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이 뜨겁다. 박근혜 시절 법원행정처가 판사 개개인들의 성향과 활동을 사찰하여 인사에까지 반영했다는 것이다. 특히 고약한 건 이 명단에 오른 판사들을 형사부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블랙리스트가 활용되었다는 소식이다. 

국정농단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형사 재판부들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해할 수 없던 재판결과가 이 블랙리스트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 책임자들은 이 때문에 고발을 당했다. 합당한 처벌이 필요하다.

▲ 2008년 4월4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고뫄스빌딩 특검사무실로 출두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2008년 4월4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고뫄스빌딩 특검사무실로 출두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임기를 마치기 직전 신설한 재판부가 있다. 이재용 1심 재판이 막바지이던 지난해 8월 9일에 만들어진 서울고등법원 형사 13부이다. 공교롭게도 이 형사 13부가 지금 이재용의 항소심 재판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재판부의 판사들이 이재용 변호인과 특별한 관계였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재용의 1심 변호를 이끌었던 대표 변호사는 법무법인 태평양의 송우철 변호사였다. 재판에서 이재용 바로 옆자리에 앉아 귀속말을 주고 받던 변호사이다. 그런데 형사 13부 정형식 부장판사가 하필 송우철 변호사의 대학동기이다. 형사 13부의 배석 판사인 강문경 판사와는 고등학교 동문이자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함께 근무했던 사이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재빠르게 대표변호사가 교체된다. 이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언론들은 침묵하거나 ‘삼성이 변호인단의 진용을 정비하는’ 조치라는 식의 보도를 할 뿐이었다.

이재용 1심 때를 떠올려보면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재용 1심의 첫 번째 판사는 이재용의 구속영장을 기각해서 ‘재벌영장 기각전문판사’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조의연 판사였다. 비난여론이 일자 재판부가 바뀌었고, 바뀐 재판부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바뀐 판사의 장인이 최순실의 오랜 지인임이 드러나면서 다시 한 번 재판부가 바뀌게 된다. 이재용 1심은 이렇게 재판부가 두 번 교체된 후 세 번째 재판부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때의 교훈 때문인지 항소심에서는 삼성이 대표변호사를 재빠르게 교체한 것이다. 언론의 협조적인 분위기 속에 형사 13부는 이재용 재판부로 살아남았고, 이제 선고를 남겨두고 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목표로 했던 일은 이재용 재판에서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7년 1월13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별검사 사무실에 소환되는 가운데 대기하던 직원들이 뒤따르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7년 1월13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별검사 사무실에 소환되는 가운데 대기하던 직원들이 뒤따르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사실 사법부는 처음부터 이재용 처벌에 일관되게 미온적이었다. 이재용 구속영장을 기각한 후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지 않았어도, 법률가들이 한겨울에 법원 앞에 노숙농성을 차리고 수십 일을 버티지 않았어도 과연 이재용이 구속되었을까? 거리의 분노로 이재용만 구속되었을 뿐 그와 함께 범죄를 기획하고 실행했던 삼성의 핵심 공범들은 구속되지 않았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범죄증명에 꼭 필요했던 통신영장들도 대부분 기각되었다.

삼성 앞에 한 없이 초라하고 작아지는 사법부의 모습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2008년 4조 5천억의 불법 비자금이 드러났지만, 이건희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사건을 조사했던 조준웅 특검과 법원이 함께 만든 결과이다. 얼마나 법이 우스웠던지, 당시 면죄부의 논거로 쓰였던 비자금 사회환원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 당연히 집행되었어야 할 세금도 정부의 협조 혹은 방관 속에 내지 않았으니 사법부만 탓하는 것도 우습지만 말이다.

삼성 X파일, 노태우 비자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병철의 사카린 밀수사건까지 삼성의 역사는 범죄의 역사였다. 세간에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들은 결코 일회성 범죄가 아니었다.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삼성의 관례이고 재벌총수가 직접 책임이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재용이 실형을 받기 전까지 삼성은 단 한 번도 처벌받지 않았다.

삼성의 80년 범죄의 역사에는 사법부의 책임이 작지 않다. 사법부에 주어졌던 몇 번의 기회는 매번 참혹한 결과로 끝났고, 범죄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법을 농락했던 건 바로 사법부 자신이었다. 다행히 사법부 안팎에서 사법부 블랙리스트로 법을 무력화하려 했던 이들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있다. 이 분노가 법을 무력화하려했던 시도를 막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2월 5일 이재용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내려진다. 국민들이 만들어 준 이 기회조차 걷어찬다면, 사법부는 법을 집행할 자격이 없다. 이 날의 선고는 이재용에 대한 선고이자, 사법부 자신에 대한 선고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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