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이윤택씨가 자신을 둘러싼 각종 성추행 및 성폭행 가해 의혹에 대해 “18년 가까이 관습적으로 진행된 아주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면서 “안마에 대해서는 잘못을 통감하지만 성폭행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연일 새로운 성폭력 피해 사실이 폭로되고 있는 연극계는 ‘#MeToo’(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에서 ‘#WithYou’(위드유·‘함께 싸우겠다’) 운동으로 진화되는 모양새다.

연출가 이윤택씨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공식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그 동안 나에게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정말 부끄럽고 참담하다. 내 죄에 대해선 법적 책임을 포함해 그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 연출가 이윤택씨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공식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연출가 이윤택씨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공식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이씨는 연극계 미투운동에 참여한 당사자 한 명으로부터 강제 성관계를 한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돼왔다. 연희단거리패 전직 단원 및 내부 사정을 아는 연극인들은 미투운동을 통해 이씨가 어린 여성 단원들에게 안마를 강요하며 성기 주변을 주무르게 했다고 폭로했다.

이씨는 ‘강제 안마는 인정하지만 강제 성관계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법적 절차가 강행된다면 성실히 수사에 임하겠다”며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위(성관계)는 있었지만 성폭행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성폭행이 아닌데 왜 사과를 하느냐’는 질의에 이씨는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성폭행은 하지 않았다. 죄송하다”며 “이 문제는 법적 절차에 따라서 그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이씨는 각종 성폭력 가해 정황에 대해 “어떤 때는 이게 나쁜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죄의식을 갖고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 여배우가 공연 준비 때 발성지도를 명목으로 그가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 등을 강제 추행했다고 폭로한 데 대해 “발성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잘못하면 불가피하게 가슴, 척추를 닿게 돼 있다”며 “부적절한 신체 접촉이 이뤄진 건 잘못“이라고 해명했다.

연극계 ‘#WithYou’… “선배들의 침묵, 연극이란 허울에 기생하는 것”

연극계 일각에서는 이씨의 ‘유체이탈 화법’을 꼬집었다. 연극인들이 모여있는 페이스북 공개그룹 ‘대학로X포럼’ 페이지엔 사과 기자회견 직후 “성범죄자들은 무슨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 같다. 어쩜 이리 말하는 게 똑같느냐”며 “성추행은 인정, 성폭행은 ‘법대로 하자’”는 내용이 담긴 글이 게시됐다.

▲ 19일 열린 이윤택 연출가의 공식사과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039;사죄는 당사자에게<br /></div></div>
                                <figcaption>▲ 19일 열린 이윤택 연출가의 공식사과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사죄는 당사자에게<br> 하라’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fig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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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br><p></p><p>기자회견이 열리기 10여 분 전 이씨의 또다른 성추행 사실이 추가 폭로됐다. 여성 배우 A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당시 국립극장 예술감독이었던 이씨가 발성 연습을 하자며 자신을 따로 남게 했고 연습을 하는 동안 이씨가 자신의 온 몸을 만졌다고 밝혔다. </p><p>A씨는 “너무 무섭고 떨려서 내 몸은 굳어져 가고 수치스러움에 몸이 벌벌 떨렸다”며 “결국 내 사타구니로 손을 쑥 집어넣고 만지기 시작해, 난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쳐내고 도망쳐 나왔다”고 적었다. A씨는 극장 행정실에 성폭력 피해 사실을 전달했지만 묵살됐다. 이후 정신적 충격에 응급실에 실려갔던 A씨는 당일 공연에 오르지 못해 “최초로 국립극장 공연을 펑크냈다”는 비난을 들었다. </p><p>이씨는 2014년 유사한 성추행 사건으로 단원들로부터 정식 사과를 요구받기도 했다. 공연을 3일 앞두고 연습을 하는 도중, 이씨가 발성 지도를 이유로 한 여배우를 자신의 개인 대기실로 불러 강제 추행을 한 것이다. 당일 문제의식을 공유한 여성 배우들이 회의를 했고 이씨는 공개 사과를 요구받고 사과했다. 같은 팀에 있었던 여성 배우 B씨가 지난 17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미투 연대 글 내용이다. </p><p>은폐된 성폭력 피해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한편, 연극인들은 피해자를 지지하는 ‘위드유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p><p>8년차 배우 황아무개씨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withyou’ 태그를 달고 “마냥 부푼 꿈을 안고 연기를 시작하던 시절, 꽤나 많은 성추행, 성희롱,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었다. 당시에는 그저 예술계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루머 정도로만 생각했다”며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나도 피해자였다. 또한 암묵적 가해자, 방관자였다”고 밝혔다. </p><p>황씨는 이어 “이제서야 연극계의 미투운동에 작게나마 목소리를 내는 나이지만,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권력의 민낯 앞에 더이상 쉬쉬하지 않겠다”고 적었다. </p><p></p><div style=
▲ 연극계 &#039;#WithYou&#039; 운동 동참글에 첨부된 사진. 사진=배선희님(왼쪽) 페이스북 및 박유밀님 페이스북
▲ 연극계 '#WithYou' 운동 동참글에 첨부된 사진. 사진=배선희님(왼쪽) 페이스북 및 박유밀님 페이스북

한 여성 연극인 노아무개씨도 미투 동참글을 통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호소한 지인 연극인에게 ”그냥 독하게 살아. 그는 아직 영향력이 너무 커“라고 답을 했다며 ”너무 미안합니다. 지키지 못하고 그대들을 그냥 떠나게 해서“라고 적었다. 노씨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너무 미안하다“며 ”내가 속죄할 길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남겼다.

침묵하는 선배 연극인들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연희단거리패에 몸담은 적이 있는 최아무개씨는 19일 새벽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나는 이런 사태에 발 빠르게 펜을 드는 선생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무섭다”면서 “30년 동안 한국연극을 지탱해오면서 연희단거리패와 동지로 살아오신 원로들, 무성한 소문들을 언급하면서도 실질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던 선배님들, 그 외 여러 ‘연극인’이란 직함을 달고 연희단거리패 주변에 계신 분들. 그저 연극이란 허울에 기생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셔야 한다”고 질타했다.

연출가 김재엽씨도 지난 18일 미투운동에 동참해 “결과적인 것만으로 평가받는 연극계의 관행 속에서 불합리한 과정과 반인권적인 폭력을 감내해온 수많은 연극인들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것이 인정투쟁에 목말라하는 우리의 모습이었다”며 “인정투쟁에서 살아남을 연극 한 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연극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도 무시해 온 우리의 연극이 과연 정당한 연극이었는가 거듭 자문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재발방지 대책을 고민하겠다며 연대의 뜻을 나타내는 연극인들도 나타나고 있다. 연출가 정진세씨는 지난 15일 페이스북 미투 글을 통해 “앞으로 저와 제가 속해있는 극단은 이런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프로덕션 내의 성평등 규약을 마련하겠다”며 “성폭력 예방지침을 숙지하겠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이들과 함께 연극하겠다. 가해자를 멀리하고 그들과 작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거듭되는 폭로… 확산 중인 연극계 ‘미투’

연극계 미투운동이 확산되며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는 연극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18일 ‘김보리’라는 필명을 쓴 전직 여성 연극인은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자신이 2001년 여름 경남 밀양에서 ‘인간문화재’ 하용부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하는 글을 게시했다. 하용부씨는 밀양 전통춤을 보유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예인이다.

김보리(필명)는 지난 17일 같은 게시판에서 자신이 19살이던 2001년 겨울과 20살이던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이윤택 연출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글 작성자는 피해 사실을 폭로한 이유로 “연극계의 성폭력 문제는 비단 이윤택씨 뿐만 아니라 하용부씨, 더 나아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가해자들이 많다고 생각된다”면서 “이 문제가 연극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공론화돼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한다”고 적었다.

▲ 사진=서울예술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 캡쳐
▲ 사진=서울예술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 캡쳐

지역 극단의 성폭력 사건 피해자도 미투운동에 동참했다. 서울예술대학교 재학생 C씨는 ‘서울예대 대나무숲’에 익명 제보글을 보내 지방 극단에서 활동했던 16살 때 극단 대표로부터 성희롱·성추행·강간 등 성폭력을 당했다고 밝혔다.

해당 대표 또한 C씨에게 이윤택 연출처럼 안마를 시키거나 물수건으로 몸을 닦게 했고, 현장엔 어른이 몇 명 있었으나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글에 따르면 대표가 미성년자인 C씨에게 ‘너한테 뽀뽀해야 하니 양치하러 간다’고 말해도 선배 단원들은 침묵했다.

대표는 차 안에서 C씨의 성기를 강제로 만지거나 강제로 자신의 성기에 입을 대게 하는 등 성추행을 가했다. 즉각 반발하지 못한 이유로 C씨는 “거절하는 순간 저는 그 소중한 연극 판에서 제외되는 것”이라며 “나의 재능을 칭찬해주던 그 분의 선생님으로서의 모습도 사라지고 밤새 극단에서 대본을 리딩하고 극단 언니와 오빠들을 만나는 소중한 공간이 사라지고 연극에 관한 추억은 부서지는 것”이라 밝혔다.

해당 가해자는 C씨에게 책 ‘롤리타’를 건네주며 ‘우리만의 비밀’이라고 얘기하거나 ‘사복을 입고 와라’ ‘빨리 스무살 넘어라, 그래야 우리가 자유로워질텐데’ 등의 언어적 성폭력을 가했다. C씨는 대표의 차 안에서 대표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실도 폭로했다.

C씨는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녹음하고 카메라로 찍고 신고할 것”이라며 “연극계 거장만의 일이 아니라 전반에 퍼진 일이다. 제발 뿌리 뽑혔으면 (좋겠다). 또다른 16살의 내가 어디선가 속옷 안을 유린당하고 있지 않았으면….”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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