치다 정권에 굴복한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자신과 동료들의 명예 및 피해 회복과 국가와 동아일보의 사과가 절실하다는 호소였다.

▲ 지난 1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아투위 결성 43주년 기념식에는 재야 운동가 백기완 선생, 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등 동아투위와 연대했던 원로 인사뿐 아니라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관계자들, 전국언론노조,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언론시민단체 인사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지난 1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아투위 결성 43주년 기념식에는 재야 운동가 백기완 선생, 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등 동아투위와 연대했던 원로 인사뿐 아니라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관계자들, 전국언론노조,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언론시민단체 인사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청원에 참여한 이는 704명에 불과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왕따 논란’을 부른 스피드스케이팅 김보름 선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며 삽시간에 60만 명이 청원에 참가했던 것에 견주면 씁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지 43년. 30~40대 젊은 언론인들은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구부정한 백발노인들이 돼버렸다. 해직되고 동아투위를 결성한 언론인 113명 가운데 29명은 세상을 떠났다. 가장 연로한 동아투위 위원은 86세다. 국가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해줄 수 있는 시한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1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아투위 결성 43주년 기념식에서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모처럼 미소를 보였다. KBS·MBC·EBS·연합뉴스 등 공영 언론 사장들이 기념식에 직접 참여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촛불 혁명이 이끌어낸 변화였다. 최승호 MBC 사장은 “동아투위 선배들이 없었다면 자유 언론 정신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저희 MBC 구성원들이 혹독한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동아투위와 자유언론실천재단을 중심으로 한 언론단체들은 지난해 7월 ‘KBS·MBC 정상화 시민행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매주 집회를 열며 시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KBS·MBC 현업 언론인들이 ‘적폐 인사’들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렇듯 동아투위 언론인들은 ‘언론 정상화’ 투쟁 최전선에 있었다. 김환균 언론노조위원장은 “선배들이 너무 오랫동안 길거리에서 고생하고 계셔서 쉬게 해드려야 한다고만 생각했다”며 “그런데 함께 싸우는 ‘바로 옆 동지’로 계셨다. 이번 언론 자유 투쟁은 선배들과 어깨를 걸고 함께 싸웠기에 가능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 동아투위 위원들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동아일보의 사과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동아투위 위원들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동아일보의 사과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동아투위 위원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동아일보의 사과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동아투위 위원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동아일보의 사과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KBS·MBC 언론인만 고초를 겪은 건 아니다. 동아투위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대법원에서 명예 회복과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다. 동아일보가 과거사위 결정을 취소하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지난 2015년 5월 “정권 요구에 굴복해 기자들을 해직했다는 인과관계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며 과거사위 결정을 취소시켰다.

MB 정부 때인 2008년 10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년 반 동안의 조사를 통해 “동아일보사는 비록 광고 탄압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야기된 경영상의 압박이 있었다 하더라도 동아일보사의 명예와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 왔던 자사의 언론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요구대로 해임함으로써 유신 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밝힌 바 있다. 

종합하면 박정희 유신 정권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 탄압이라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가 있었고 동아일보가 정권에 굴복해 언론인들을 대량 해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로 동아일보가 100여 명의 언론인을 강제 해직한 것은 ‘경영상 판단’으로 간주됐고 자연스레 국가 책임도 희미해진 것이다. 동아투위가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청원을 찾은 까닭이다.

동아일보는 응답하지 않고 있다. 동아투위는 동아일보 사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상만은 박정희 정권과 야합해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한 사원 113명을 강제 해직한 장본인이다. 김병관은 1980년 ‘서울의 봄’에 기겁을 했던지 동아투위에 은밀하게 대화의 손길을 뻗다가 전두환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독재가 재현되자 재빨리 몸을 사려버렸다. 김재호는 할아버지의 언론인 학살과 아버지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관해 동아투위를 향해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은 채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3월19일자 동아투위 결성 43주년 성명) 

장남 김상만·장손 김병관·장증손 김재호(현 동아일보·채널A 사장)는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의 자손들로 4대째 경영권을 승계하고 있다.

▲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동아투위 결성 43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정부에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정신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동아투위 결성 43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정부에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정신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시간이 흐를수록 동아투위의 투쟁 수위는 높아지고 있다. 동아일보는 오는 2020년 창간 100주년을 맞는다. 동아투위는 “앞으로 2년 안에 동아일보가 민주화를 지향하고 민족의 화해와 공존을 추동하는 신문으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그래서 동아투위는 동아일보가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 폐간하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국민주 신문을 열망하는 시민들이 모금을 통해 동아일보를 인수해 민주·민족·민중언론으로 재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도 기념식에서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한겨레를 창간했듯이 동아일보는 이제라도 폐간하고 우리는 폐간된 신문을 인수해서 민족·민주를 위한 언론으로 만들 것”이라며 “동아일보를 정말 ‘민중의 신문’으로 만드는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문재인 정부가 ‘동아 사태’에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박종만 위원은 청원을 통해 “이제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문재인 정권에선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며 “이 결정이 내려진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그 결정은 유효한 것이고, 비록 늦었더라도 정부는 반드시 그 결정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이 정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지난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5·18 유가족을 안아주고 있다. 사진=청와대
▲ 지난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5·18 유가족을 안아주고 있다. 사진=청와대
▲ 동아투위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이해동 목사(왼쪽)가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자유언론실천’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동아투위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이해동 목사(왼쪽)가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자유언론실천’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직후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5·18은 불의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다”며 “하지만 이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이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밝혔다. 그의 기념사는 5·18 유족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또 정부는 대구 시민과 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섰던 1960년 2·28민주운동을 기리는 차원에서 2월28일을 정부가 주관하는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러한 취지에 비춰보면 동아일보 기자들이 1974년 10월24일 유신 독재에 맞서 저항의 정신으로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과 1975년 3월17일 결성한 동아투위 역시 ‘언론 민주화의 이정표’라는 평가다. 강성남 새언론포럼 회장은 “지난 10년 동안 바른 언론을 위한 투쟁은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앞으로도 우리 언론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그때마다 동아투위 정신을 바탕에 두고 투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종철 위원장은 “세계 언론 역사에서 해직된 113명의 언론인이 옥살이와 고문을 겪으면서, 또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도 금지 당하면서 43년 동안 권력에 맞서 싸운 일이 또 있을까”라며 “10·24 자유언론실천 선언이 언론과 민족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후배들이 다시 바로 서는 데 동인이 됐다면 그 공로를 흔쾌히 정부가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 대표로서 10·24 선언과 동아투위 결성 등을 기념일로 지정해 국민들에게 그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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