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인권단체들이 “담을 허물자”며 7편의 글을 썼다. 이웃에 살고 있는 이주민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담”을 허물자는 게 집필 의도다. ‘담’ 기획단은 한국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이주민 7명을 만나 그들의 굴곡진 삶을 생애사로 기록했다.

한국사회는 2016년 촛불로 사회 전반에서 개혁 국면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주민 인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미디어오늘은 ‘세계 이주민의 날’(매년 12월18일)이 있는 12월을 맞아 담 기획단이 발간한 이주민 구술 생애사 책 ‘담을 허물다’에 실린 글 전편(서문 포함)을 기획연재한다. <편집자주>

[싣는 순서]
①서문 :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②여성 이주노동자 스레이나 이야기 : “쑤쑤!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요!”
③북한이탈주민 김복주 이야기 : “난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④이주노동자 오쟈 이야기 : “그건 선택이 아니었다.”
⑤이주청소년 황윤호 이야기 : “혼자, 당연한 것 별거 아닌 것 낯선 것”
⑥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아웅틴툰 이야기 :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⑦종교적 난민신청자 ‘A’ 이야기 : “그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⑧귀국 이주노동자 날라끄 이야기 : “그냥 내 나라예요, 거기도!”

아웅틴툰,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산업연수생제도로 한국에 왔다. 2003년 이주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을 시작으로, 지금껏 이주노동자의 문제에 꾸준히 함께 해왔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 보는 것이 좋았던 그는 지금 이주노동자에게 영상미디어 제작기술교육을 하며 이주민영화제를 기획하는 일도 하고 있다.

늘 열의에 차 있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의욕적인 아웅틴툰.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그로 인해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태어나 자란 곳. 아웅틴툰의 고향, 미얀마

“어렸을 때 마땅히 놀 게 없어서 강에서 수영하고, 친구들과 숲에 다니고, 새총으로 사냥도 하고 그랬어요. TV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을 보면 가끔 김병만보다 제가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영화를 좋아해서 학교 다닐 때 영화를 정말 많이 봤어요. 공부도 곧잘 했고요.

그런데 제가 졸업할 때 전국적인 반정부 데모가 벌어져서 정부가 모든 대학을 폐쇄하는 바람에 대학에 못 갔어요. 무언가 배우고 공부하는 데 흥미가 있는 편인데, 진학하지 못 한게 못내 아쉬움이 남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오게 돼서 미얀마에서는 학교 다니면서 공부한 기억밖에 없어요.”

▲ 카메라를 든 아웅틴툰.
▲ 카메라를 든 아웅틴툰.

폐쇄된 대학 대신 선택한 한국

“사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몰랐죠. 그저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외국은 어떤 곳일까 호기심도 많았고. 그래서 부모님과 이야기하고 산업연수생을 신청했죠.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하셨는데 어머니는 많이 반대했어요. 아직도 어머니가 마음에 많이 남네요.

제가 산업연수생제도를 신청할 때는 지금처럼 브로커가 많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서류처리와 작성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런 걸 대신하고 돈 몇 푼 받는 정도였죠. 저는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 남들 하는 것을 보니 제가 해도 되겠다 싶어 혼자 신청을 했고요. 그렇게 하고나니 어렵지 않아서, 신청하려는 주변사람들을 도와줬어요. 덕분에 그때 밥도 꽤나 얻어먹었어요.

서류 절차가 다 끝나고 한국에 오기 직전이 기억에 남네요. 다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양복을 한 벌씩 빼 맞춰 입었어요. 그것도 더운 여름날에. 그리고 버스 비슷한 트럭을 타고 다같이 양곤에 있는 큰 불교사원에 갔어요. 불교사원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한국에서 무사히 즐겁게 지내길 기원했어요.“

뭔가 배울 게 많은 줄 알았어요

“한국에 들어온 건 94년이었어요. ‘산업연수생’, 이름만 듣곤 막 이것저것 대접 받으며 공부하고 일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기대는 금방 깨졌어요. 이렇다 할 한국어 교육도 없이 3일 정도 딱 교육 하고 나서, 바로 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게 됐거든요.

뭔가 배우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데, 바로 들어가자마자 열 몇 시간씩 일했어요. 아침 6시에 눈뜨면 일을 시작해서 저녁 12시, 때론 새벽 1시까지 매일 같이요. 주말도 마땅히 없이 일했고 잔업이 너무 많았어요. 한달에 잔업시간이 한 180시간 정도는 됐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당시 어떻게 일을 했을까 싶어요.“

잘 수 없는 잠자리, 낮은 임금과 부당한 대우

“처음 일한 곳은 선박 펌프 만드는 공장, ‘OO기계’라고 인천에 있는 회사예요. 인천대학교 근처 구하 2동. 거기는 까먹지도 않아요. 삼거리가 있고, 주유소가 있고, 경찰서가 있었죠. 숙소도 인천의 구석, 어떤 할아버지가 살던 방의 샤워실을 개조해 방으로 만든 곳이었어요. 7평 남짓한 공간에서 4명이 지냈어요. 제대로 눕지 못해 칼잠을 잤죠. 장마철엔 비도 샜고요. 열악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면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키는 게 늘 불만이었어요.

별다른 이유 없이 회사에선 이런 저런 핑계로 월급을 깎았어요. 어쩌다 아파서 늦게 나오면, 게으르고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깎았어요. 온갖 꼬투리를 잡아가며 월급을 깎으면서 돈 주니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했어요. 우리는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건데 말이에요. 참 답답했어요.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법 조항 따져가며 받아내고 싶은 마음에 화가 나요“

일 중독자들이 사는 나라, 한국

“산업연수생으로 온 사람들 중에 우리가 제일 월급이 적었던 것 같아요. 그때 230달러 정도, 18만 원 정도 받았어요. 당시 한국 사람들 최저임금도 35만 원 정도였어요. 그래도 그때 우리는 잔업수당이 많아서 월급은 적지 않았어요. 일이 많으면 60만 원, 70~80만 원 수준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게, 정말 너무 많이 일하니까. 잠자기도 정말 빠듯할 정도니까요. 토요일도 특근, 일요일도 특근. 그때는 주5일제 정착 전이니까, 토요일도 근무일이었는데 토요일이라고 일찍 끝나도 12시까지 일하고 말이죠. 365일 중에 쉬는 날이 없었어요. 이렇게 일하면 힘들텐데, 한국인 직원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서 일을 했어요.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해요.“

짬짬이 공부한 한국어

“한국어는 산업연수생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줄 것 같았는데 막상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요. 한국에 오기 전, 한국어를 3일 정도 배웠어요. 그 때 한국어 강사분이 단어를 많이 외워라,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단어 뒤에 “~입니다”라고 하면 대화가 얼추 된다 그러니까 단어를 많이 외우라고 하더군요. 덕분에 혼자 한국어 공부할 때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래도 한국어 공부가 처음에는 힘이 많이 들었죠. 일이 끝나면 새벽 한 시 두 시니까, 얼마 공부를 못했죠. 정말 쉬는 날 짬짬이 한국어 교실 다니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새 뜻은 잘 몰라도 그냥 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일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한국어 간판을 읽는 연습을 했거든요. 이렇다 할 공부시간이 없으니 그 시간이라도 짬을 내서 연습한 거죠. 노래방, OO자동차, 이런저런 한국어 간판을 열심히 읽고 또 읽고. 어느새 실력이 쌓이니 좀 재미가 붙더라고요.“

한국말이 서투니 한국인 직원들이 기분 나쁜 장난을 많이 쳤어요.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한국인 직원들이 한국어를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나쁜 말(상대방을 비하하는 말이나, 욕설 등)을 해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한국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니니까, 이게 해야 할 말인지 아닌지 구분을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나 어투를 보며 분간을 해야 하니까 이래저래 눈치 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어요.

언젠가 한국인 직원이 한국어를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제가 느끼기에 이상한 말을 알려줬어요. 그러고 나서 “사무실 경리 아가씨들 오면 이 말을 해” 이렇게 시키더라고요. 눈치를 좀 살펴보니 해서는 안 될 말 같았어요. 그래서 사장에게 가서 먼저 말해보겠다고 하니 그제야 직원들이 말리더군요. 우리는 뭔지 몰라서 당황스러운 데 본인들은 그걸 굉장히 재밌게 느끼는 것 같았어요.“

▲ 이주민방송국에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아웅틴툰.
▲ 이주민방송국에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아웅틴툰.

산재 신청에서 이주민인권 활동까지

“일을 하다가 다리를 심하게 다쳤어요. 1년 2개월째 일하던 공장에서요. 이것저것 알아보니 산업재해 신청이 가능하더라고요. 산업재해로 인정받으려고 꽤나 오랜 싸움을 했어요. 미얀마에서 받기 어려운 수술이어서 어떻게든 한국에서 수술을 하려고 했고요. 그러다 보니 산업연수생으로 합법적인 기간(4년)이 다 지나게 됐어요. 자연스레 미등록 체류자가 되었죠. 산업재해 인정을 받으려고 병원에 다니면서 미얀마공동체를 만나고 이곳저곳에서 이주민인권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레 비슷한 처지의 이주노동자 상담도 하고 미얀마의 정치상황을 알리는 활동도 시작하게 됐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활동하게 된 것 같아요. 공동체에서 활동했던 기억이 참 좋았어요. 당시는 한국어 배우기도 많이 어려웠고 일터에서 겪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도 별로 없었어요. 저도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공간이 생기니 참 즐거웠어요. 지금도 그 때의 기억으로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2003년 명동성당 농성

“한국에서 최초로 고용허가제 시행을 정부가 발표하면서 3년 된 사람은 1년 연장할 수 있고, 4년 된 사람들도 한 번 갔다가 다시 올 수도 있다고 했지만, 4년 이상 된 사람들은 무조건 보내겠다고 했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 이제 다 나가라는 이야기죠.

97년에 한국에 경제위기가 발생했어요.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를 8만 명 정도 내보낸다는 발표가 있었어요. 그만큼 강제출국을 시킨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 때 정부 발표보다 많은 12만 명이 자진출국을 했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한국정부가 겁이 났나 봐요.

그래서 그 때 출국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말리는 일들이 많았어요. 저도 인천출입국관리소에서 나가려고 출국수속을 밟는 중에 출입국관리소에서 한국에 남아서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월급은 적어도 남아서 일을 했어요.

그런데 경기가 회복이 되니 정부에서 강제추방 한다고 발표를 하더군요. 우리 입장에선 한국 경제회복에 함께 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좋은 정책을 만들어야하는 거 아닌가요? 더 내보내겠다는 정책을 쓰는 게 말이 되나요? 그래서 당시 분노했던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함께 시작했어요.

농성을 직접 해보니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농성에 참가한 모두가 정말 열심히 참여했어요. 하루 종일 일하고, 밤늦게 회의를 했어요. 게다가 바쁜 시간 쪼개서 한국어 공부도 하고 노동법 공부도 해 나갔어요.

3개월 동안 그렇게 살았는데 다들 힘든 기색 없었어요. 지하철에서 캠페인도 했어요. 홍보물 나눠주고 발언도 하고요. 우리가 언제 한국에 왔고, 어떻게 일하고, 왜 이런 싸움을 하는 지에 대해 지하철마다 돌아다니며 이야기했어요. 당시 다들 비자가 없었어요. 잘못하면 잡혀서 강제추방 당할 수도 있는데, 무슨 용기가 나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신기해요. 지금 해보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난민신청 그리고 그 이후

“명동성당 농성 후 미얀마의 정치상황 문제가 불거졌어요. 한국으로 온 이주노동자에 대한 비리나 부패도 심했어요. 미얀마의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했어요. 여권을 재발급 받는 비용이 굉장히 비쌌어요. 잃어버렸다가 재발급하면 150만 원, 세금이 한 달에 꼬박 5만 원 뭐 이런 식이에요. 한 번 세금 내면 300-400만 원씩 내야해요. 그것때문에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미얀마 정부의 규정을 제대로 지키고 싶어도 비용이 너무 비싸서 지킬 수 없었죠. 다들 그에 대한 불만이 많았어요.

그래서 미얀마 사람들과 함께 공동행동을 만들고 미얀마의 정치상황과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활동들을 많이 벌였어요. 산업안전보건법도 미얀마어로 번역해보고 미얀마 사람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도 만들어 보고 이주민방송도 시작했어요.“

‘2004년에 난민신청을 했어요. 정부에 비판적인 활동을 많이 해서 미얀마 대사관에서 경고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저는 신경 쓰지 않고 활동을 계속 했어요.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이대로 미얀마에 돌아가면 큰일이 날 상황이었어요.

많은 분의 도움으로 난민인정을 받게 되었어요. 난민신청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7년이 걸렸어요. 2011년에 난민인정을 받았어요.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즐겁게 하고 있어요. 이주노동자 상담을 하면서, 한국 청소년들과 함께 국제워크캠프를 하면서, 이주민방송과 이주민영화제를 기획하고 영화를 제작하면서 정말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이주노동자를 상담하면서 출입국사무소, 노동부, 미얀마 대사관이 나 몰라라 하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스스로 자신감이 생겼어요.

지금도 하고 있는 워크캠프는 한국청소년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늘 새롭고 신기한 기분이 들어요. 지금도 꾸준히 이주민영화제를 기획하며 직접 영화제작도 하고 있어요. 저와 다른 이주민들이 만든 작품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비춰질까 늘 궁금해요. 영상매체를 통해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제게는 늘 가슴이 뛰는 일이에요.“

▲ 아웅틴툰씨가 한국청소년이 참가한 국제워크캠프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아웅틴툰씨가 한국청소년이 참가한 국제워크캠프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그가 바라본 한국의 풍경

“무시하고 비하하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예를 들면 “너희 나라에 이런 것 없지?” 이런 무시하는 듯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정말 궁금하다면 상대방을 배려해서 말해야 하는데 말이죠. 한 번은 이런 장난도 받았어요. “너희 나라는 해가 한 개 뜨지? 한국은 해가 두개 뜬다”고.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모든 것이 어수룩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돼요.

제가 일하는 공장 근처에 미군기지가 있어서 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어요. 저는 영어만 쓰는 고등학교에 다녀서 영어는 한국어보다 자연스럽게 했거든요. 하루는 미국인 친구들이 제가 일하는 공장을 지나갔어요. 그래서 몇 마디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제가 영어를 잘한다는 걸 한국인 직원들이 알고 나서는 갑자기 굉장히 잘해 주었어요. 영어 쓰는 사람만 외국인인가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섭섭했어요.

직장에서 무시당하는 경험이 참 많았어요. 월급은 우리가 일한 만큼 주어지는 정당한 대가예요. 그래서 일을 하면서 무시당할 이유는 없어요. 하지만 아랫사람 대하듯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주노동자만 무시하는 건 아니었어요. 연대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노동자도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한창 이주노조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을 모아 ‘스탑 크랙다운’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어요. 우리가 일터에서 무시당할 때 들었던 말을 모아 노래로 만들었어요. ‘스탑 크랙다운 밴드’를 인터넷에 검색해서 꼭 들어보세요.“

그가 꾸는 꿈

“지금은 이주노동자들의 소통을 위해서 이주민 방송(MWTV)을 하고 있어요. 미얀마는 민족이 참 많은데 정보를 잘 몰라요. 135개 민족이 있는데 서로 잘 몰라요. 이것을 알리고 서로 교류하도록 돕고 싶어요.

저는 고향에 기숙학교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공부하고 싶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해요. 직업기술 뿐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인문학·철학 등 우리 삶에 필요한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요즘 인터넷을 찾아보니 핀란드의 교육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핀란드식 교육을 할 수 있는 대안학교를 미얀마에 세우는 게 제 꿈이 되었어요.

이주민 방송 8년, 다른 데에서도 방송 일을 3년 정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미얀마에서 한국의 EBS같은 교육방송사를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해요. 성인 청소년 아이들 모두를 위한 교육방송을 만들고 싶어요. 제 고향에 조금씩 건물이 생기고 있어요. 저는 학교를 짓는 데에 조금씩 돈을 보태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것

“요즘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어요. 다큐멘터리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면 좋겠고요. 지금 한국에 200만 명이 넘는 이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제는 서로 교류하면 좋겠어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편견도 그만 가졌으면 해요. 시대가 많이 변했어요. 더 이상 이주민의 문제를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면 안 돼요. 일자리를 이주노동자가 빼앗고 있다는 생각을 해선 안 돼요.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에요. 사람 사는 것은 다 비슷해요.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많이 생겼으면 해요.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람들 너무 여유롭지 못하게 사는 것 같아요. 너무 잘사는 미국이나 유럽만 쳐다보고 사는데 부족하지만 여유롭게 살아가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삶도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좀 더 한국 사람들도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끝내며

아웅틴툰은 이야기 내내 열정에 차 있었다. 특히 미얀마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 할 때는 눈이 반짝였다. 한국에서 많은 것을 겪어낸 그는 고비마다 특유의 여유로움과 밝음으로 매순간을 맞이해 왔던 게 아닐까. 아웅틴툰의 꿈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 담 기획단이 발간한 서적 ‘담을 허물다’를 구매하실 분은 기획단 이메일 rotefarhe@hanmaila.net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산업연수생제도와 명동성당농성

산업연수생제도는 저개발국 외국인에게 기업연수를 통하여 선진기술을 이전하기 위한 제도로서 1993년 11월에 도입되었으나 실제 입국하는 외국인에게 알려주는 기술은 없었다. 국내에서 한국인이 기피하는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자리에 외국인을 채우는 역할을 했다.

입국을 하기 전부터 이주노동자들의 욕구를 이용해 브로커들은 웃돈을 받아 챙기는 등의 송출비리가 난무했고, 입국 후에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서 최저임금과 퇴직금 등을 보장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임금체불과 욕설과 폭력, 더러운 기숙사 등 너무 열악한 사업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런 환경을 버텨 낼 수 없는 이주민들은 비자를 포기하고 미등록으로 남기도 했다. 제도의 문제로 인해 미등록이 늘어만 갔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자 2004년부터 외국인고용허가제가 실시되었고 2007년에 산업연수생제도가 전면 폐지되었다.

정부는 2004년 고용허가제 실시를 앞두고 2003년부터 12만 명에 달하는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해 경찰,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등 관련 부처 합동으로 '대대적인 단속'을 실시하였다. 정부는 제도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미등록이 된 이주노동자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모두 추방하려고 했다.

이에 2003년 11월 16일 이주노동자의 ‘반발’이 명동성당에서 시작되었다. 명동성당에 전국의 이주노동자들과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378일 동안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며 거리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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