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순실·정유라’ 두 모녀를 2016년 8월에야 알았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기 직전이자 정유라씨 승마 지원이 중단된 시점이다. 2014년 9월, 2015년 7월, 2016년 2월 등 3회 이상 대통령을 직접 만나 승마 후원을 요구받은 당사자임에도 후원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최순실을 몰랐다’는 말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부터 우병우 전 민정수석까지, 박근혜 정부 민간인 국정농단 사태 연루자들의 공통 진술이다. 과연 이 부회장은 그때까지 최씨를 알지 못했을까. ‘삼성그룹 2인자’로 불린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보고한 적 없다”고 증언하면서 자기 선에서 연결고리를 끊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6년12월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해 질의응답 중 생각에 잠겨 있다.ⓒ사진공동취재단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6년 12월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해 질의응답 중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재용, ‘왜 승마 지원 요구하나’ 생각 안했을까

의문은 2014년 9월14일 독대 때부터 생긴다. 이 부회장은 대통령이 당시 “삼성그룹이 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아주고 승마 유망주들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좋은 말을 사주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해달라”고 요구했다고 증언했다.

이 부회장은 대통령이 승마 종목을 특정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승마는 많은 스포츠 ‘비인기종목’ 중 하나로, 당시는 다른 종목보다 승마 후원이 시급하다는 필요성이 제기된 때도 아니었다. 그 해 4월 안민석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정씨가 ‘비선실세’로 지목된 정윤회씨의 딸이라 특혜를 받았다며 ‘공주 승마 의혹’을 제기해 논란의 중심에 선 적은 있었다. 독대에서 ‘지원해달라’와 ‘알겠다’라는 두 마디 대화만으로 이뤄졌다 가정해도, 돈을 낼 사기업 측에서 ‘후원을 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지 않을 가능성은 적다.

삼성그룹 임직원들은 이때부터 2015년 7월 독대가 열리기까지 ‘정유라’ 이름을 언급했다. 2014년 12월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 휴대전화엔 ‘(승마협회 행사에) 정유라는 참석하지 않도록 사전 조치됐다’는 보고 문자가 남아 있다. “‘실세 의혹’ 정윤회와 최순실, 이들의 딸과 말의 비밀”(2015년 1월17일자) 등 정씨 승마를 다룬 한겨레 기사 세 꼭지가 링크와 함께 남겨진 문자도 있다. 2015년 4~5월 경엔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이 최씨 측근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에게 정씨 임신 여부를 물어보기도 했다.

‘대통령 눈빛이 레이저를 쏘는 것 같았다.’ 2015년 7월25일 독대 때 대통령이 승마 지원에 대해 질책했다며 이 부회장이 남긴 묘사다. 이 부회장은 스포츠 후원을 두고 대통령이 자신을 질책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이 부회장을 비롯한 미전실 최고위층 간부들은 독대 이틀 전부터 긴급 회의를 열었다. 독대 직후엔 긴급회의가 두 번 열렸고 대통령 지시대로 협회 간부가 교체됐으며 박상진 전 사장은 곧바로 독일 출장을 잡았다. 대통령이 순수한 승마 발전을 요구했다는 것을 전제하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흐름이다.

▲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민중의소리
▲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민중의소리

최순실과 ‘호텔 객실 회동’만 6번, 삼성전자 사장이 이재용 재가없이 행동?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과 황성수 전 전무는 최씨를 2015년 12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열두 번 만났다. 그 중 절반은 독일 및 덴마크에서, 나머지 절반은 인천국제공항 옆 그랜드하얏트 호텔 ‘객실’에서 만났다. 양 쪽이 긴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스포츠 지원 논의를 호텔 객실에서 열 가능성은 적다. 이 시기 동안 삼성전자가 최씨 측에 지급한 승마 지원금은 56억3498만원이다. 박 전 사장이 독자적으로 이 같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박 전 사장과 최씨 간 긴밀한 관계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수첩에도 나와 있다. 2016년 5월22일 ‘VIP 지시’ 메모란엔 “박상진 삼성전자 수주 도와줄 것”이란 문구가 있다. 3일 전인 19일, 박상진 전 사장은 장충기 전 차장에게 최씨와 만난다고 보고했고 당시 최씨로부터 ‘삼성에 뭐 도와드릴 일 없느냐’는 말을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5월26일 에티오피아를 국빈방문했다. 순방길엔 박 전 사장이 함께 했다. 박 전 사장은 안 전 수석의 안내대로 행사장 헤드테이블에 앉았고 박 전 대통령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최씨는 이후 그에게 ‘악수 잘 하셨냐’고 물었다.

삼성전자 측 피고인들은 이같은 사실이 장충기 전 차장 혹은 최 전 실장까지만 보고됐다는 입장이다.

▲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이 2017년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뇌물공여 협의 관련 18차 공판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이 2017년 5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뇌물공여 협의 관련 18차 공판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로열 패밀리’ 김재열의 입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은 처남인 이 부회장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김 사장은 최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16억2800만원 후원에 깊숙이 개입한 관계자다. 최씨 조카 장시호씨의 진술, 카카오톡 기록 등을 종합하면 김 사장은 최씨의 존재를 파악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 장씨와 영재센터를 준비하던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김동성씨는 최씨의 존재를 알았다. 김씨는 센터 설립 전 최씨를 만난 적이 있다. 김씨는 최씨가 강릉시청 빙상단 감독 취업 청탁을 거절하자 관계가 틀어져 영재센터에서 손을 뗐고 자신의 스승이자 한국 빙상계 대부라 불리는 전명규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과 함께 일했다. 김씨 자리는 전무이사로 들어온 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규혁씨가 메꿨다.

최씨의 존재는 ‘김동성-전명규-김재열’ 순서로 전달됐을 가능성이 있다. 김종 전 차관은 최씨가 ‘김동성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장씨와 이규혁씨는 카카오톡으로 ‘전명규 감독이 영재센터와 이규혁 험담을 하고 다녀 삼성의 지원이 늦어진다‘고 대화하며 노심초사했다. 장씨는 전명규 감독이 김재열 사장에게 ’실제로 이규혁이 운영하는 곳이 맞는지‘ ’어떻게 시작된 단체인지‘ 등을 알아보라고 말한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 사진=민중의소리
▲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 사진=민중의소리

김재열 사장은 2011년부터 빙상연맹 회장을 맡는 등 빙상계와 연이 있다. 전명규 감독은 빙상계 내 유명 감독이자 2009년부터 빙상연맹 부회장을 지내 김 사장과 사이가 가깝다. 김재열 사장은 이규혁 선수와도 친분이 있다. 장씨는 전명규 감독이 영재센터 험담을 한다는 사실을 최씨에게 말했고 전 감독은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김재열 사장과 최씨의 또 다른 끈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 국제부위원장’이다. 이 자리는 ‘옥상옥’이라는 이유로 조직위 실무자들이 반대했지만 청와대 지시 이후 새로 만들어졌다. 조직 개편 후 국제부위원장으로 김 사장이 임명됐다.

김 사장은 재계 안팎에서 ‘이건희 회장이 역임한 IOC 위원 위상을 물려받는 역할’로 알려져 있다. 김 사장은 이건희 회장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에도 함께 했다. 김 사장으로선 평창올림픽 조직위 내 ‘자리’가 중요했을 것이다.

문제는 국제빙상경기연맹 ISU 집행위원이었다. ISU 집행위원으로 당선되면 국내 빙상연맹 회장 겸직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빙상연맹 회장의 당연직인 평창올림픽 상근 부위원장 자리에서 나와야 했다. 김 사장은 2016년 6월 ISU 집행위원으로 당선됐음에도, 평창올림픽 조직위가 5월 ‘국제부위원장’을 신설함에 따라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문체부와 청와대는 3월부터 이를 논의했다.

2015년 7월25일 안종범 수첩 ‘VIP 지시’란엔 ‘제일기획 스포츠담당 김재열 사장’ ‘메달리스트’ ‘빙상협회 후원필요’가 적혀 있다. 또한 ‘재단 문화·체육’도 적혀 있다. 전 대통령 박근혜씨는 2015년 7월25일 독대 시 이 부회장에게 승마지원 뿐만 아니라 김재열 사장으로 하여금 ‘동계스포츠 메달리스트가 설립한 단체’에 돈을 지원할 것과 곧 설립될 문화·체육 관련 법인을 후원할 것을 동시에 요구했다. 승마 지원의 배후를 알면 영재센터나 미르·K스포츠재단의 배후도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게 특검 측 입장이다.

특검은 이 부회장이 늦어도 2015년 7월 경엔 최씨의 존재를 인지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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