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눈이 없어 뭉치고, 손이, 발이 없어 뭉치고, 입이 없어 뭉친다 (중략) 과거가 없어 뭉치고, 미래가 더욱 현재가 없어 뭉친다,”

지난 8일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KBS 사장 공모에 도전하겠다고 밝힌 임병걸 KBS 기자는 오규원 시인의 시 ‘어둠의 힘’을 낭독했다. 1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며 KBS에서의 지난 30여 년을 돌아본 임 기자는 구성원들에 대한 부채 의식을 고백하며 남은 시기 KBS와 시청자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임 기자는 지난 2008년 KBS 기자협회와 PD협회 중심으로 일어난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사원행동’에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런 것 때문에 이번 파업에는 치열하게 함께 했다”며 “(적폐 청산에 있어서) 누구 못지않게 강한 의지와 추진력과 청산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임 기자는 최근 ‘최남수 YTN 사장’ 사태를 보며 KBS의 과거를 이해하는 사장이 적폐 청산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출마를 굳혔다고 말했다. 그는 “내부 출신 후보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돼야 YTN 사태와 같은 예기치 않은 결과를 막아내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전국언론노조 YTN지부는 최 사장을 ‘부적격 인사’로 꼽고 지난 1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MB 정부의 방송장악 시기 동안 최 사장은 YTN에 없었다.

임 기자는 “과거 보직 경험을 통해 KBS 제반의 경영상 문제점이나 현안, 재정 위기 극복 방안, 뉴미디어 시대에 살아남을 전략, 노사 관계 등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며 본인이 KBS 경영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마련할 적임자라고 밝혔다. 현재 보도본부 해설위원인 임 기자는 지난 1987년 KBS에 입사했다. 입사 이후 도쿄특파원, 경제부장, 사회부장, ‘일요진단’ 앵커, 수신료현실화추진단장 등을 지냈다.

▲ 임병걸 KBS 기자가 지난 8일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KBS 사장 출마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임병걸 KBS 기자가 지난 8일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KBS 사장 출마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왜 KBS 사장에 출마하게 됐나.

“KBS 총파업이라는 큰 싸움이 있었다. 경위야 어찌됐든 시청자 여러분께 좋은 방송 보여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 이제 우리는 싸움을 통해서 얻어낸 소중한 결과물을 갖고 좋은 방송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KBS 청산은 물론이고 재건과 관련해 그간 KBS에서 쌓아온 방송에 대한 이해와 공영방송 철학 가치, 보직을 거치며 쌓아 온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KBS에 기여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 결정적 계기가 있나.

“KBS가 망가지는 동안 외부에서 질책이 많았다. 특히 KBS 출신 사장들이 무엇을 해왔느냐는 실망과 분노 때문에 외부에서 (사장이) 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런데 총파업이 길어지고 투쟁이 강고해지면서 (잔여 임기) 8개월 간 KBS를 재건하려면 KBS를 잘 모르는 사람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참혹하게 망가지고 투쟁한 주체는 보도본부였다. 이걸 복원하는 사람도 기자일 수밖에 없다는 결자해지 심정으로 나섰다. 또한 내부 출신 후보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돼야 YTN 사태와 같은 예기치 않은 결과를 막아내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 YTN 사태를 어떻게 봤나.

“미디어에 요구되는 개혁은 지난 2년 광장과 촛불로 대변되는 ‘민주주의의 성숙’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의 연장선이다. YTN 사장 임명은 그러한 시대적 사명에 미흡한 인사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현 (최남수) 사장이 가진 리더십과 철학은 시대적 요구를 담보하기에는 미흡하기에 YTN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성원들 요구를 대변하고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인 인사가 (사장이) 돼야 한다.”

- 구성원들은 지난 10년 적폐와 싸워 온 사람이 사장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본인은 이에 적합한가.

“솔직히 최적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2008년 KBS에 불기 시작한 억압과 배제의 시작은 정연주 사장 강제 퇴출이었다. 그 과정에서 분연히 일어난 사원행동 중심으로 굉장히 어려운 싸움을 벌여온 점을 인정한다. 나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하나는 이전까지 정연주 사장 비서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서게 되면 본의와 달리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고민이 있었다. 더 가혹한 탄압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후보로 나온 분들에 비해 치열하게 싸우지 못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이번 파업에는 치열하게 함께 했다. 부채 의식도 있다. 9년간 KBS가 처참하게 어떻게 망가지는지 봐 왔다. 건강하고 능력과 창의력이 넘치던 후배들이 어떻게 울분과 냉소와 좌절로 빠져드는지 봤다. 누구 못지않게 강한 의지와 추진력과 청산 능력을 갖고 있다.”

- 사장 취임 이후 제1과제는 무엇인가.

“국회 청문회까지 포함하면 3월 말이 돼야 사장으로 취임할 수 있다. 잔여 임기가 8개월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청산과 재건을 다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제1과제는 물론 청산이다. 하나는 인적 청산이다. 고대영 사장 붕괴는 그와 함께 억압적 구조에 참여했던 간부들의 붕괴다. 누가 어떻게 권력과 결탁해 조직을 억압했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우리 힘만으로 부족하다면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 가칭 청산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노사가 머리 맞대 정확하게 복기해야 한다. 제작, 편성, 라디오, 경영 분야도 강도의 차이일 뿐 문제가 있었다. 급변하는 모바일, 멀티미디어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 조직도 개편해야 한다. 편집·제작·취재 독립 보장 장치들을 만들거나 무력화한 것들을 복원해야 한다.”

▲ 임병걸 KBS 기자가 지난 8일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KBS 사장 출마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임병걸 KBS 기자가 지난 8일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KBS 사장 출마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다른 KBS 현직 후보들에 비해 본인 강점은 무엇인가.

“청산과 더불어 KBS 재건에 대한 노하우가 중요하다. 내게는 회사 경영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제작 현장 복원에 관해서는 (다른 후보들과도) 비슷하다고 본다. 다만 사장이라는 자리는 청산만이 아니고 KBS를 둘러싼 경영을 살펴야 한다. 비서라는 직책과 수신료현실화추진단장을 경험했다. KBS 제반의 경영상 문제점이나 현안, 재정 위기 극복 방안, 뉴미디어 시대에 살아남을 전략, 노사 관계 등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또한 경제팀장이나 사회팀장으로 일할 때 많은 기자들과 일하며 구성원들의 자유와 책임, 자율과 권한을 존중하는 장점이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

- 수신료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당위적으로 수신료를 현실화 해달라고 말씀 드리고 싶지만 지난 9년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아버린 KBS로서 그리 말씀드릴 수 없다. 원론적으로 수신료는 정쟁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 저희 부족함을 인정하지만 그동안 여야가 바뀌면서 (수신료) 인상과 반대 입장이 바뀌는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지난 38년 동안 한 번도 수신료를 인상하지 못했다. 전체 재원에서 차지하는 수신료 비율이 낮다. 이는 모든 프로그램 제작 등에 영향을 미친다. KBS PD들 상당수가 협찬과 PPL 위해 뛰어다녔다고 한다. 공영방송다운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수신료 현실화 통해 재원 기반이 건전해져야 한다.”

- 공영방송 KBS가 처한 위기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거대한 (미디어 변화) 흐름을 보면 오히려 정치로부터 독립은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미디어 폭발 시대엔 생존 및 자본과의 싸움에 놓였다. KBS는 전형적 ‘올드미디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KBS가 새로운 상품을 만들 때 과도한 선정성이나 오락성, 수익성 등을 추구했다는 비판에 놓일 때가 있다. 물론 그런 것 때문에 주도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건 변명이다. 내부가 정리되고 나면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뤄질 것이다. 새로운 KBS가 만들어지면 빠른 속도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 방송계 갑질 관행 개선 방향은.

“이것이야말로 사장의 중요한 역할이다. 다만 (임기) 8개월 내에 할 수 있다기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이다. 우선 표준계약서를 작성하고 지급액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비정규직이나 계약직 직원 등 업무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변형된 파견 문제도 해소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들에 대해 KBS 구성원들이 가진 우월주의를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경영진 자세도 중요하다. 흔히 말하는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이다. KBS 아카이브에 대한 자료도 비정규직 등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일반 시민에게는 왜 허용하지 않는지 고민해야 한다. 지역 방송과 본사 모두, 공개해서는 안 될 불가피한 것을 빼고는 아카이브 및 공간 등 모든 시설을 개방해야 한다.”

- KBS만의 경쟁력 확보 방안은.

“KBS가 10년 전 갖고 있던 강력한 경쟁력이 파괴됐지만 회복할 수 있다. 종합편성채널에서 잘 나간다고 하는 PD들은 KBS 출신이다. 지금도 그만한 인재들이 있다. 양질 프로그램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KBS는 그동안 창의성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억압해왔다. 이를 걷어내 다시 마음껏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보도도 마찬가지다. KBS 뉴스 영향력과 시청률은 과거 부동의 1위였다. 이를 복원할 수 있는 경험과 유전자는 남아있다. 기자들 공백을 채워주는 저널리즘 스쿨도 만들 것이다. 외부 학회, 전문가 집단, 시민단체들과 연계해 함께 노력한다면 복원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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