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부산과 마산, 창원 일대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과정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수부대 투입을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연합뉴스는 18일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이하 위원회)의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를 입수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18일 박찬긍 계엄사령관에게 공수특전여단 1개 대대를 마산으로 이동해 제39사단을 지원하라는 내용 등 15가지 지시사항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를 붕괴시킨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9년 10월15일 부산대학교 학생 500여명이 시위를 시도하며 시작된 부마항쟁은 이튿날인 16일 5000여명의 학생들이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진행하며 본격화됐다. 부산대와 동아대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도 직간접적으로 동참해 시위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유신의 압제에 눌려있던 시민들의 시위는 강력했다. 이틀 간 경찰차량 6대가 전소되고 21개의 파출소가 파괴됐다. 언론 역시 공격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MBC, KBS, 부산일보, TBC 취재 차량이 투석으로 피해를 입었다. 물론 시민들의 피해 역시 상당했다. 부산시 집계 결과 16일 하루에만 110명이 부상당했고 18명이 중상이었다. ‘공식 집계’만 그렇다.

▲ 1979년 10월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해 일어난 '부산·마산(부마)민주항쟁'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법절차를 무시한 채 마산 지역 시위진압을 위해 공수부대 투입을 지시한 사실이 항쟁 30년만에 드러났다. 사진은 연합뉴스가 18일 입수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에 실린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사항 문건. 사진=연합뉴스
▲ 1979년 10월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해 일어난 '부산·마산(부마)민주항쟁'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법절차를 무시한 채 마산 지역 시위진압을 위해 공수부대 투입을 지시한 사실이 항쟁 30년만에 드러났다. 사진은 연합뉴스가 18일 입수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에 실린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사항 문건. 사진=연합뉴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부산과 함께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렸던 마산에도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해병대 1사단 일부가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됐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그야말로 ‘살인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곤봉으로 머리를 내려치는 일은 다반사고,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가격당한 사람도 있으며, 시위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젊어 보이는 남자들은 붙들려가 폭행을 당하거나 모진 고초를 당했다. 여성 중에서도 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의 전개와 비슷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전 대통령 경호실장을 쏜 이유를 부마행쟁에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자신이 부마항쟁에 대해 “민심 수습책을 내놓지 않으면 서울 등 전국 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보고하자 박정희가 역정을 내며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했고, 이에 차지철은 캄보디아를 운운하며 “100만~200만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5·18 광주민중항쟁과 같은 사태가 부산과 마산에서도 일어날 뻔했던 것이다. 유신의 후예인 김기춘이 1992년 초원즉석복국집에서 지역감정 조장 공작을 펼치며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지만 앞서 유신 정권은 부산과 마산 시민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 이 모든 ‘작전’의 시작인 공수부대의 투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령이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위원회는 “부산과 달리 마산에는 계엄령은커녕 군부대가 주둔하며 시설 경비 등을 맡는 ‘위수령’조차 내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며 “마산에 군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법령에 따라 경남도지사의 병력출동 요청이 있어야 했는데, 이 같은 요구가 전혀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군 병력 투입 자체도 불법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계엄선포 전인 17일 오후 11시께 군을 부산에 투입했으며 부마항쟁 배후로 고 김영삼 대통령 등과 연계시키려했으며, 이러한 수사과정에서 허위 자백을 받기 위한 고문, 폭행 등 가혹행위가 자행됐고, 배후세력을 만들기 위해 ‘마산 사제총기’ 사건도 조작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 유신 독재의 실체가 이랬다.

위와 같은 사실을 밝혀낸 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당시 출범했다. 박근혜씨가 아버지와 연관된 위원회의 인사들을 대부분 선임하는 등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정권이 바뀐 이후 어쨌든 공수부대 투입 명령자는 가려냈다.

다스의 주인이 누군지, 대중들의 물음으로 시작된 수사가 사실상 다스의 실소유주에 근접했듯, 이렇게 가려진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부마항쟁 7개월 후, 광주에서 대체 누가 군 투입과 발포명령을 내렸는지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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