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 년 만에 방문한 광주 도심에서 우연히 옛 전남도청건물을 발견한 순간 필자가 받은 첫 인상은 ‘도청건물이 저렇게 작았었나?’하는 의아함이었다. 뼈대만 남아 있는 건물―상황을 모른다면 원래부터 그렇게 만든 장식물로 오해할 수도 있는 철골구조물―위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LED철골간판이 보이고, 바로 옆에 이어진 건물 외벽 꼭대기에 ‘5·18 최후항전지! 옛전남도청’이라 쓰여 있어 그 곳만이 옛 도청이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기묘한 광경에 충격을 받은 나는 건물 내부의 전시장을 둘러보았고 안내하는 고등학생의 설명을 들었으며, 옛 도청건물 철거를 둘러싼 십 년 가까운 세월의 갈등과정을 알게 되었다. 

최근 헌법 개정 논의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으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우리가 광주를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광주의 기억을 윤색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기에, 나는 지난 십년간 옛 전남도청 철거에 얽힌 갈등을 복기해 보았다.

▲ 박하 건축동아리회원들이 옛 전남도청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부상자회 회원 추혜성 씨를 인터뷰하고 함께 도청 복원 미니현수막을 들고 있다.
▲ 박하 건축동아리회원들이 옛 전남도청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부상자회 회원 추혜성 씨를 인터뷰하고 함께 도청 복원 미니현수막을 들고 있다.


광주의 도청 철거로 ‘역사 지우기’를 원하는 자 누구인가?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을 옛 전남도청 별관(본관2)의 철거과정은 이러하다.

1)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시절 공약으로서 광주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만들고 5·18 정신을 계승해 옛 전남도청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2003년부터 논의된 이 계획은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최초 발의했을 때의 정신, 즉 새로 짓는 건물이 5·18 최후항전지였던 도청건물보다 높아서는 안 되고 도청건물 전체를 5·18 사적지로 보존한다는 방침을 어긴 채,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으로 가면서 더욱 변질되었다.

2) 200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진입로를 만든다는 이유로 옛 전남도청의 별관을 철거하는 설계지침이 정해졌지만 5·18 관련단체는 이 협의과정에서 배제되었고 통보도 받지 못했다. 별관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마지막 날인 5월 27일 계엄군의 진압작전으로 시민군 14명이 사살당하고 164명이 부상ㆍ체포된 최후 항전의 역사적 현장이다(이 숫자는 당시 정부의 집계로, 별관을 포함한 도청 전체에 남아 있던 실제 인원수는 알 수 없다. 다만, 많은 행방불명자들을 감안할 때 훨씬 많았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3) 5·18기념재단의 2008년 1월 9일자 보고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내 5·18보존건물 활용방안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내 5·18보존공간 기념공간화사업 종합기본계획> 56쪽, ‘표 1-16 협의체 쟁점 및 합의내용’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문화관광부와 5·18 관련단체는 2005년 도청 건물을 보존하는 것으로 서로 합의한 후 어떠한 공식적인 협의 과정을 재개하지 않아 왔음. 또한 문광부는 도청 건물의 활용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5·18 관련단체와 상호 협의하여 계획을 수립하기로 약속하였음.”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2008년 6월 24일 구속자회의 기동타격대(1980년 5월 27일까지 싸운 시민군 기동타격대)를 중심으로 유가족회와 부상자회가 결합한 천막농성이 시작되었다.

4) 생계를 저당 잡힌 길고 힘겨운 싸움과정 중에 5·18 관련단체들 간의 갈등도 터져 나왔다. 도청건물의 안전도를 문제 삼은 정부의 회유에 설득당한 5·18구속자회가 2009년 2월 12일 농성을 철수해 유가족회와 대립한 적도 있고, 2009년 6월 20일에는 해결에 대한 희망을 안고 5·18민주유공자회와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가 농성을 해산하기도 했다. 2009년 8월 25일 광주 지역 대학 교수들이 원안대로 공사를 진행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는가 하면, 8월 27일에는 광주 시민·사회단체총연합 회원들이 ‘공사 지연·방해 세력’에 대한 반대 집회를 열기도 했다. 2009년 9월 22일 유인촌 문체부 장관과 면담한 ‘10인대책위원회’(광주시장, 시의회의장, 국회의원 8인으로 구성)는 2010년 12월 24일 추진단이 발표한 최종안 ‘별관 부분 철거 후 강구조물 설치’를 12월 29일에 수용함으로써 ‘5·18사적지 원형보존을 위한 광주전남시·도민대책위원회’의 반발을 사게 된다.

5) 오랫동안 검은 장막에 가려져 있던 구 도청 별관은 2013년 6월 말 마침내 전체 54m중 24m가 잘려져 나간다. 물론, 5·18 관련단체와의 어떤 협의도 없었고 잔해도 보존되지 않았다. 7월 말에는 시민군이 집결하고 보초를 서던 수위실도 아무 논의 없이 철거되었다. 2015년 8월에는 옛 도청과 경찰청 부속건물들로 구성된 민주평화교류원 공사가 이 5·18 보존건물들의 원형을 훼손하고 진행되었음이 밝혀진다. 건물 내·외벽의 총탄자국은 매립되고 시민군의 상황실과 방송실은 전시공간과 승강기통로로 바뀌었다. 게다가 2016년 9월 7일 옛 도청 별관에 입주할 예정이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태지역위원회(MOWCAP) 센터의 개소식까지 열리자, 도청 복원을 위한 5·18 단체들의 농성이 다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6) 2017년 5·18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옛 도청 복원‘을 언급했고, 그해 8월 28일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옛 도청 6개 부속 건물(본관ㆍ별관ㆍ경찰청ㆍ도청 민원실ㆍ경찰청 민원실ㆍ상무관) 모두의 복원을 천명했으나, 그 이후 실질적인 진척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광주공동체는 ‘뼈아픈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범시도민대책위원회로 모여 있다. 5·18 3단체(유가족회, 구속자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로도 칭함)와 시민·사회단체들, 5·18기념재단이 모두 함께 역사와 기억의 공간이자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옛 도청의 복원을 위해 지난겨울 칼바람 속 천막을 지키고 이제 봄을 기다리고 있다.

▲ 철거로 일부만 남은 옛 전남도청 별관(2018년 2월 3일 현재). 사진=필자
▲ 철거로 일부만 남은 옛 전남도청 별관(2018년 2월 3일 현재). 사진=필자


‘오월애(愛)’, 기억을 이어가는 기록

최초의 기획 의도는 좋은 뜻이었을 것이다. 5·18 정신을 살려 아시아로 전파하고, 개발에서 늘 배제되어왔던 광주가 아시아문화전당을 통해 문화중심도시로 재탄생할 경우 창출 가능한 경제적 이익을 광주시민들이 기대한 것도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의 독선, 빈곤과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오월의 ‘희생자’들을 회유해 5·18 단체들 간의 반목과 분열을 조장한 세력, 늘 5·18 기념식 앞줄에 앉는 이들과 5월 그날 그곳에 있었지만 잊혀버린 사람들의 대조, 무엇인가 잘못 흘러가는 방향 속에 차츰차츰 5·18 역사지우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실, 5월광주의 역사는 그날의 주인공이었으나 어느새 타자로 밀려나고 잊힌 사람들 속에 살아 있다. “기록되지 않고 증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항쟁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담아내고”자 기획된 다큐멘터리 영화 <오월애>(2010년 작, 감독 김태일)는 진정한 5월정신이 무엇인지, 옛 도청건물이 왜 복원되고 보존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구 묘역 근처 ‘5월화원’을 운영하는 옛 시민군 부상자 이세영 씨는 같이 싸웠던 이들이 누워 있는 묘역을 ‘가족묘’로 여기고, 아내와 함께 ‘5·18 상회’라 이름 붙인 트럭행상을 하며 활동을 지속했던 옛 시민군 양인화 씨(평화반점 운영)는 감옥에 다녀오면서 무엇이 민주주의인지를 알았고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양동시장에서 과일 노점을 하는 이영애 씨가 쓰러진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주먹밥을 날랐던 그해 5월을 생생히 기억하면서도 5월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아무 씨알 데 없다”라고 한 이유는, 도청 취사조였던 정숙경 씨가 말하듯,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던 5월광주 그날의 “그 사람들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현실 때문이고 “5월은 아픔뿐”으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양질의 상품만을 파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대인시장 행상 하문순 씨는 주먹밥을 만들어 나르던 그해 5월 “제일 먼저 죽는 사람이 없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아무도 그를 기억해 주지 않지만 그는 리어카 하나에 만족하며 일상을 산다.

시민군 출신 김춘국 씨는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어 5·18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주위와 가정에 치명적인 것이 될 줄 몰랐음을, 기동타격대 출신 양동남 씨는 5월이 오면 몸이 먼저 긴장하고 떨림을 고백한다. 그리고, 1980년 5월 27일 별관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상고 고(故) 문재학 씨의 어머니 김길자 씨는 말한다. “니가 여기서 죽었는디 이 건물을 철거를 한다니 내가 못 지키믄 이걸 부모라 할 것도 없지요잉. 지켜야… 제일 마음 아픈 것이 도청 철거 문제하고 잊혀져가는 것 하고… 그거이 제일 마음 아파요.”

‘오월애’가 영화의 마지막에서 말하듯이, “주목 받지 못한 이들의 기억”의 공간을 보존하고 그들이 “혼자만의 고통으로 살아”가지 않게 하려면, 그리고 그들이 “항쟁의 기록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1980년 그들이 그러했듯이 이제 다시 그 도청을 사수해야 한다.

▲ 옛 전남도청 복원을 위한 별관 농성(2018년 2월4일 현재)
▲ 옛 전남도청 복원을 위한 별관 농성(2018년 2월4일 현재)
▲ 옛 전남도청 앞 전시물을 둘러보는 시민
▲ 옛 전남도청 앞 전시물을 둘러보는 시민


“오월은 진실의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청년의 성장과정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엿보고자 한다. 필자에게 옛 도청건물을 안내한 상무고등학교 3학년 박경록 씨는, 2017년 3월 8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우연히,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설명하시던 한 ‘어머님’(5·18민주화운동 기념재단 소속 김정숙 해설사)을 만나 오월의 진실에 더 다가가게 된다. 이후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박하 역사동아리’(5·18민주화운동 동아리)와 ‘박하 건축동아리’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하고 동아리 학술제에서 옛 전남도청 복원 프로젝트를 주제로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2017년 말 ‘오월 잇다 청춘 서포터즈’(대표 황선화)라는 대학생ㆍ고등학생 단체에서 5·18에 대해 더 심도 있는 공부를 하고, 2018년 1월부터 제2대 광주광역시 어린이ㆍ청소년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게 된다.

이 청년은 옛 전남도청 복원관련 활동가 모집에 지원해 2018년 3월 15일 현재 555일 째 그곳을 지키며 도청이 왜 복원ㆍ보존되어야 하는지 해설 중이다. 그에 의하면, 옛 전남도청에는 내국인보다 외국인 방문객이 많은 편이며, 내국인의 경우 영화 <택시 운전사>가 개봉된 후에는 하루 1천여 명까지 방문객이 늘었으나, 평소에는 주중에 한두 명이었고 근래에는 그나마 주말에도 방문객을 보기 힘들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그의 오월 활동 소감을 여기에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친다. “오월 활동을 하다 보니 기념재단 선생님께서 ‘오월 관련 영화나 책에서 나오는 오월은 진실의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떠오를 만큼 참담하고 잔인했다. 유가족 분들, 구속ㆍ부상자 분들을 비롯한 당사자들의 증언을 직접 보고 듣고 활동하며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오월 광주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 일부가 철거된 별관에서의 천막농성
▲ 일부가 철거된 별관에서의 천막농성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