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드러나면 핵탄두급이다.” 고대영 전 KBS 사장의 한마디는 수년 간 묻혀있던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의 전말을 암시했다.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은 지난 2011년 6월 KBS 기자가 민주당 대표 회의실에서 KBS 수신료 관련 비공개 회의를 몰래 녹음해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한선교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이다. 불법 도청 당사자로 지목된 KBS 기자를 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보도본부장이었던 고대영 전 사장이 도청 의혹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폭로가 지난해 ‘뉴스타파’를 통해 보도됐고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KBS기자협회는 “자정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며 민주당 도청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진상조사위는 고 전 사장에 대한 관련자 진술을 공개했다.

정년을 앞두고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았던 정필모 기자가 KBS 사장에 출마한다. 지난 7일 서울 당산동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가진 정 기자는 남은 기간 KBS 바로세우기에 헌신하기로 다짐했다고 밝혔다. 1987년 KBS에 입사한 뒤 경제과학팀장, 1TV뉴스제작팀장 등을 지낸 정 기자는 정연주 전 KBS 사장이 MB 정부에 의해 강제 해임된 2008년 이후 10년 간 보직 없이 지냈다.

정 기자는 “30년 동안 KBS가 몰락하고 붕괴되는 과정을 지켜봤다”며 “KBS에서 마지막으로 KBS를 복원하는 소임을 맡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KBS 문제는 상당 부분 저널리즘 붕괴에서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지난 시간 그가 공영방송 문제 개선을 위한 연구와 활동에 천착해 온 이유다.

정 기자는 ‘경제전망대’ 데스크 겸 앵커, 경제뉴스 해설위원, KBS 1TV 비평 프로그램 ‘미디어인사이드’ 진행 등을 맡았다. 방송기자연합회 ‘방송 보도를 통해 본 저널리즘의 7가지 문제’, ‘방송뉴스 바로하기’ 등에 공저자로 참여한 그는 정치와 자본 권력, 내부 관료 집단으로 이어지는 KBS 통제 메커니즘을 분석한 논문으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KBS 사장 출마 의사를 밝힌 정필모 기자가 7일 서울 당산동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KBS 사장 출마 의사를 밝힌 정필모 기자가 7일 서울 당산동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왜 사장에 출마하기로 했나.

“결심은 열흘 전쯤 했다. 정년이 6개월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자리 욕심은 없었다. 그러나 후배들이 이번 기회에 KBS를 바로 잡는 강한 사장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고, 학회나 시민단체 분들이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후배들은 내가 강단성 있게 개혁을 추진할 거라고 생각한다.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KBS 내부에 (노태우 후보 당선을 위한) ‘향후 시국 대처 방안’ 지침이 은밀하게 돌았다. 이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동기들과 지역으로 쫓겨났다가 이듬해 서울로 올라왔다. 1997년도 15대 대선 때는 김대중 후보에 불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편파·왜곡 방송에 맞섰다. 2008년 정연주 사장이 강제 해임되던 시기 청와대, 국가정보원, KBS 출신 의원 등이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나 MB정부 고위공직자 검증 보도에 압력을 가했을 때도 이를 거부하고 편집권을 수호했다고 자부한다. 정 전 사장 해임 직후 보직을 내려놓은 지 10년이다. 이런 것들을 주변에서 높이 산 것 같다.”

- 최근 142일 파업 때는 어떤 역할을 했나.

“지난해 총파업 전 ‘뉴스타파’ 보도로 KBS 민주당 도청 사건이 약 6년 만에 수면 위로 부상했다. 경찰 수사로도 밝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무혐의 처분으로 끝났던 일이다. KBS 기자협회가 KBS를 자정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는 취지로 진상조사를 결의했다. 후배들 권유로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았다. 고대영 사장에게 책임을 묻다 사측으로부터 민사소송까지 당했다. 그 과정에서 기자들의 제작 거부를 시작으로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새노조 파업 집회와 광화문 릴레이 발언 때도 참여했다.”

- 어떤 KBS를 만들고 싶나.

“이제는 KBS를 국민에게 돌려드려야 한다. 지금까지 KBS는 권력 눈치 보면서 정권 편향적 방송을 해왔다. 모토는 ‘권력에는 당당하고 국민에게 헌신하는 방송’이다. 내부 적폐, 즉 인적·제도적 폐단을 제거하고 제작 자율성을 직원들에게 보장해주는 것, 정치적 독립성을 수호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주인인 국민에게 방송을 돌려주는 데 목적이 있다.”

- KBS 정상화와 적폐청산 원칙은 무엇인가.

“KBS는 공영방송으로 정상화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재구축, 재탄생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적폐 청산은 공영방송을 바로 세우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어설픈 봉합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과거로 돌아갈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문서, 성명서, 코비스(KBS 내부 게시판) 글들에는 그들(KBS 적폐 인사들)이 서명하고 시행한 인사 보복 조치 등이 분명 남아 있다. KBS 바로 세우기 진상조사위원회(가칭)를 만들어서 객관적 자료와 증언을 수집한 뒤 문제 있는 인사들에게 법적·인사상 책임을 물을 것이다. 방송법에 보장한 편성 자유 위반부터 제작 자율성 침해 사례, 또 사규, 방송 강령, 일반 보도 준칙, 윤리 강령 등에 어긋나는 행위를 조사해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

-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편성규약에 있는 일종의 부당 지시 거부권을 저항권 형식으로 사규에 집어넣으려 한다. 부당 지시 내린 사람에 대한 처벌 근거가 될 것이다. 근무 평가를 바탕으로 간부를 발탁하고 보임할 때 직업윤리실천조항을 반드시 넣을 것이다. 나는 차기 KBS 사장이 권력으로부터 KBS를 지켜내겠다는 공개 선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보도 경쟁력 확보 방안을 설명해달라.

“탐사보도국을 신설할 것이다. 탐사보도야말로 공영방송이 다른 방송과 차별화할 수 있는 취재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KBS 현재 인력들에게 자리만 마련해주면 충분히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PD저널리즘’ 장점을 살린 시사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한다. 뉴스, 매거진, 버라이어티, SNS 등이 융합된 형태의 새로운 PD저널리즘을 구현해야 한다. 한국 TV에서 탐사저널리즘 최초로 시작한 게 PD들이다. 그런 프로그램들이 보다 더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 KBS 사장 출마 의사를 밝힌 정필모 기자가 7일 서울 당산동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KBS 사장 출마 의사를 밝힌 정필모 기자가 7일 서울 당산동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미디어 환경 변화 대처 방안은 무엇인가.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게 ‘클립(clip)’형 콘텐츠다. KBS도 네티즌 창의성을 살린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것을 우리 방송에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자체 브랜드를 가진 KBS만의 플랫폼을 기존 방송과 연계시켜 인지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스타트업이나 파워 플랫폼을 운영하는 업체와도 제휴하고 상생할 수 있다.”

- 국민에게 KBS를 돌려주는 방안은 무엇인가.

“수많은 정보들이 난무한다. 가짜뉴스도 있지만 제도화된 언론의 ‘역정보’도 문제다. 특정 사실만 내보내 프레임을 왜곡하는 등 여론을 호도하는 정보들이 민주적 여론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 주요 언론 가운데 그런 곳이 많다. 이를 국민이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미디어 해독 능력을 높여야 한다. KBS가 미디어 리터러시 프로그램을 신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교육 과정을 개발하는 것도 좋다.”

- 언론사 내부 갑질 문제는 어떻게 해소할 건가.

“차별 대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빠른 시일 내 개선해야 한다.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해서는 정말 단호해야 한다. 여성에 대한 성적 차별을 포함해 범죄적 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다만 저의 원칙은 회사가 안을 만들어서 시혜적으로 대처하는 것보다 그분들이 스스로 안을 만들면 이를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 시혜하듯 하는 것도 하나의 적폐라고 생각한다.”

- 경영능력에 대한 우려가 있을 텐데.

“사장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만능 인간은 아니다.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 전 각 분야 직원은 물론 때로는 시청자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판단하는 것이다. 경영 능력이라는 건 사실 상당 부분이 소통 능력과 결단력이다. 특히 방송 조직은 워낙 복잡한 조직이고 다양한 직군이 모여서 일한다. 때때로 인사권조차도 소통과 결단을 위해 내려놓을 수 있다. 리더에게 요구되는 것은 소통 능력과 결단력 그리고 판단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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