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영 퇴진을 기치로 내걸었던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새노조)의 성재호 본부장이 제작거부와 파업 중 크게 신경을 썼던 건 ‘정치인’이었다.

그는 KBS를 방문하는 유력 정치인들이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구성원들의 바람과 달리 고대영 전 KBS 사장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주지 않을지 우려했다. 달리 말하면 고 전 사장이 자신의 임기 보장을 위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하진 않을지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이 지난해 7월 고 전 사장을 방문했을 때 새노조가 부글부글 끓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김 장관 측은 당시 기자에게 “행자부 출입하는 언론사 가운데 하나를 의례적으로 방문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8월31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새노조와 마주했다. KBS 1TV ‘뉴스집중’ 출연 차 서울 여의도 KBS 사옥을 찾은 것이다.

▲ 지난해 11월 KBS는 본관 1층 로비 시청자 광장에서 ‘포항 지진 피해, 우리가 함께합니다’를 특별 방송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생방송을 진행하는 장소 맞은 편에서 KBS 새노조 아나운서 조합원 30여명이 손 피켓을 들고 고대영 KBS 사장 퇴진을 촉구하는 침묵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KBS본부
▲ 지난해 11월 KBS는 본관 1층 로비 시청자 광장에서 ‘포항 지진 피해, 우리가 함께합니다’를 특별 방송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생방송을 진행하는 장소 맞은 편에서 KBS 새노조 아나운서 조합원 30여명이 손 피켓을 들고 고대영 KBS 사장 퇴진을 촉구하는 침묵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은 “이번 주부터 KBS 언론인들이 제작 거부하는 거 아시죠. 다음 주에는 총파업을 한다”고 말했고 안 대표도 “알고 있다. 잘 살펴보고 국회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잘하겠다”고 답했다. 안 대표는 ‘잘못된 신호를 고 사장에게 줄 수 있으니 고대영 사장은 만나지 말아달라’는 성 본부장 요청에도 “네”라고 짧고 굵게 답했다. 이 장면을 보도한 언론들은 “KBS 파업 지지 의사 밝혀”, “KBS 투쟁 지지”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안 대표는 지난해 11월에도 KBS 본관을 찾았다. 포항 지진 피해 모금을 위해 특별 편성된 프로그램에 안 대표, 이낙연 국무총리, 정세균 국회의장 등 유력 인사들이 출연하고 성금을 전한 것이다.

파업 중이던 새노조 조합원들은 생방송을 진행하는 장소 맞은 편에서 침묵 시위를 했다. 그들 손에는 ‘재난피해 모금방송은 고대영 없는 KBS에서’, ‘고대영 퇴진만이 재난방송 정상화 지름길’이라고 쓰인 손 피켓이 들려 있었다. 조합원들이 파업 중이라고 이야기하자 안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파업 노동자들의 처지와 요구를 성심성의껏 살피는 듯했던 안 대표가 26일 ‘고대영 해임’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그는 “방송법 개정을 외면한 채 고대영 사장을 해임한 것은 공영방송 경영진까지 자기 사람을 심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고대영 해임 행위를 “적폐”로 규정했다.

월급 없이 142일 동안 거리에서 ‘방송 정상화’를 외친 KBS 언론 노동자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다. 그가 주장하는 “방송법 개정” 역시 고 전 사장이 해임 직전까지 주장하던 논리였다. 고 전 사장은 방송법 개정이 처리되면 “사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방송법 개정에 대한 여·야 이견이 커 국회통과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고 전 사장의 사퇴 발언은 ‘임기 채우기’를 위한 꼼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 지난 22일 KBS 이사회가 고대영 사장 해임 제청안을 의결하자, 오언종 KBS 아나운서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KBS본부
▲ 지난 22일 KBS 이사회가 고대영 사장 해임 제청안을 의결하자, 오언종 KBS 아나운서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KBS본부
“양대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 불신이 크다. 대선 후보로서, 한 명의 시청자로서 지금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현 사장과 이사진이 방송을 잘 이끌고 있는지 평가한다면 100점 만점에 몇 점을 주겠나.”

이영섭 전 KBS 기자협회장은 지난해 4월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후보자들에게 이처럼 물었다. 가장 먼저 발언 기회를 잡은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는 “0점”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도 “낙제점”이라며 “외국에서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낙제점”을 부여한 공영방송 사장을 정당한 절차를 통해 해임한 것이 ‘적폐’인 것일까.

안 대표는 이 토론회에서 “해직 언론인들은 언론 독립성을 주장하다가 해직됐다”며 “다음 정부에서는 복직돼야 한다”고도 했다. 김장겸 전 MBC 사장이 해임되지 않았다면 최승호 PD(현 MBC 사장) 등 해직 언론인들 복직도 기약 없이 미뤄졌을 것이다. 파업·해직 언론인들이 안 대표에게 지지와 연대를 호소했던 것은 ‘안 대표의 정치’를 위해서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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