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사퇴했다. 그는 전 수행비서를 지난해 6월부터 8개월 동안 성폭행한 의혹을 받고 있다. 피해자가 지난 5일 JTBC ‘뉴스룸’에 직접 출연해 이 같은 내용을 밝혔다. 안 전 지사가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였다는 점에서 정치권은 물론 우리 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번 일이 사과와 도지사 사퇴로만 끝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폭행 의혹이 제기된 당일 안 전 지사는 충남도청 직원들에게 ‘미투’ 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지지자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이유다. 더구나 그는 ‘미투’ 운동이 확산된 지난달 25일에도 피해자인 정무비서에게 성폭행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지사는 우리 사회 개혁과 진보를 주장해 온 대표적 차세대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율배반적 행태가 주는 충격은 한동안 우리 사회를 강타할 것으로 보인다.

▲ 지난 3월5일 김지은 충남도 정무비서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사진=jtbc 뉴스룸 보도 갈무리
▲ 지난 3월5일 김지은 충남도 정무비서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사진=jtbc 뉴스룸 보도 갈무리
사안 자체가 주는 심각성 때문에 언론 역시 안 전 지사 성폭행 의혹을 주요하게 보도했다. 일각에서 안 전 지사 성폭행 의혹이 공개된 시점 등을 두고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지나친 해석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며 언론 인터뷰에 나서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피해 사실에 분노하고 공감하는 것이 우선이지 이를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건 사실상 2차 가해다.

음모론은 경계해야 하지만 언론보도 행태는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현재 안 전 지사 성폭행 의혹 말고도 언론이 주목해야 할 사안은 많다. 대북 특사와 관련된 북미 회담 개최 여부, 이명박 전 대통령 검찰 소환, MBC ‘스트레이트’에서 보도한 ‘장충기 문자’ 파문 등등. 하지만 상당수 언론이 다른 사안은 주요하게 보도하면서 유독 ‘장충기 문자’ 파문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 지난 3월4일 MBC ‘스트레이트’가 보도한 장충기 문자 관련 내용. 사진=MBC 화면 캡처
▲ 지난 3월4일 MBC ‘스트레이트’가 보도한 장충기 문자 관련 내용. 사진=MBC 화면 캡처
언론사 간부들과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주고받은 문자내용이 뉴스 가치가 없어서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는 언론인은 없을 것이다. ‘장충기 문자’ 파문은 언론과 자본권력이 얼마나 끈끈하게 유착돼 있는 지를 구체적으로 확인시켰다. 이들이 주고받은 문자에는 단순히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차원을 넘어 ‘혈맹’ ‘형님’과 같은 표현까지 등장했다.

[ 관련기사 : “혈맹” “형님” “선배” ‘장충기 문자’의 실명을 공개합니다 ]

재벌과 대기업의 문제점과 폐해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는 언론사 간부가 삼성그룹 고위간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종일관 저자세를 보였다. 이 모든 것이 광고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장충기 문자’ 파문은 상당수 언론이 침묵하면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 언론이 얼마나 삼성에 굴욕적인지는 이미 ‘이재용 2심 재판’ 관련 보도에서 드러난 바 있다. 당시 경제지를 중심으로 많은 언론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이재용 부회장을 향해 ‘이재용 이제는 앞만 보고 뛰어라’, ‘삼성의 미소, 국가경제 웃음으로 이어져야’, ‘삼성은 심기일전해서 글로벌 정도 경영에 매진하길’과 같은 사설을 내보냈다. ‘삼성 홍보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언론이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의 미래를 걱정했다.

▲ 지난 2월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구치소를 나온 다음날 한국 언론들은 이 부회장의 석방을 보도하면서 위와 같은 제목의 기사와 사설 등을 쏟아냈다. 그래픽=안혜나 기자
▲ 지난 2월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구치소를 나온 다음날 한국 언론들은 이 부회장의 석방을 보도하면서 위와 같은 제목의 기사와 사설 등을 쏟아냈다. 그래픽=안혜나 기자
‘안희정 성폭행’ 의혹 사건과 ‘장충기 문자’ 파문을 단순하게 비교할 순 없다. 성격 자체가 다르고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교대상이 적절하지 않을 뿐 뉴스 가치에 있어선 두 사건 모두 언론이 주목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상당수 언론은 ‘안희정 성폭행’ 의혹 사건은 실시간 주요 기사로 보도하면서 ‘장충기 문자’ 파문은 계속 침묵하고 있다.

가짜뉴스와 음모론은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생성되는 게 아니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기승을 부린다. 자신들의 치부에 대해선 모른 척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분야 문제점만 들추는 현재 언론 모습이 딱 그렇다. 음모론의 진원지가 언론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