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오늘 3·1절을 맞이하는 언론의 역사는 비극인가 희극인가.

언론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걸 보면, 언론은 비극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 같다. 너 나 할 것 없이 주변을 둘러만 보아도 언론에 만족한다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오늘 한국 언론의 거울은 마치 어둡게 드리운 저 미세먼지의 도시처럼 불투명하고 희뿌연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할 거울은 돈과 힘의 어두운 그림자로 얼룩져 있다. 

돈이 별로 없고 힘이 별로 없고 빽마저 없는 삶은 언론에 안 나온다. 별로 돈이 안 되고 별로 힘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한 시민이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다. 비록 우리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끝없는 경쟁에 치여도 밝은 웃음을 잃고 싶지 않다. 건강하게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이 돈과 힘의 밥벌이가, 표벌이가 되어도 언론은 잘 비추지 않는다. 꿈틀대면 그나마 조금 비추기는 한다. 자칫 혁명이라도 일어나면 안 되므로. 그래서 언론은 죽었다. 1%의 돈 많은 사람과 힘 있는 사람의 이야기만 잔뜩 비추는 언론의 거울은 너무나 더럽다. 거기에는 밝은 생명의 기운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비극의 역사가 오늘이다.

3·1절 민족 독립의 날, 언론은 무엇으로부터 독립했는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독립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상식이 있는 시민들의 삶으로부터 멀어져있다. 소중한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오보에 깊이 참회한 언론이 있는가. 제천 목욕탕 참사와 밀양 병원 참사에 대해 제대로 깊이 비춘 언론이 있는가. 없다. 그래서 언론은 신뢰를 상실했다. 

그것이 정파적 보도를 하기 때문이라는 해묵은 지적은 그저 상식을 좋아하고 상식적으로 살고 싶은 시민들에겐 상식적이지 않은, 늘 반복되는 공허한 말씀일 뿐이다. 언론은 건강한 보수의 목소리를 담지 않고 건강한 진보의 목소리를 담지 않는다. 오로지 진영 대결과 갈등만 부추긴다. 너의 정치와 나의 정치가 다르지만 대립 속에서도 상식의 이름으로 합의에 이르는 역사는 그래서 아직도 쓰이지 못하고 있다.

▲ 지난 2014년 4월16일 몇몇 언론사들은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오보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 지난 2014년 4월16일 몇몇 언론사들은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오보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이 말은 어느 걸출한 사상가의 정치 선언에 나오는 말이다. 이제 비극적인 언론의 역사는 시민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우리는 밝고 즐거운 희극의 역사를 쓰고 싶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스마트폰과 SNS가 있다. 막강한 정보력이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엄청난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고 소비하고 있다. 언론은 이것을 따라오지 못한다. 이미 속보경쟁에서도, 팩트체크에서도 졌다. 기술은 우리의 것이요, 사상과 이념도, 정치도 우리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언론에 기대지 않겠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희극의 역사를 보아라. 오늘은 언론에 위임했던 자유와 권리를 회수하는 날이다. 이제 내 목소리는 내가 내겠다. 민족 독립의 날, 우리는 언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바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