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 수첩’을 증거에서 배제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대법원에서 변경될 여지가 있다. 기존 판례와 학설은 동일한 상황에서 간접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업무수첩(이하 안종범 수첩)은 이 부회장 뇌물 혐의를 입증하는 핵심 증거다. 안 전 수석이 대통령 지시·전달 사항을 그대로 기재한 수첩으로, 대통령과 기업 총수 간 독대 내용, 대통령의 삼성 현안 관련 지시 등이 적혀 있어 대통령과 이 부회장 간 대가관계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안 전 수석이 자신이 쓴 수첩이 맞다고 인정하고 있음에도 증거채택 여부가 문제가 되는 까닭은 형사소송법 전문법칙 때문이다. 전문법칙은 타인의 전언이나 서면과 같은 ‘전문증거’의 경우 예외적으로만 유죄증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쉽게 말해 ‘누가 그렇다더라’는 내용의 진술을 그대로 증거로 인정할 경우 피고인의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어 구치소를 나서 차량에 올라타고 있다.ⓒ민중의소리
▲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어 구치소를 나서 차량에 올라타고 있다.ⓒ민중의소리

학설과 판례에 따르면 이 같은 증거는 범죄 입증에 필수적인 사실(요증사실)이 아닌 그밖에 간접사실을 증명하는 데 사용될 땐 ‘전문증거’에 해당되지 않는다. 즉 직접증거가 아닌 정황증거로 사용될 땐 증거능력이 인정될 수 있다.

이 부회장 사건에 적용하면, 요증사실은 대통령과 이 부회장간 독대 내용이다. 특검은 안종범 수첩을 “독대 내용의 진실성 자체를 입증하는 직접 증거”거 아닌 “그런 내용이 수첩에 기재돼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입증하는 간접증거로 제출했다. 특검은 안종범 수첩을 포함해 휴대전화 수·발신 내역, 청와대 내부 문건 등 간접증거를 종합해 이 부회장의 뇌물 혐의를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의 증거 채택을 둘러싸고 이 부회장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우회적으로 그 기재 내용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증거로 사용되는 결과가 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 결과 뇌물 사건 진실을 규명하는데 안종범 수첩 내 기재 사항은 반영되지 않았다.

지난 2013년 7월 ‘왕재산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은 이와 정반대의 판단을 내렸다. 왕재산 사건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IT업체 대표 김아무개씨 등 5인이 기소된 사건이다. 이들의 회합 관련 정보가 담긴 컴퓨터 파일 출력물이 이들의 회동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대법원은 출력물이 “그런 내용이 담긴 파일이 피고인 컴퓨터에 저장돼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입증하는 간접증거가 된다며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만남 사실을 직접 입증하는 직접증거가 아니라 “문자정보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입증하는 간접증거로 받아들인 것이다.

통설도 이 사건 대법원 판단 논리와 같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1·2심 재판부,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 등이 기소된 이화여대 입시 비리사건 1·2심 재판부,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및 장시호씨 1심 재판부 등은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안종범 수첩은 왕재산 사건의 전자파일보다 정확성과 신빙성이 높은 증거이기도 하다. 안 전 수석은 국정농단 관련 재판 법정에 수회 출석해 대통령이 지시하는 사항을 자신이 받아적은 수첩이라고 확인했다. 왕재산 사건은 ‘해시(hash) 값’ 확인 등 디지털 자료 원본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요건이 법정에서 완벽히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된 사건이다. 피고 측이 문서작성 사실을 부인하기도 했다.

기존 판례 및 통설과 배치됨에도 2심 판결문에서 안종범 수첩 증거 배제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A4 반 페이지’ 가량에 불과하다. 한 특검 관계자는 “왕재산 사건 판례는 특검이 2심 재판을 시작할 때부터 프레젠테이션 공방과 의견서 등으로 재판부에 제시했다”며 “정반대로 판단했다면 충분한 이유를 설명해줘야 하는데 판결문엔 그런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법조계 일각에선 2심 판단에 대해 ‘간접증거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 길 자체를 차단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범죄자 자백이 없는 경우엔 간접사실들을 종합해 범죄 실체를 규명하는데, 아무리 좋은 물증을 확보해도 이 사건처럼 증명에 쓰일 수 없게 된다면 형사재판에 아주 심각한 문제점을 만드는 것”이라며 “부인하는 사건의 경우 입증할 방법이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삼성 측 변호인단이 의견서 등을 통해 개진한 미국의 한 전문법칙 학설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은 향후 이어질 대법원 상고심에서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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