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22일 사설을 통해 “한국 정부를 겨냥한 북의 대북 제재 이완 책동은 올림픽 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이라며 “올림픽 참가처럼 남북 화해와 같은 그럴듯한 명분을 걸고 접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국 정부가 북 기만 전략에 넘어가지 않고 대북 제재를 더 강화하고 더 철저하게 단속하면 전쟁 없이 북핵을 해결하는 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8일 사설에서는 “북이 올림픽에 참여하는 것도 대북 압박·제재를 흔들어 핵무장을 완성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올해 1월부터 남북관계가 급진전되면서, 조선일보는 마뜩찮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은 대북 제재에 집중할 때’라는 것이 조선일보 주장의 핵심처럼 보인다. 우리 국민이 피살된 금강산에서 전야제를 하는 것도, 북 체제 선전장인 마식령 스키장에서 남북 선수들이 공동 훈련을 하는 것도, 따라서 부적절하다. 북한이 핵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논란이 된 과거 잘못을 반성한 것도 아니며, 때문에 지금 대화 국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사실상 김정은의 의도대로 넘어가는 것이라는게 조선일보의 주장이다.

그런데, 남북이 단절됐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한 차례 남북관계 개선의 가능성이 엿보였던 때가 있었다. 바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당시가 그랬다. 2014년 10월4일, 북한 권력서열 2위로 꼽히던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비롯해 최룡해·김양건 당 비서 등 북 고위급 대표단이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이유로 인천을 깜짝 방문한 바 있다.

그리고 이날 우리 측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류길재 통일부장관 등과 회담을 갖고 11월 초, ‘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새누리당 김무성 당시 대표도 이들 북 대표단을 만났는데 김무성 대표는 이 자리에서 “(새누리당) 국회의원 20명이 북한 여자 축구 대표팀을 응원했다”면서 “체육 교류를 통해 남북교류를 확대하자”고 제안했고, 황병서 국장은 “그래서 우리가 이겼나보다”라고 화답했다.

▲ 지난 2014년 10월6일 월요일 조선일보 1면
▲ 지난 2014년 10월6일. 조선일보 1면


이날은 토요일, 조선일보는 2일 뒤인 월요일 아침 신문을 냈다. 당시 불과 1년 전,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고 그 해에도 탄도미사일·방사포 사격은 이어졌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북한이 소형 무인기를 보내 추락한 것을 발견했다고 한 것이 그해 3월이었다. 그렇다면, 2014년 10월6일자 조선일보는 이 갑작스런 남북 대화모드를 어떻게 보도했을까?

이날 조선일보 1면 기사 제목은 ‘北황병서 “大通路(대통로) 열자”…정상회담 길 뚫리나’였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인 제목이다. 이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는 ‘북한의 중대제안은 없었다’고 했지만, 이번 회담에는 정상회담의 전조로 해석될 수 있는 파격적 요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고 해석했다.

아울러 “그동안 박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회담은 열려 있지만 회담을 위한 회담은 하지 않겠다’고 해왔다”며 안보라인의 한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이번 북한 최고위급 방문은 변화의 시그널로 해석된다. 남북 관계 진전에 따른 정상회담 가능성이 커졌다”고 내다봤다. 이때 남북 어디도 북핵 문제를 거론했다는 내용은 없었고, 과거 문제를 사과했다는 내용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일보는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방문만으로 ‘변화의 시그널’을 봤다. 반면 최근의 조선일보는 북한의 대화 제의가 핵을 유지하기 위한 ‘시그널’로 보고 있다.

이날 조선일보 지면에는 문정희 시인의 특별기고도 있었다. ‘감동의 인천, 성화가 꺼진 자리엔 남북 화합의 불꽃이…’ 제하의 기고다. 이 기고에서 문정희 시인은 “무엇보다 이번 인천아시안게임의 가장 절묘한 장면은 폐막식이었다”며 “북한 최고위급 3명이 참석함으로써 남북 대화와 화해의 물길을 단숨에 트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외부 기고가 조선일보의 편집 방침과 맞지 않을 순 있지만 조선일보는 이 기고를 1면에 배치했다.

사설은 어땠을까? 이날 조선일보는 사설 ‘북 실세들의 깜짝 방문, 차분하게 남북대화 이끌어야’에서 “남북대화가 시작되면 북은 우리의 대북 지원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며 “그러나 본격적인 남북 경협 논의에 앞서 북의 천안함 도발 사과와 재발 방지 방안 마련 등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현안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측이 남북대화에 소극적으로 임할 이유는 없다”며 “북의 도발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하면서 분단 상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이 나라의 안보·번영에 직결된 중대사”라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는 남북 관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 더 나아가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큰 구상과 원칙 속에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북이 오랜 대결구도를 깨고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같다. 북한의 갑작스런 대화 모드 전환, 그때는 북한이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고, 지금은 달라진게 없다는 조선일보의 기준은 무엇일까?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