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석방하면서 논란이 됐던 것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이었다. 이재용 항소심 재판부는 이른바 ‘종범실록’으로 불리는 업무수첩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수첩은 이 부회장 등과 전직 대통령 박근혜의 단독 면담 내용과 ‘부정한 청탁’을 입증하는 주요 단서였다.

하지만 배임수재죄 및 변호사법 위반을 이유로 지난 13일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에 징역형(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47만 원)을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김태업 부장판사)도 ‘안종범 업무수첩’을 판결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업무수첩을 통해 대우조선 사장 자리를 두고 후보자들간 치열한 경쟁이 있었고 송 전 주필이 안 전 수석에 대우조선 사장 연임 청탁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취지다. 

▲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3일 오후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오른쪽)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송 전 주필은 미디어오늘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침묵한 채 법정을 떠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3일 오후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오른쪽)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송 전 주필은 미디어오늘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침묵한 채 법정을 떠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김기춘과 송희영은 대우조선 누구 밀었나

미디어오늘이 확보한 ‘송희영 재판’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이 법원이 적법하게 채택해 조사한 증거들에 의해 인정되는 아래와 같은 사실관계”로서 안종범 업무수첩을 언급한다. 재판부가 꺼낸 업무수첩은 안 전 수석이 2015년 1월18일부터 2월10일까지 작성한 기록이다.

안 전 수석은 이 시기 자신의 업무수첩에 “<송희영> 대우조선 고재호 고대, 박동혁? (실장님)”이라고 적었고 또 “<송희영> 대우조선 고재호 고대, 1순위 고영렬, <실장님> 박동혁”이라고도 썼다. 고재호(63·구속기소·재임 기간 2012년 3월~2015년 5월)는 고려대 법학과 출신으로 당시엔 대우조선 사장이었다.

송 전 주필은 안 전 수석에게 고재호 연임 인사 청탁을 했다. 송 전 주필의 청탁 행위는 자신의 처조카를 대우조선에 부당하게 입사시킨 사실과 대가 관계가 인정되어 변호사법 위반이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업무수첩에 나오는 ‘실장님’은 당시 현직이었던 김기춘(79·구속기소)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의미한다. 재판부는 업무수첩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당시 김기춘은 자신의 경남고등학교 후배인 박동혁이 대우조선 대표이사로 선임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경남고를 나온 박동혁은 이 시기 대우조선 부사장이었다. 김 전 실장의 인사 개입 의혹을 부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업무수첩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제치고 대우조선 사장에 임명된 인물은 현 정성립 대우조선 사장이다.

송희영 “안종범보다 김기춘과 친분”

재판부에 따르면, 송 전 주필은 고재호 연임 청탁에 대해 “내가 안종범과는 친분이 없었고 당시 비서실장이던 김기춘과는 친분이 있었다”며 “고재호도 김기춘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내가 고재호의 연임을 청탁하려고 했다면 안종범이 아니라 김기춘에게 청탁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당시 김기춘은 자신의 경남고등학교 후배인 박동혁이 대우조선의 대표이사로 선임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다”며 “단순히 피고인 송희영이 김기춘과 친분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김기춘에게 고재호 연임을 청탁했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송 전 주필은 또 검찰과 법정에서 “고재호는 이명박 정부 때 임명된 사장이라서 2014년 연말에 이미 연임을 포기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재판부는 특기할 만한 사실 관계로 이를 반박했다.

재판부는 대우조선 사장 자리를 두고 “2015년 1월부터 서로를 비방하는 등 이전투구가 극심했다”며 “심지어 박동혁은 이투데이 기자로 하여금 2014년 12월경 고재호가 대우조선의 홍보대사인 ㄱ과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장면을 촬영하게 했고 이투데이 기자는 2015년 1월경 ㄱ에게 고재호와의 염문설을 기사로 보도하겠다고도 했다”고 밝혔다. 언론을 통해 상대 후보를 압박하고 낙마시키려 했던 것이다.

재판부는 이 사실을 근거로 “박동혁이 고재호의 연임을 저지하기 위해 염문설까지 준비한 점 등에 비춰보면 고재호가 2014년 12월경 대표이사 연임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피고인 송희영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3일 오후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오른쪽 인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송 전 주필은 미디어오늘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침묵한 채 법정을 떠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3일 오후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오른쪽 인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송 전 주필은 미디어오늘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침묵한 채 법정을 떠났다. 사진=이치열 기자
송희영-안종범 다리 놓은 조선일보 기자

판결문에는 송 전 주필과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안 전 수석이 어떻게 만나는지 드러나 있다. 청와대 경제수석은 대우조선 대표이사 선임에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다.

고재호 전 사장은 2014년 12월과 2015년 1월 사이 송 전 주필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경쟁 후보자들이 여러 군데 줄을 대고 대표가 되기 위해 뛰고 있다고 하는데 알다시피 나는 특별히 라인이나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며 “그러니 송희영 주필이 나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에 송 전 주필은 “무슨 뜻인지 알겠고 상황을 좀 보자”라며 “내 나름대로 챙겨 보겠다”고 밝혔다. 송 전 주필은 2015년 1월23일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 ㄴ을 통해 안 전 수석에게 “송희영이 수석님을 좀 만나자고 하신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안 전 수석은 같은 날 조선일보 ㄴ기자로부터 송 전 주필의 휴대전화 번호를 전달받았다. 이후 송 전 주필과 안 전 수석은 조선일보 본사에 있는 송 전 주필 사무실에서 만났다. 송 전 주필은 안 전 수석에게 다음과 같이 청탁했다.

“다른 조선사들은 모두 적자인데 대우조선은 수주 목표를 달성하는 등 흑자를 내고 있다. 대우조선은 매우 중요한 기업이니 현 고재호 사장을 연임시키는 것이 대우조선을 위해서도 좋다. 고재호 사장이 연임되도록 좀 해달라.”

그러나 안 전 수석은 2015년 2월 말 송 전 주필에 전화해 “대우조선의 경영 상태가 워낙 좋지 않으니 다른 경영인을 찾기로 했다”고 전했다. 송 전 주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2015년 3월17일 재차 안 전 수석에게 “대우조선은 끝난 건가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 고재호 연임을 청탁했다. 안 전 수석은 조선일보 모 부국장에 “송희영 주필한테 미안하게 됐다고 전해 달라. 3명 다 아니다”라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고 전 사장은 법정에서 “송희영은 나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했다. 반면 재판부는 두 사람 관계에 대해 “고재호는 남상태(고재호 사장의 전임 사장·68·구속기소)가 대표이사로 있을 때부터 형성된 대우조선과 조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인인 송희영 사이의 유착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송희영을 각별히 모시는 관계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검찰은 지난 14일 재판부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송 전 주필의 변호인인 법무법인 ‘바른’도 지난 19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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