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뇌물 공여자나 강요 피해자 선택지라면 피해자가 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박승길 변호사)

‘박근혜 전 정부 국정농단 사태’ 촉발의 시발점이자 본질이라 지목되는 774억 원 재단 출연금을 두고, 전 대통령 박근혜씨 측은 “기업은 강요 피해자가 아니”라며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아 경종을 울려서 경고하는 것도 우리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대통령과 ‘밀실 독대’를 했던 재벌총수들의 입장과 정반대의 주장을 한 것이다.

박씨 측 변호인단은 2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기업이 (대통령) 협박에 의해 재단에 출연한 게 맞는지 아무리 생각하고 기록을 봐도 수긍이 안 된다”면서 재벌 총수들의 ‘피해자 프레임’을 반박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이 2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국정농당 사건 59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박근혜 전 대통령이 2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국정농당 사건 59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변호인단은 “기업들은 경제수석이 기업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크니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모습도 있었다”면서 “기업은 딱히 현안이 없어도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경제수석과 우호적 관계 만들려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또한 “지금 ‘억지로 했다’고 말해도 그 말을 다 믿으면 안 된다. 실제 어떤 관계였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며 “(기업과 청와대는) 서로 협력하는 우호적 관계였고 청와대 지시라는 말에 두려워 돈을 내는 관계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는 최순실씨 측에 건너간 각종 출연금이 정경유착 범죄라는 검찰 및 특검 측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특검 및 검찰은 삼성·롯데·SK그룹 총수들에겐 기업 현안 편의를 청탁하며 돈을 지급했다는 뇌물 혐의를 적용하며 기업이 능동적으로 돈을 지급한 측면을 강조했다.

9대 그룹 재벌 총수들은 2016년 12월 국회 청문회에 나와 ‘정부의 요구에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을 보였다. 당시 여론 일각에선 ‘정경유착 비판을 피하려는 꼼수’ ‘뇌물죄 적용을 회피하려는 말맞추기’ 등의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18개 혐의 중 12개 이미 유죄 선고돼… 형량 징역 20년 웃돌 듯

검찰은 이날 △박씨의 뇌물혐의 법정형이 무기 또는 징역 10년 이상인 점 △취득한 이익이 수백 억원 대에 달하는 점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하는 점 △재발을 막기 위한 준엄한 심판 선례를 남길 필요가 있는 점 등을 언급하며 박씨에게 징역 30년의 중형 및 벌금 1185억 원을 구형했다. 징역 30년은 최씨보다 5년 높은 구형량이며 현행법상 유기징역 상한선이다.

박씨의 혐의 18개 중 이미 재판부의 유죄 심증이 선 혐의는 12개에 달한다. 최순실씨는 지난 13일 박씨와 공모관계가 적용된 11개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고 또 다른 공범인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도 공무상 비밀누설죄와 관련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세 피고인 모두 같은 재판부의 심리를 받고 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3가지도 다른 재판에서 공범 관계가 인정됐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3부)는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인 자신의 직권을 남용했고, 동시에 김기춘 등의 직권남용 행위에 공모한 것이므로 그에 관한 공모공동정범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씨의 1심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의 2심 판결문을 증거로 채택했다.

무죄 심증이 선 것으로 보이는 혐의는 뇌물 수수 혐의가 적용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16억 원 부분과 삼성그룹의 재단 출연금 204억 원 부분이다. 모두 삼성그룹이 지급한 돈이다. 재판부는 최씨의 1심 선고 공판에서 “삼성그룹의 부정청탁 현안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뇌물수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나머지 1개 혐의는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공모해 손경식 CJ그룹 회장으로 하여금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요구한 강요미수죄다.

변호인단 “실수 있어도 불철주야 국정운영… 선처해 달라”

박씨는 징역 20년을 훨씬 웃도는 실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박씨보다 혐의 개수가 적은 최씨는 재판부로부터 징역 20년에 벌금 180억 원을 선고받았다. 

헌법기구인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점도 재판부의 양형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최씨 1심 선고 당시 “국정농단 사건의 주된 책임은 헌법상 부여된 책무를 방기하고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위와 권한을 사인에게 나누어 준 대통령에게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 주범 비선실세 최순실이 23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박 전 대통령의 592억 원대 뇌물 수수 혐의 등에 대한 첫 정식재판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 주범 비선실세 최순실이 23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박 전 대통령의 592억 원대 뇌물 수수 혐의 등에 대한 첫 정식재판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민중의소리

검찰 또한 구형 논지를 밝히며 “이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기록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바로 세우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며 “심각하게 훼손된 헌법가치를 재확립하기 위해서는 피고인에게 죄에 상응하는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했던 모든 일까지 감옥에 가두고 평가하지 않아야 되겠느냐”며 선처를 호소했다. 변호인단은 “실수가 있어도 대통령으로서 불철주야 노력한 것을 감안해주시고 사적이익을 추구한 적이 없는 것을 감안해 달라”며 “유죄를 인정해도 선처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무지개 스펙트럼 사진을 제시하며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경계가 모호한 무지개와 같다”며 “빨강, 주황, 노랑의 경계가 어지러운데, 정말 빨간 부분만 판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변호인단은 이어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발생해 국민적 충격이 심했지만 이는 강요도 뇌물도 아니다. 민관협력이고 나쁘게 보면 정경유착”이라며 “강요와 뇌물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가 해당돼야(유죄가 선고돼야) 충격에 빠진 사람들 마음이 편하겠지만, 그건 편한 진실일 뿐 실체적 진실은 경계 어디쯤 위치해서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이제 와서 다 같이 두려워 돈 냈다는 전경련과 기업을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고 경종을 울려서 경고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며 “전경련과 기업은 피해자 아니”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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