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이 기업체 등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 부당노동행위에 관한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정의당 비상구’를 통해 진행된 노동 상담 사례를 정윤영 르포 작가(‘숨은 노동 찾기’ 공저자)가 당사자 인터뷰 등을 통해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 뜨거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갑질’은 물론 임금체불 등 불법·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 편집자주

① 제빵 기사 10년 만에 진짜 세상 만났다

② 내 딸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 살았으면…
③ 손님은 왕이다? 노동자 죄인 만드는 말

새벽 다섯 시. 진원씨는 잠에서 깬다. 인천공항 물류센터에 8시까지 출근하려면 다섯 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눈을 뜨면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처럼,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 매일 같은 한파 때문인지 몸은 더 무겁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마흔 다섯이 된 그는 그동안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통증을 자주 느낀다.

두 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 물류센터에 도착해 바로 일을 시작한다. 비행기에 있는 짐을 컨테이너 하나에 옮기는 일이다. 수천 개가 넘는 상자를 방 하나 크기의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면, 다시 해외로 보낼 짐을 옮길 차례다. 컨테이너 하나에 짐을 싣고 내리는 건 모두 한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일은 비행기가 착륙해서 이륙하기 전까지 모두 마쳐야한다. 진원씨는 쉴 시간도 없이 엄청난 양의 상자를 내리고 올린다.

오늘은 ‘풀근무’하는 날, 좁은 화물칸에서 허리를 숙이고 ‘14시간 중노동’을 하고 집에 오면 쓰러지듯 잠이 든다. ‘풀근무’는 일주일에 두 번, 많을 때는 세 번을 하는데 그러다보니 새벽 1시에 들어와 5시에 출근할 때도 적지 않다.

일은 힘들고 잠은 부족하다. 그는 물류센터에서 일하자마자 컨베이어벨트에 손가락을 다쳤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손목터널 증후군이라고 했다. 몇 달 뒤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선 힘줄이 끊어졌다며 수술을 권유했다.

인천공항 물류센터에는 매일 사람이 들어오고 그보다 더 많이 그만둔다. 들어왔다 나가는 직원들 대부분은 2-30대 남성. 마흔이 넘은 진원씨는 2017년 5월 2일에 물류센터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왜,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됐을까?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 먹고 하루 종일 달린다

진원씨는 버스정류장 가판대에서 <주간구인>을 집어 들었다. 잡지를 보고 국제 항공 택배 회사 DHL 배송직원으로 입사한 건 1999년, 그가 스물여섯이던 해였다. 8시 출근해 6시 정시 퇴근인데다 월급은 90여만 원. 상여금도 600%였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곳에 입사한 친구들과 비교해도 괜찮은 조건이었다. 정직원에 호봉제였고, 승진제도도 있었다. 몇 년 열심히 일하면 관리직으로 승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만큼 일이 힘들기는 했다. 쿠리어라고 부르는 배송직원 중에 30대 이상은 딱 한명이었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일을 하기는 무리였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옷에 소금기 안 배면 이상한 날’이라 할 만큼 배송은 달리는 일이었다. 비행시간에 맞춰 서류를 보내야하기 때문에 시계를 보며 1층에서 10층으로,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마치 기록을 경신하려는 마라톤 선수처럼.

‘심장이 터질 듯’ 시간에 쫓겨 다니는 쿠리어들에게 가장 곤란한 순간은 고객들이 기다려달라고 할 때이다. 약속한 시간을 잊고 있다가 쿠리어가 오면, 그제야 부랴부랴 서류를 준비하겠다며 쿠리어가 못 가게 붙잡았다. 지금 가지 않으면 다음 약속 시간에 늦을 것이고, 그럼 오늘 비행기에 실어야 할 짐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빨리 가야한다고 사정을 얘기해보지만 서비스센터에 불만 신고하겠다는 답만 돌아온다. 눈앞에 있는 고객은 기다리라며 붙잡고 있고, 언제 오냐는 고객의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으며, 회사는 6시까지 일을 끝내야 한다고 재촉해댔다. 쿠리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만 급했다.

▲ 내용과 무관한 사진입니다. ⓒgettyimagesbank
▲ 내용과 무관한 사진입니다.  ⓒgettyimagesbank


쿠리어들은 회사 방침대로 고객을 왕이라 생각하고 편의점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워가며 일했다. 몸은 쉽게 지쳤고 나이가 들수록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서른이 넘어도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입사 6년차인 진원씨 역시 승진시험에 합격한 터였고, 이곳을 그만둬도 특별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호봉제가 계약제로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규직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버틸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사정은 모두 비슷했고, 서른, 마흔이 넘는 쿠리어들이 늘어났다.

승진시험 합격해 계장이 되고 과장이 됐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역삼 센터가 확장하면서 사무실을 서초로 옮겼고, 다시 강북센터에서 또 다시 여의도 센터로 근무지만 바뀌었을 뿐, 쿠리어의 삶은 여전했다. 다른 지역 센터로 가라면 가고, 아파도 나오라면 나왔다. 수당이 안 나와도 그러려니 했다. ‘노동자의 권리’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너무 바빠서 점심도 못 먹으니 점심시간은 좀 달라’고 얘기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나이가 들고 연차가 쌓였기에 할 수 있는 얘기일 뿐 참고 버티는 게 일상이었다.

3분만 지각해도 시말서 썼다

무조건 참고 버티던 그가 더는 못 참겠다 생각한 건 입사한 지 18년만이었다. 사건이 터진 건 고객이 건 전화 한 통이 시작이었다. 전화를 건 고객과는 며칠 전 실랑이가 있던 곳이었다. 3개월 넘게 거래하던 곳이었고, 시간에 쫓기는 쿠리어와 기다려 달라는 고객 사이에 늘 있던 실랑이였다. 그날이라고 특별한 건 없었다.

서비스센터에 신고한 내용은 직원 말투가 기분 나빴다는 점, 그리고 전달한 물건이 바뀌었다는 점을 이유로 담당 직원을 바꿔달라는 요구였다. 진원씨는 당혹스러웠다. 말투가 친절하지 않은 게 직원을 교체할 이유 같지는 않았다. 말투가 문제였다면 왜 그동안은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평상시와 똑같이 고객을 확인한 뒤 직접 물건을 건넸기 때문에 물건이 바뀌었다는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센터 관리자가 시말서를 요구하면서 문제는 커졌다. 진원씨는 시말서를 쓸 정도로 잘못인가 싶었고,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하루는 센터장이, 다음날은 감독관이, 또 다음날은 조장이, 돌아가며 시말서를 쓰라고 닦달했다.

▲ 내용과 무관한 사진입니다. ⓒgettyimagesbank
▲ 내용과 무관한 사진입니다. ⓒgettyimagesbank


시말서를 쓰라는 요구는 DHL 쿠리어들이 수시로 겪는 일이다. 고객에게 불만신고가 오는 경우에는 ‘무조건 시말서’였다. ‘고객한테 연락이 오면 손 쓸 수 없으니까 알아서 입조심 해’라는 얘기는 쿠리어들도 항상 듣는 얘기였다. 시말서 쓰라는 얘기를 밥 먹듯 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며 같다며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속도가 빨라졌다.

“3분만 지각해도 시말서 쓰라고 해요. 원래 쿠리어들이 30대 이상은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4, 50대들도 많거든요. 나이가 많고 오래 일한 사람들은 어쨌든 신입보다 월급을 많이 받죠. 실제로 일은 느리고 대하기는 어려우니까 시말서를 쓰게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센터장은 시말서 많이 받아놓으라고 하고, 감독관은 ‘저 암적인 존재, 누가 총대 메고 그만두게 해라’ 이런 얘기도 거리낌 없이 하니까.”

그는 물건이 바뀐 사실을 확인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회사는 답이 없었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선 시말서를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도 않은 잘못을 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소한 실수로 시말서를 벌써 두 번이나 썼으니 이번 일로 시말서를 쓰면 세 번째, 권고사직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객을 찾아갔다. 어떻게든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물건이 바뀐 것이 확실한지를 물었고, 고객은 확인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고객은 사실을 확인하는 대신 서비스센터에 그를 또 한 번 신고했다. 답답한 마음에 고객을 찾아간 건 스스로 생각해도 ‘결정적인 실수’였다. 고객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갔다는 이유로 그는 징계위에 회부됐고, 인천 공항업무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생애 처음 눈에 띈 단어 ‘노동’

억울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먹고 살기는 해야 했기에 물류센터로 출근했다. 일은 말도 안 되게 힘들었다. 6개월 동안 손가락을 다치고 손목 증후군에 걸렸으며 발목 힘줄이 끊어졌다. 가슴에 쥐가 난 듯 경련이 일어 자다가도 벌떡벌떡 깬다.

DHL에 스물여섯에 입사해 마흔 다섯이 될 동안 죽어라 일만 했다. 회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아파도 참고, 하라는 대로 일한 그였다. 그런데도 회사는 징계를 이유로 자신을 물류센터로 보낸 걸 생각하면 헛웃음이 났다. 인천으로 온 뒤, 20년 세월을 그는 자주 떠올리게 됐다. 뉴스에서 보았던 고객의 갑질 사건도 전에 없이 자꾸 생각났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진원씨가 정의당에 가입한 건 지난 5월,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때였다. ‘노동이 당당한 나라’라는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일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껏 노동자로 살면서도 노동, 혹은 노동자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정의당 비상구를 통해 노무사를 알게 됐고, 처음으로 자신이 겪은 일들을 남김없이 털어 놓았다. 비상구에서 알려준 노동법은 20년 동안 어디서도 일러주지 않은 얘기들이었다. 누군가 노동자 얘기를 들어준다는 생각에 속이 후련했지만, 그동안 노동자로서 권리를 누리지 못한 걸 생각하면 회사에도,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이제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노무사 도움을 받아 노동위원회에 부당전보와 부당감봉 구제 신청서를 냈다. 쉽지 않은 걸 알지만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는 쓰게 웃었다.

“정당에 가입한 건 끈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노동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어떤 삶을 살건 일을 하면서 사는데, 누구도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제가 그동안 정말 무미건조하게 살았다는 걸 느꼈어요. 되든 안 되든 노동자 목소리를 알려야겠다고 혼자 다짐을 한 거죠.”

‘노동이 당당한 나라’는 아직, 멀었다

싸움을 시작하자 벽은 엉뚱한데서 부딪쳤다. 부당전보의 경우 발령 3개월 이내에 이의제기를 해야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그가 발령을 받고 처음 출근을 한 건 5월 2일, 규정에 맞추려고 8월 1일에 구제신청서를 냈지만, 발령이 확정된 건 4월 17일이라는 본사의 주장에 노동위는 제척기간이 지났다며 신청을 기각했다. 재심도 기각됐다.

불만신고 한 번 받았다고 직원에게 시말서를 쓰라는 건 정당하지 않다는 걸 밝히고 싶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쓴 시말서가 부당전보와 권고사직의 근거가 되는 것도 문제라는 걸 그는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말서 얘기는 꺼내볼 틈도 없었다. 그는 노동위도 ‘날림’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노동자를 위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아무도 제 얘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계속 3개월 지났다는 얘기만 반복해요. 그런데 3개월 이내에 이의제기를 해야 한다는 규정은 누구를 위한 규정이에요? 노동자를 위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노동위에서조차 고객이 물건을 잘못 보냈더라도 서비스 업체기 때문에 직원이 무조건 사과해야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노동부조차 손님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암적인 존재’라는 둥, ‘자식 보기에 부끄럽지 않냐’는 둥, 상사 막말에 화가 나 잠을 못 이루면서도 막말을 들은 직원은 고개를 숙인다. 한겨울, 양말을 두 켤레씩 껴신고도 벌벌 떨며 일하는 직원들은 너무 추워서 일 못하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그래도 겨울용 작업화를 달라고 말하는 직원은 없다. 출퇴근 기록기가 없어 일한 시간과 수당을 일일이 손으로 적다보니 정확하지 않다. 누군가 악용할까봐 출퇴근 기록기를 못 쓰겠다고 말하는 건 관리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이다. 고객이 잘못해도 늘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노동자다. 종일 뛰어다니느라 바빠 다른 데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혹시나 잘릴까 말 한마디 못 했다. 몇 개월 전까지 진원씨도 그랬다.

회사와 갈등을 겪고 노동위에 쫓아다녀보니 법도 정부도, 그리고 노동자 스스로도 노동자 편이 아니었다. 회사가 직원을, 노동부가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볼수록 불합리한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노동자 편에 서겠다는 정당이 있어 싸움을 시작하긴 했지만,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만 지우는 구조는 어마어마하게 단단했다.

그렇다고 싸움을 그만둘 이유는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진원씨는 회사에서 더 이상 시말서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취업규칙에 따라 시말서가 경위서로 바뀌었다는 말이 그에게는 회사가 잘못을 인정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언제 또 시말서를 쓰라고 할지 알 수 없지만, 그 한마디로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되었다.

그는 정의당에 가입한 이후로 정당에서 하는 시민교육과 노동법 교육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알아야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노동하는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는 법을 먼저 배웠다. 꿈은 배우면 배울수록 커졌고, 나누면 나눌수록 가까워졌다. 그게 또 다른 동력이 돼준다는 것도 배웠다.

풀근무를 끝내고 막차를 타러가는 길, 커다란 그의 가방엔 땀에 흠뻑 젖은 옷과 양말, 그리고 노동법이 담긴 책이 한 권 들어있다. 서로 존중하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이 너무 뻔하고 흔한 말이라, 어떨 땐 그 꿈이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더 이상 꿈꿀 필요가 없어진 말은, 아주 시시해지고 만다. 진원씨는 소중한 그 꿈이 시시해지지 않고,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책을 펼쳐든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