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 피해 지원 전문가들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행 의혹을 두고 “이제부터 질문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피해자에게 ‘왜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 ‘왜 거부를 하지 못했느냐’고 묻는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정확히 어떻게 동의를 구했느냐’ ‘상대가 약자인 것을 몰랐느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일 피해자 김지은씨가 종합편성채널 JTBC ‘뉴스룸’을 통해 지난 8개월 간 4차례 안 전 지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 직후 온라인 게시판, SNS 게시물 등을 중심으로 피해자 책임론이 등장했다. 피해자의 외모 지적부터 피해자가 불순한 의도로 폭로했다는 의혹,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반박 등이다.

“8개월 동안 왜 거부를 하지 못했느냐”는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물음이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은 이에 대해 “오히려 가해자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합의했다고 생각한 건지, 적극적으로 동의를 구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며 “우리 사회는 언제나 피해자를 향해 이런 질문을 해왔는데, 이제는 질문을 바꾸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 5일 JTBC 뉴스룸
▲ 5일 JTBC 뉴스룸

수행·정무비서였던 피해자는 스스로 강력한 상명하복 관계에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피해자는) 도지사 말 한 마디에 꿈벅하고, 모든 지시에 응해야 하는 관계에 있었다. 분명한 위계 관계이고 이를 학습한 사람 입장에선 피해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움을 가장 먼저 느꼈을 것”이라며 “그 이후에는 내가 거절하더라도 이 사람에게 나의 의사가 전혀 전달되지 않을 거라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여기에 더해 “굉장히 강력한 위계 관계를 형성한 데다 상대는 저명한 정치인이었다”며 “'내가 문제제기를 한다 해도 누가 나의 편이 될까'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더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 범죄에 있어 범죄 발생 시점과 피해 신고(폭로) 시점 간 차이가 나는 경우는 흔하다. 피해자가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소수이며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경찰 등 수사기관을 찾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6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 여성 중 1.6%가 신고하겠다고 상대에게 말했고 3.1%가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한 여성 중 대상이 경찰이었던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김 연구원도 “(실제 상담 사례에 비춰보면) 많은 피해자들이 피해를 말할 용기를 가지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며 “최근에도 공소시효가 지나 고소하지 못하지만 상담을 하기 위해 전화를 한 사람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성 범죄는 특성 상 목격자나 물증이 없고 당사자의 진술이 주요 증거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내가 증거’라고 한 피해자의 말도 비방의 대상이 됐다. 김지은씨는 인터뷰를 통해 “내가 지사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다 이야기할 것”이라며 “내 기억 속에 (증거가) 모두 다 있다”고 밝혔다.

이 활동가는 “대부분 가해 양상을 보았을 때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그런 행동이 나타난다”며 “다른 증거가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상황에선 피해자의 구체적이고 일관적인 증언이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활동가는 이 경우 ‘증언의 구체성’을 확인할 것을 강조했다.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거나 ‘연인 관계였다’는 가해자의 입장을 빌려 피해자를 허위진술자로 몰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 활동가는 “둘만 있었던 조건을 가해자가 오히려 악용하고 있다. 피해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세세하고 일관적으로 말하지만, 가해자들은 ‘추행은 있었지만 강간은 없었다’거나 ‘연인 관계였다’고만 말한다”면서 “피해자와 어떤 상황에서 합의를 했는지, 무엇을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등은 언급하지 않는데, 증언의 무게감이 다른 상황에서 누구의 관점으로 사건을 볼 것이냐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많은 강력범죄 중 성폭력에만 ‘피해자 마타도어’가 등장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유독 성폭력에만 모든 국민들이 ‘이건 성폭력인지 아닌지’ 판단을 하려 든다”며 “(아니라면) 이 피해자처럼 인생을 걸고 폭로를 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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