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방문진) 이사 인선은 실질적으로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이 주도해왔고 정작 임명권자인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임명에 필요한 요식 행위에 머물러 있다.” 

지난 15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직을 사임한 이완기 이사는 ‘방송문화진흥회의 온전한 독립을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언론에 배포했다. A4용지 3쪽 분량의 입장문에는 방문진 이사 선임 및 이사장 결정 방식에 대한 쓴 소리가 주를 이뤘다.

이 전 이사장 사임은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해 11월 불신임을 받은 고영주 전 이사장 후임으로 이사장에 오른 이 전 이사장은 올해 초부터 방문진과 방통위(위원장 이효성) 간 ‘파워 게임’의 당사자로 알려져 왔다. 방문진 이사장은 이사들 중 최연장자로 호선하는 관행이 이어져왔는데, 방문진 이사 임명권을 가진 방통위가 이 전 이사장보다 나이가 많은 이사들을 연이어 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방통위는 이 이사장보다 연장자인 지영선 녹색서울시민위원회 위원장을 보궐 이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지 이사 선임 뒤에도 ‘이완기 체제’가 지속됐고 지난달 9일 지 이사가 돌연 사퇴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방문진 사무처장 내정자를 둘러싸고 방문진 내부 갈등이 있었다는 점에서 방문진과 방통위 간 힘겨루기 의혹에 설득력이 더해졌다.

여기에 언론계 일각에서는 방통위가 지 이사 후임으로 ‘강력한 원로 남성’을 물색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고 실제 지난달 14일 김상균 전 광주 MBC 사장이 보궐 이사로 임명됐다. 현재 이사장 직무대행인 김상균 이사는 오는 22일 방문진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이 전 이사장은 방통위 관계자와의 대화 내용을 공개하며 이사장직에 대한 방통위 개입 정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사장 호선이 있었던 지난해 11월2일을 전후해 방통위로부터 내게 ‘이사장 직무대행체제로 가라’거나 ‘추후 이사장 후보를 물색 중이다’는 등 언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 이사장은 “(지난 1월 중순) 몇몇 이사들과 상의했고 MBC 계열사와 자회사 임원 선임이 마무리되는 대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고 밝혔다.

▲ 이완기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이완기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방통위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서도 이사장 교체를 시사한 바 있다. 김상균 이사 선임 당시 방통위 관계자는 미디어오늘에 “연장자가 이사장을 맡는다는 관행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방통위 상임)위원 간 합의해 추대했다”고 밝혔다. 이사장을 바꾸기 위해 연장자를 추대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전 이사장은 “방통위에서 의도적으로 자꾸 이사장 얘기를 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는 않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또 다른 방문진 이사는 “절차적으로 방통위에서 이사장을 임명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방통위 입장을) 과대해석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이제껏 방문진 이사장 선출은 물론 이사진 구성까지 모두 법적 근거 없는 ‘관행’에 기대어왔다. 방문진법에 따라 방문진 이사는 ‘방송에 관한 전문성 및 사회 각 분야의 대표성을 고려해 방송통신위원회가 임명’하고 이사장은 ‘방문진 이사회에서 호선’한다. 이사진 구성은 암묵적으로 여·야 추천 6대3 비율로 유지돼 왔다. 재적 이사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이 이뤄지는 이사회에서 친 여권 성향 이사들이 절대 다수를 점하는 구조다. 이런 가운데 방통위가 연장자를 이사로 내려보냄으로써 여권 우호적 인사가 이사장을 맡는 관행이 유지된 것이다.

지금과 같이 관행대로 방통위가 임명하는 연장자를 그대로 이사장으로 선출하게 될 경우 방통위가 상근이사인 이사장을 통해 이사회를 관할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연합뉴스 대주주 ‘뉴스통신진흥회’와 KBS 이사회 이사진 역시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점에서, 또 정부·여당 추천(임명) 연장자 인사가 이사장을 맡아왔다는 점에서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은 권력자의 선의에 사실상 맡겨져 왔다.

이사장 선출뿐 아니라 이사 선임에도 관행은 존재한다. 지난해 11월 방통위는 임기를 남기고 사퇴한 김원배·유의선 이사(박근혜 정부 당시 여권 몫 이사) 보궐로 현 여권 추천 김경환·이진순 이사를 임명했다. 당시 자유한국당이 “보궐이사 추천권은 자유한국당에 있다”고 항의하자 이효성 방통위원장은 “(정권 교체로) 여야가 바뀌면 여당 추천 몫은 바뀐 여당에서 하고 야당 추천 몫은 바뀐 야당에서 하는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에서 그렇게 한 전례가 있다”고 말했다. 기존 관행에 따른 것이니 문제가 없다는 해명이었다.

이 전 이사장은 사퇴 입장문에서 “편의적으로 사용해왔던 ‘여권 이사’, ‘야권 이사’ 등의 호칭도 자제돼야 한다”며 “이러한 호칭 사용은 진영 논쟁을 부추기고 상식과 양심에 입각한 이사들의 발언마저도 정파적 해석과 미묘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전 이사장 역시 지난 야권 몫(현 여권)으로 임명된 이사이자 연장자로서 이사장직을 수행해왔다는 점에서 본인의 진의와 무관하게 ‘관행의 외피’를 벗을 수는 없다.

지난 10년 양대 공영방송은 정권에 장악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과 변화는 공영방송 사장 선임 절차의 투명성과 합리성 강화로 시작됐다. 이번 KBS·MBC 사장 선임은 촛불 민심을 반영한 과감하고 참신한 시도였다. 공영방송 MBC의 대주주이자 관리감독 기구인 방문진은 어떠한가. 스스로 오랜 관행을 고민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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