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젠더 토크쇼’를 표방한 EBS ‘까칠남녀’ 측이 성소수자 출연자인 작가 은하선씨에게 하차를 통보했다.

반(反)성소수자 시위에 굴복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가운데 EBS 측은 ‘공영방송 출연자’로서 은씨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 해명 자체가 EBS 존재 가치를 부정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3월 첫방송부터 ‘까칠남녀’ 고정 패널로 출연해 온 은씨는 지난 13일 제작진으로부터 “위에서 워낙 의지가 강하다”는 말로 하차를 통보 받았다. 내달 19일 종영을 앞두고 마지막 2회분 녹화를 앞둔 시점이었다. EBS는 17일 “담당CP(류재호 CP)는 (은씨 관련) 제보 민원 2건이 확인돼 불가피하게 하차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 EBS '까칠남녀' 측은 최근 은하선 작가에게 방송 하차를 통보했다. 사진=까칠남녀 갈무리
▲ EBS '까칠남녀' 측은 최근 은하선 작가에게 방송 하차를 통보했다. 사진=까칠남녀 갈무리
우선 EBS가 밝힌 하차 사유로는 은씨가 자신의 SNS에 ‘담당 PD 번호가 바뀌었다’며 퀴어문화축제 자동 후원 문자 번호를 게재해 사기 행위를 벌였다는 점이 있다. 이 시기는 성소수자 특집 방송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제작진 개인 휴대전화로 항의 문자를 보내던 때였다. 류재호 CP는 종영이 얼마 남지 않아 은씨 하차를 보류해왔지만 두 번째 민원이 확인된 뒤 하차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 민원’은 2년 전 은씨가 SNS에 ‘사랑의 주님’이라며 공유한 십자가 모양의 딜도(자위도구) 사진이 문제라는 것이다.

‘까칠남녀’ 출연진은 이런 하차 사유가 “성소수자 입을 막아 존재를 지우겠다는 반동성애 집단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손아람 작가·손희정 문화평론가·이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의 ‘녹화 보이콧’으로 17일 예정됐던 마지막 녹화는 취소된 상태다.

여성·성소수자·언론단체 등도 EBS를 비판하고 있다. 지난달 25일과 지난 1일 방영된 성소수자 특집 이후 EBS 앞에서 벌어진 반 성소수자 단체 시위 등이 하차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해석이다.

보수 성향 학부모·기독교 단체들은 ‘까칠남녀’가 동성애를 조장하고 옹호하는 음란한 방송이라고 주장해왔다.

최근에는 섹스칼럼니스트이자 성인용품 매장을 운영하는 양성애자, 은씨에게 비판이 집중되고 있다.

▲ EBS '까칠남녀'는 지난달 25일과 지난 1일 성소수자특집 '모르는 형님'편을 방영했다. 사진=까칠남녀 갈무리
▲ EBS '까칠남녀'는 지난달 25일과 지난 1일 성소수자특집 '모르는 형님'편을 방영했다. 사진=까칠남녀 갈무리

류재호 CP는 외부 시위와 은씨 하차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EBS가 공영방송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이와 같은 결정을 했다는 입장이다.

류 CP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성소수자 특집 기획 의도에 대해 “서로 다르다고 해도 존중하고 인정하자는 차원”이었으며 “이는 다른 종교나 문화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류 CP는 “과연 이 상황에서 (은씨가 출연을) 계속해야 하느냐, 그 부분에는 동의하기 힘들다”며 “성소수자라는 것이 면죄부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공영방송 출연자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은씨를 안고 갈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EBS가 사태를 한참 잘못 짚었다”고 지적했다. 언론연대는 “결국 ‘제보’를 통해 (문제를) 인지하게 됐고 하차 통보를 하게 됐다는 얘기”라며 “그 제보는 누가 한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은 일상적으로 항의를 받곤 한다. 까칠남녀 역시 지난해 첫 방송 이후 반 성소수자 세력의 비난을 받아 왔다.

김성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공영방송 CP로서의 고민을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이번 하차 결정으로 그의 성 정체성, 과거 글 등 (일부 세력이) 쟁점화한 것만 남았다”고 우려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도 “(은씨 하차는) 공영방송 처사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홍 교수는 “까칠남녀는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던 소수자들을 출연시켰고, 방송이 소수자 대표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에 부합하는 방송이었다”며 “이번 하차는 방송의 의의를 무너뜨리는 일”이 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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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방송법 6조 5항은 ‘방송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 실현에 불리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공영방송은 한 사회의 인권, 민주주의 지향을 넓게 생각해야 하는데 형식 논리에 갇혀 출연자 자질 등으로 사안을 축소해버렸다”며 “이런 경우 소수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히게 된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아닌 담당CP 주도로 출연자 하차가 결정됐다는 점에서 제작 자율성 침해 논란도 제기됐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16일 성명을 내고 “은씨 하차는 일선 제작진들이 아닌 ‘윗선’의 결정으로 보인다”며 “EBS 방송편성규약은 제작 책임자로 하여금 제작 실무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제작 과정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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