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 김PD는 현재 36시간 째 깨어 있다. 김PD 앞과 옆엔 마찬가지로 수면을 미루고 대본작성에 시달리는 작가 넷이 있다. ‘막내(보조) 작가’ 수지작가가 가장 고단해보인다. 보조작가 둘 앞엔 박카스, 레드불 등 수면퇴치용 음료가 일렬로 놓여있다. ‘보출(보조출연)들 찜질방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어쩌나….’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기던 찰나,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 들린다.

“우리 여주인공 서 간호사가 노조를 결성하는 거예요!”

“뭐?! 노조?!” (일동 놀라며)

‘본격 노조 말하기 시트콤’ “그 XX를 죽였어야 했는데”(이하 그새죽) 5부작이 지난달 31일 완결됐다. ‘시트콤협동조합’이란 이름의 페이스북, 유투브 페이지에 게시된 5~7분 가량의 연작 시트콤이다. 등장인물은 인기 드라마 ‘유니콘의 후예’의 작가 넷과 정규직 CP, 계약직 PD 한 명이다. 이들은 사고를 친 주연 남배우를 하차시키기 위해 긴급 대본 회의를 하고 있다.

▲ 시트콤 "그 XX를 죽였어야 했는데" 스틸 컷. 사진=시트콤협동조합 페이스북
▲ 시트콤 "그 XX를 죽였어야 했는데" 스틸 컷. 사진=시트콤협동조합 페이스북

“그 XX를 초반에 죽였어야 했는데…” 시트콤은 스타작가 ‘임작가’의 거침없는 한 마디로 시작한다. SNS 트위터 이용자에겐 익숙한 대사다. 잠들기 전 악연을 떠올리며 내뱉는, 지난해 초 반짝 유행한 블랙 유머다. 재미를 우선 목표로 고민하던 송현주(31) 작가가 시트콤 분위기를 고려해 제목으로 붙였다.

시트콤 발주처는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의뢰 취지는 ‘노동조합 홍보’였다. 제작진에겐 ‘진지한 주제의 홍보물을 어떻게 끝까지 보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떨어졌다. 송 작가의 대본, 이경민(30) 감독의 연출, 김서영(27) 기사의 편집엔 모두 “중간에 영상을 꺼버리게 만들지 않겠다”는 일념이 담겨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일 서울 상암동 인근에서 제작진을 만나 그새죽 제작 후기를 들었다.

“사촌 형제들 생각하면서 썼다”

전개 속도는 대사 간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빠르다. ‘막장 드라마’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하는 스타작가의 과장된 모습이나 남자 보조작가의 백치미 등 웃음포인트도 곳곳에 숨어있다. 이 감독과 김 기사가 지루함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 시트콤 그새죽 제작진 김서영 편집기사(왼쪽), 송현주 작가(가운데), 이경민 감독.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시트콤 그새죽 제작진 김서영 편집기사(왼쪽), 송현주 작가(가운데), 이경민 감독.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럼에도 본래 목적인 ‘노조 언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화 중 주인공 서 간호사를 둘러싼 두 작가의 속사포 만담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병원이 2교대라 연애고 뭐고 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쉬는시간은 보장이 안되고, 워낙 직원이 없으니까…”(수지작가) “근데 그 병원이 쉬는 날마다 체육대회를 열어서 임원들 앞에서 춤추게 시키고 그런 곳인거야. 짧은 거 억지로 입히고.”(공작가)

”근데 또 월급은 너무 적네? 야근수당도 안 주고. 일을 해도 해도 돈이 안 모이는거야. 그럼 어떻게 해. 마음의 여유가 없지. 그러니까 연애를 할 수가 없는 거죠.“(공작가) ”인원보충 안 되는거 다 위에 사람들 때문인데 오히려 아래사람들만 죽어라 반목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여주인공 서 간호사가 노조를 결성하는 거에요!”(수지작가)

송 작가는 “나와 직업군이나 관심사, 학력이 다른 사촌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대본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우연히 유튜브에서 떠도는 영상을 봤는데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노조를 잠시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면서 “누군가는 이것을 끝까지 보고, 끝까지 보는 사람이 또 많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노조가 좀 더 친숙한 것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이 감독은 “(영상을 만든 후) 친구들이 카톡을 할 때 농담처럼 ‘노조가 없어서 그래’ ‘노조 만들어야지’라고 말할 때가 있다”면서 “시트콤을 본 사람들이 보고 나서 (노조를) 장난스럽게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실제로 친구들이 그렇게 하니 뿌듯했다”고 말했다.

노조는 대중매체에 쉽게 다뤄지는 단어는 아니다. 불편함이나 불이익에 대한 우려가 없었느냐는 물음에 제작진 3명 모두 “새롭게 시도해보는 방식(시트콤)이라 재밌겠다는 마음,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며 “배우들이 더 민감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다행히 다들 잘 받아들여주시고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오히려 배우들이 촬영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 준 덕분에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집에 가야 변비가 해결되지”

“집에 가야 변비가 해결되지.” “집에 가고 싶어요.” “김 PD님은 잠을 주무시긴 할까?” “우리가 사랑을 하려면요….”

마지막 5화가 끝나기 전 장면은 계약직 김 PD와 수지작가가 동시에 말하는 “사랑과 우정의 노동조합” 대사다. 다음 작품은 로맨스물이 어떨까 서로 생각하다 “연애도 해 본 사람이 잘 쓴다”며 “연애 좀 하고 살려면 노조가 있어야 한다”고 한탄한 뒤 나온 말이다.

송 작가는 “일을 하는데 적절한 휴식과 수익이 보장이 안될 때 힘들어지는 게 연애였다”면서 “처음에 노동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항상 뭔가 일이 힘들고 돈이 없으면 남자친구나 가족과 싸우게 되더라. 이 얘길 꼭 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시트콤 배경이 된 드라마 현장은 제작진 스스로의 노동현장이기도 했다. 송 작가는 “작가의 경우, 말 한 마디에도 개인의 고용이 달려 있어 어느 한 명이 용기있게 문제제기를 하기 쉽지 않다”며 “이런 걸 당연한 분위기로 만드는게 중요한데 (그렇지 않다), 요즘은 방송계에서 자신의 노동 문제를 많이 얘기하는 것 같은데 좋은 분위긴 것 같다”고 말했다.

그새죽은 민주노총의 예산지원으로 만들어졌다. 총 제작진은 25여 명이다. 이 감독은 “인건비는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게 충분히 받았다”며 “적절한 수준과 상황에서 제작이 이뤄지도록 작가가 스케일을 잘 구성해줬다”고 말했다. 시트콤이 한 장소에서만 이뤄진 배경엔 균형을 맞추려는 작가의 셈법이 반영돼 있었다. 야외 로케이션이 많을 경우 갖춰진 수준보다 더 많은 예산과 노동이 투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청년 작가·감독·스탭의 창작물 “민주노총은 의뢰만”

민주노총은 ‘의뢰’만 했다. 민주노총에서 영상물 기획을 맡은 정나위 미디어선전실 차장은 “우린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계속 말하는 사람들이니. 노조나 민주노총을 직접 말하려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면서 “다른 주문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시작만 같이 했지 제작 전 과정은 시트콤협동조합이 알아서 했다”고 말했다.

‘시즌2’ 계획은 미정이다. 이 감독과 김 편집기사는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다. 7년 째 작가일을 하고 있는 송 작가는 소속기관은 없고 계약에 따라 대본을 쓰고 있다. 이 감독, 송 작가, 김 기사 모두 “각자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할 수 있다면 시즌2에 참여할 것”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 차장은 “아직 결정된 바는 없으나 새로운 시도를 한 번 하고 그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시즌2 제작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제작집단 시트콤협동조합은 페이스북 페이지에 ”21세기에 걸맞는 사랑과 연대의 시트콤을 그대와 함께”라는 설명 문구를 게재하고 있다. 이경민 감독은 ”실제 협동조합 구조가 아니고, 지금은 프로젝트성 제작집단으로 보면 된다. 플랫폼의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만들어졌다”며 ”첫 작품이 민주노총 측의 의뢰를 받은 시트콤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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