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왜곡된 안보관이 국정원 정치관여 사건 공범으로 기소된 전 부하직원의 재판에서 여과없이 드러났다.

검찰은 22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김수정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신승균 전 국정원 국익전략실장의 국정원법 위반 혐의 등 사건 제1회 공판에서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원 전 원장이 전 부서장회의에서 한 발언을 일부 공개했다.

원 전 원장은 2010년 4월16일 열린 회의에서 야권 단일화 움직임에 대해 “그거는 김정일 지령”이라며 “‘희망과 대안’이다 뭐다 만들어지지만 어쨌든 선거에서는 단일화하라는게 북한 지령”이라고 발언했다. 그는 이어 “북한 지령대로 움직이는 건 결국 뭐 저거지, 종북단체 아니냐”고 말했다. 4월16일은 그해 6월2일 지방선거가 열리기 한 달하고 보름 전이다.

▲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국내 정치공작을 지휘한 의혹을 받고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6일 오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돼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민중의소리
▲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국내 정치공작을 지휘한 의혹을 받고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돼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민중의소리

'희망과 대안'은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와 종교계, 학계 주요 인사들이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세력화를 도모한 결사체다.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현 서울시장),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백승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함세웅 신부 등이 참여해 2009년 9월 결성을 알렸다.

원 전 원장은 2011년 10월 박원순 시장이 당선됐던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열리기 직전엔 “26일에 재보궐선거가 있는데 북한이 나서서 범야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며 “그런 부분에 대해 대책을 세워서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원순 시장이 당선된 후인 2011년 11월18일, 원 전 원장은 전 부서장 회의에서 “(박 시장 당선에 대해) 우리가 위기의식을 가져야 된다. 지금 보면 인터넷에서 트위터, SNS에서 별말을 다 지어내고 있어도 …(중략)… 나이가 들고 한 분들은 그런 쪽에 참여 안 하고 거기에 대응을 제대로 안한다”며 “일반 시민들이 보면 그 말을 믿는다”고 지적했다.

총선과 대선이 있던 2012년, 원 전 원장은 “금년 한해는 아주 중요한 총선과 대선이 있다”며 “종북세력들이 북한과 연계해 어떻게 해서든 정권을 잡으려 한다”고 말하며 대응 지시를 하달했다.

그는 ‘4·11 총선’이 끝난 2012년 4월20일, 같은 회의에서 “금년에 대선이 있는데, 이번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13명, 종북세력 40명이 여의도에 진출했다”며 통합진보당을 포함한 야당 의원들 40여 명을 ‘종북 세력’으로 규정했다. 원 전 원장은 이어 “전직원이 혼연일체가 돼서 거기에 대처할 준비도 같이 해주길 바란다”고 지시했다.

원 전 원장은 2009년 11월20일 전 부서장 회의에서는 “우리가 없는 일을 만들어서 야당을 공격하면 안되지만, 국민이 여야를 만드는 이유가 뭐예요”라면서 “여당은 국민의 의사가 많이 반영된 것이고 국민이 지지하는 것이 적은 게 야당 아니예요. 그러면 많은 국민이 원하는 쪽으로 우리가 일 하는 게 맞는 거야”라고 말했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이 이 말을 한 배경으로 “그 당시 원내에 ‘여야에 근거리를 취해야 한다’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국정원 역할에 대한 원 전 원장의 인식은 2009년 5월15일 회의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당시 전 지부장회의에서 “이전 중앙정보부나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서 정권 안보적 차원의 일을 많이 해서 문제가 됐는데 지금은 모든 정권이 5년 동안 선거로 선출되는 정부이기에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이 이어 ‘국정원에서 국가 안보 차원 말고 정부 안보 차원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며 “국정원이 이를 위해 노력해달라는 취지로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10년 7월19일 회의 원장 모두말씀에서는 “우리(국정원)는 뭐냐하면, 대통령이 이렇게 국책사업을 정해서 밀고 가는 일 돕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정상외교 성과, 경제위기 극복 등 국내정세가 야당의 무조건 반대 등으로 힘든 상황이니 대통령 외교가 국내정세와 연결될 수 있도록 국정원이 더욱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심리전단 등에게 온·오프라인 여론형성 활동을 지시한 대목이다.

검찰은 해당 말씀자료를 증거로 제출하며 “원 전 원장이 말하는 종북좌파, 국가정체성 확립 등은 통상적으로 말하는 개념을 훨씬 벗어나는 내용들”이라며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야당, 시민, 사회단체 모두 종북좌파에 해당돼 제압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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