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국회에 포럼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정부 정책에 따른 시민사회단체의 개인정보 침해 우려를 ‘막연한 불안감’이라고 폄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진흥원이 국회에 포럼을 제안하면서 일정, 토론 주제까지 정하는 등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비판이 여당에서도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인터넷진흥원 개인정보비식별센터는 지난 5일 “국회 (가칭) 안전한 빅데이터 활용 포럼 구성 계획(안)”이라는 제목의 9쪽 짜리 문서를 만들고 여야 의원들과 접촉했다. 국회가 주도해 빅데이터 활용을 위한 비식별화 조치에 대한 포럼을 구성하고 논의 결과 법안을 발의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그런데 구성안을 두고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여야 일각에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인 한국인터넷진흥원이 국회를 앞세워 포럼을 제안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데다 해당 이슈에 대해 시민사회와 소송 중인 상황에서 실무자로 포럼을 주도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다.

▲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작성한 비식별화 포럼 구성안.
▲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작성한 비식별화 포럼 구성안.

특히 인터넷진흥원은 구성안을 통해 포럼의 취지를 “사회 구성원들 간 합의 필요”라고 밝히면서도 “(시민단체)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라며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이 근거가 없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또한 구성안은 “빅데이터 산업 기반인 데이터 활용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함에 따라 글로벌 선두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공론의장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구축하여 개인정보 활용 정상화 추진”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상 적극적인 개인정보 활용에 방점이 찍힌 셈이다.

포럼에서 다루는 비식별화 가이드라인은 박근혜 정부 때 추진된 개인정보 규제완화 정책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를 가져갈 때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게 돼 있는데, 비식별 처리라는 절차를 거치면 ‘개인정보가 아닌 것으로 추정’해 법에 저촉되지 않고도 개인정보를 빅데이터 마케팅에 활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A카드사 이용자의 결제 내역’에서 이름과 주민번호 등을 모자이크 처리하듯 가공을 거친 후 기업이 이를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2015년 ‘비식별화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면서 법적 지위가 없음에도 개인정보보호법을 우회하는 식으로 개인정보를 활용하게 된 데 있다. 또한 비식별화된 데이터라도 여러 데이터와 결합되다 보면 개인정보가 드러나 개인 전반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가 기업에 넘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개인정보가 드러날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가공된 빅데이터는 ‘익명화’라는 용어가 있음에도 박근혜 정부는 ‘비식별화’라는 모호한 표현을 만든 것도 문제다. ‘비식별화 가이드라인’은 ‘식별되면 다시 비식별화는 한다’는 식으로 개인정보가 드러날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인터넷진흥원은 ‘막연한 불안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같은 문제에 대해 독립기구들도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지난해 1월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비식별은 익명과 가명을 포함한 개념으로 이를 사용할 경우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의견을 행정자치부에 전달했다. 2016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비식별 조치의 방법, 수준에 따라 특정 개인이 재식별할 위험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견을 냈다.

▲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작성한 비식별화 포럼 구성안. 한국인터넷진흥원은 중립적이라고 강조했지만 시민단체의 입장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작성한 비식별화 포럼 구성안. 한국인터넷진흥원은 중립적이라고 강조했지만 시민단체의 입장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구성안은 시민사회단체인 진보네트워크센터와 참여연대를 참가 단체로 명시하고 소속 인사들을 ‘회원’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시민사회와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이름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이들 시민단체가 비식별화 관련 행정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다며 인터넷진흥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포럼 제안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은우 정보인권연구소 이사는 “대화를 하자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고 본다”면서도 “그동안 말도 안 되는 비식별화 정책을 추진하고, 인터넷진흥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화를 거부해온 것이다. 고발 당사자인 인터넷진흥원이 주관이 돼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비식별화 정책 전반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국회를 전면에 세우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인터넷진흥원은 직접 제안서를 만들고 포럼의 목적, 위원, 회원, 일정, 토론 주제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성안은 “국회차원에서의 포럼 구성”이라고 쓰고 있어 실제 포럼이 발족되면 인터넷진흥원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국회를 들러리로 내세우는 것처럼 보이는 데다 내용 역시 부적절한 면이 있기 때문에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참여를 주저하거나 거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진흥원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문수석위원측은 당론이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개별 의원을 섭외해 포럼을 추진하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한 여당 의원실 관계자는 “행사를 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지만 가이드라인의 기술적인 부분을 신뢰할 수 없다”면서 “신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강제사항이 없는 행정조치인 가이드라인으로 (비식별화를) 할 수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추혜선 정의당 의원실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고발 당사자인 인터넷진흥원이 포럼을 만드는 것 자체부터 문제가 있다고 본다”면서 “기술적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보안을 뚫는) 기술이 발전하는 점을 전제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지적과 관련 인터넷진흥원 개인정보 비식별지원센터 관계자는 “고소고발이 이뤄지고 시민단체 등과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에서 신임 위원장 부임 이후 합의점을 찾자는 취지에서 준비하게 됐다”면서 “변재일, 김경진 의원실이 의향이 있다고 해 (대표 격으로) 구성안에 반영하고 반대 의원, 시민단체와도 접촉 중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 일러스트= 권범철 만평작가.
▲ 일러스트= 권범철 만평작가.

이 관계자는 “우리가 전면에 나서면 시민단체에서 꺼려할 수 있으니 지원을 해드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잘해보자고, 간극을 좁혀보자고 하는데 만약에 지금 기사를 쓰시면 또 벌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터넷진흥원이 단순 지원자 역할이 아니라 막후에서 세부적으로 안을 만든 상태였고 시민단체의 입장을 폄훼한 사실은 구성안을 통해 드러난다. 이와 관련, 이 관계자는 “재식별이 무조건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점이 잘못된 이야기”라며 “막연한 불안감이라는 건 용어를 잘못 선택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비식별화 가이드라인이라는 개별 정책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대신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한 전반적 상황의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추혜선 의원실 관계자는 “비식별화 하나만 두고 논의하는 게 아니라 개인정보에 대한 철학부터 세워야 하는 문제”라며 “헌법에 정보기본권을 신설하고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원칙을 수립한 다음 개별 정책을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이은우 정보인권연구소 이사는 “개인정보 주관 부서들이 많은데, 밥그릇 싸움처럼 자신들의 권한을 내려놓지 않는 상황”이라며 “개인정보 감독기구를 개인정보보호위원회로 통합하고 독립기구로 구성하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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