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박근혜 전 정부 국정농단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최순실씨의 1심 판결문에 대한 시민들의 접근권을 차단했다. 피고인 측의 판결문 공개 제한 요청을 수용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법원을 대상으로 비공개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심판도 연이어 제기되고 있다.

한 중소 언론사의 박아무개 기자는 지난 1월엔 서울고등법원, 2월엔 서울중앙지법을 상대로 판결문 공개 제한을 취소하라는 행정심판을 연달아 제기했다. 판결문 사본 제공신청 제도를 통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2심 판결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건 1심 판결문을 신청했으나 법원으로부터 제공이 불가하다는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 서울중앙지법은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건 1심 판결문 열람을 신청한 시민들에게 '공개 제한' 사유를 들어 판결문 제공이 불가하다고 통보했다.
▲ 서울중앙지법은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건 1심 판결문 열람을 신청한 시민들에게 '공개 제한' 사유를 들어 판결문 제공이 불가하다고 통보했다.

사유는 ‘공개 제한’이었다. ‘전자우편 등을 통한 판결문 제공에 관한 예규’ 제2조3항에 따르면 재판부는 진행 중인 재판에 대해 “그 직무수행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거나 당사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현저히 침해한다고 인정되는 경우” 판결문 제공을 제한할 수 있다.

최씨 사건의 경우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에 비공개를 요청한 측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다. 김기춘 전 실장 2심 재판에서는 법정 증인으로 나온 강아무개씨가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 또는 생명 신체의 안전이나 생활의 평온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재판부(서울고등법원 형사3부)에 공개 제한요청서를 제출했다. 담당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수용해 판결문 공개 제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사건관계인이 비공개 요청을 해도 재판부가 이를 수용해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판결문 등 재판기록은 원칙적으로 공개, 예외적으로 비공개 대상이기 때문이다. 공개원칙은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는 헌법 109조에 나와 있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법 작용과 이에 필요한 시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이다.

국정농단 피고인의 경우, 비공개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형사소송법 중에서도 제59조의2 제2항3호로 좁혀진다. 법원은 기록 공개로 인해 사건관계인의 △명예 △사생활의 비밀 △생명·신체의 안전 △생활의 평온 등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당사자 요청이 있을 때에 한해 공개 제한을 허용한다. 국정농단 피고인들이 이 요건에 해당되는지는 엄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법원을 출입하는 일부 기자들 사이에선 ‘이러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 판결문도 공개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서울중앙지법을 취재하는 김아무개 기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부터 최순실씨까지 엄밀한 근거없이 피고인이 원한다는 이유로 판결문이 비공개됐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며 “판결문을 보고 정확하게 기사를 써야하는 입장에서 곤혹스럽다. 국민 알 권리도 심각히 침해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동일한 상황에서 중국·영국·홍콩·네덜란드 등의 국민들은 판결문을 열람할 수 있다. 지난 22일 정차호 성균관대 법대 교수가 발표한 '사법절차 투명화를 위한 판결문 공개 방안 토론회' 발표문에 따르면, 미국·홍콩 마카오 지역 등은 선고 후 24시간 이내에 판결문 공개가 가능하고 영국.네덜란드.중국 등은 1주일 이내에 공개가 가능하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판결문만이 아니라 하급심 판결문을 포함한 공개 규정이다.

▲ 사진= 지난 2월22일 열린 '사법절차 투명화를 위한 판결문 공개 방안 토론회' 중 정차호 교수 발표문 캡쳐
▲ 사진= 지난 2월22일 열린 '사법절차 투명화를 위한 판결문 공개 방안 토론회' 중 정차호 교수 발표문 캡쳐

정 교수에 따르면 한국 사법부의 판결문 공개제도는 중국이나 인도네시아보다 폐쇄적이다. 판결문 공개가 사법 투명성을 높인다는 철학에 따라 두 국가 모두 시민들로 하여금 하나의 온라인 비영리 사이트에서 무료로 판결문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비공개 사유를 △국가기밀 △미성년자 범죄 △이혼소송 등으로 명확히 특정하고 있고, 판결문을 비공개할 경우 재판부에게 이유를 적시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한국 사법부는 공개 대상을 확정 판결문으로 두고 있거나 비공개 조치시에도 판사가 구체적인 사유를 밝힐 필요가 없다.

1·2심 등 하급심 판결문을 공개하면 판결이 확정되기 이전에 피고인에게 사회적으로 유죄판결을 확정짓게 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그러나 하급심 판결은 상급심에 의해 파기되기 전까지 확정 판결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사법부의 독립은 법관의 독립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토론회에서 “판결문 공개를 '판결이 확정된 사건의 판결서'에만 한정하고 있는 현행 민사소송법 제163조의2 제1항부터 위헌의 논란을 면하기 어렵다”며 “우리 헌법 제109조는 '판결'의 공개를 명하고 있지 '판결이 확정된 사건의 판결'만의 공개를 명하고 있지는 않다. 헌법 제109조에서 일반국민들이 판결문에 접근할 권리가 파생돼 나온다고 본다면, 이 민소법 규정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국민의 파생적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판결문은 공공의 지적 재산으로써 시민들에게 최대한 개방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세계사법정보센터(WorldLII·World Legal Information Institute)는 지난 2002년 몬트리올 선언문을 통해 “모든 국가와 국제 연구 기관으로부터 받은 공공의 법률 정보는 인류 공동의 유산이다. 이런 정보에의 접근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정의와 법의 지배(Rule of law)를 고취”하며 “공공의 법률 정보는 디지털화된 공동의 재산이고, 비영리를 기반으로 무료로 모든 사람에게 공개돼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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