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인권단체들이 “담을 허물자”며 7편의 글을 썼다. 이웃에 살고 있는 이주민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담”을 허물자는 게 집필 의도다. ‘담’ 기획단은 한국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이주민 7명을 만나 그들의 굴곡진 삶을 생애사로 기록했다.

한국사회는 2016년 촛불로 사회 전반에서 개혁 국면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주민 인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미디어오늘은 ‘세계 이주민의 날’(매년 12월18일)이 있는 12월을 맞아 담 기획단이 발간한 이주민 구술 생애사 책 ‘담을 허물다’에 실린 글 전편(서문 포함)을 기획연재한다. <편집자주>

[싣는 순서]

④이주노동자 오쟈 이야기 : “그건 선택이 아니었다.”
⑤이주청소년 황윤호 이야기 : “혼자, 당연한 것 별거 아닌 것 낯선 것”
⑥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아웅틴툰 이야기 :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⑦종교적 난민신청자 ‘A’ 이야기 : “그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⑧귀국 이주노동자 날라끄 이야기 : “그냥 내 나라예요, 거기도!”

이주민구술생애사 프로젝트 <담>을 시작하면서 이주청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이주민센터 활동가들은 7년간 한국에 머물며 인연을 맺어온 이주청소년이자 성소수자인 황윤호씨를 소개해주었다. 윤호씨는 청소년시절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했고, 이주민센터 청소년팀 초창기부터 함께 활동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윤호씨와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에게 윤호씨를 소개해준 최수정 활동가와 함께 수원역 뒤편 훠궈(중국식 샤브샤브)를 파는 식당으로 향했다. 윤호씨는 혀가 얼얼해지는 매운 소스에 옥수수를 푹 찍어먹으며 몇 차례 인터뷰에 응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평소에도 걱정을 몰고 다니는 나는 이후 인터뷰 진행에 대한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준비한 질문을 놓고 ‘이전에도 너무 많이 받았던 질문은 아닐까?’생각하며 질문지를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이런 걱정은 인터뷰를 응하는 윤호씨의 거리낌 없는 모습 때문에 차곡차곡 정리가 됐다.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에 본인의 경험과 생각을 고르지 않고 진솔하고 소탈하게 답변했다.

▲ 이주청소년 황윤호씨.
▲ 이주청소년 황윤호씨.

익숙해진 걸까요?

“그날이 기억에 남아요. 엄마가 학교 끝나고 데리러 왔거든요.”

그 날 윤호씨의 어머니는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윤호씨는 애꿎은 가방 끈을 만지작거렸다. 윤호씨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가 폈다. 서있을 때 손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흔들던 손을 가슴께로 내리고 손짓을 했다. 어머니는 어색해하는 윤호씨를 보며 눈썹을 높게 올리더니 두꺼운 손을 어깨에 얹었다. 그렇게 집으로 갔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제가 다니는 중학교는 초등학교 성적이 뛰어나야 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학교가 끝나고 집을 갈 때면 교문 앞에 엄마, 아빠들이 많았어요. 근데 우리 엄마는 바빴어요.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길림성에서 장사를 했어요. 그러다가 상해, 신명, 청도를 옮겨 다니면서 한국비자 만드는 일을 했어요.

한국비자를 만들던 엄마는 어느 날 진짜 한국에 간다고 했어요. 엄마는 수원에서 살고, 서울에서 일했어요. 엄마는 한국이 깨끗하다고 했어요. 저는 송혜교가 나온 드라마로 한국을 알았어요. 그 드라마를 생각하며 엄마가 거기에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떨어져 지내다가 어느 날 엄마가 중국에 온다고 말했어요. 그때 엄마랑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날 데리러 온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고…. 그날은 오랜만에 엄마랑 함께 지냈어요. 딱히 뭘 한건 없는데요. 그냥 같이 밥 먹고 차타고 이동하고 그랬죠. 그 날은 혼자가 낯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홀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던 윤호씨는 흔히 ‘조선족’이라고 알려진 재중동포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가장 먼저 대학을 세웠고, 70%가 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재중동포들은 1980년대 중국의 시장개방경제 이후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로인해 공동체는 무너졌고, 부모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떠났으며 자녀들만 오롯이 남아 기숙사나 친척들의 집에 산다. 자녀들은 기본 3, 4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부모와 떨어져 홀로 지낸다.

재중동포 220만 명 중에 47만 명이 한국에 일하기 위해 이주했다. 윤호씨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윤호씨를 비롯하여 자녀 3명을 부양해야 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윤호씨의 어머니는 중국의 도시를 옮겨 다니며 일하다가 한국으로 이주했다. 

윤호씨는 가족들과 지내는 것보다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지내거나, 돌봐주는 선생님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홀로 지낸 시간이 길어지고 어머니의 빈자리가 익숙해질 무렵, 불현듯 윤호씨는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있는 이 상태가 익숙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홀로 지내던 시절을 생각하며 윤호씨는 말을 아꼈다.

마음 둘 곳이 없어요

“학교는 재미없었어요. 엄마는 제가 중국에서 혼자 지낼 게 걱정돼서 학교 선생님한테 돈을 줬어요. 그렇게 선생님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죠. 남의 집에서 사는 건 진짜 불편하잖아요.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고요. 선생님은 한족이었어요. 저는 조선족이고요. 선생님은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 수가 없죠. 저는 혀가 얼얼하게 매운 음식을 좋아하거든요. 엄마가 해줬던 매운 음식들이 생각났어요.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도 없었어요.

선생님은 매일매일 숙제를 봐주고 다른 공부도 많이 시켰어요. 싫었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기숙사로 옮겼어요. 선생님이랑 지내는 것보다 기숙사가 더 자유로울 것 같아서요. 근데 기숙사 생활이 더 힘들었어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교실에만 있었어요. 수업이 6시에 끝나면 저녁 먹고 다시 교실로 가요. 하루 온종일 교실에만 있으니까 답답하고 짜증났어요. 이제 학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성적도 점점 내려갔죠.

엄마는 옆에서 절 챙겨줄 수 없어서 돈을 자주 줬어요.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 선배들이 돈을 탐내더라고요. 처음 몇 번은 그냥 가져가고 저도 그냥 줬어요. 그러다 언젠가부터 일주일에 얼마씩 달라고 하더라고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화가 나니까요. 그래서 제 돈을 뺏은 선배들보다 더 무섭고 힘이 센 사람들을 만났어요. 친해지려고 노력했죠. 아마 그때부터 공부를 아예 안 했던 거 같아요.”

윤호씨는 점차 학교에 관심을 잃기 시작했고 학교 밖 생활에 궁금증이 생겼다. 하루 온종일 학교 건물에서 건물로 이동을 하며 느꼈던 답답함이 시선을 바깥으로 이동시켰다. 친구들과 윤호씨는 학교를 나가기로 했다. 자습시간이 끝난 9시쯤 3학년의 하교를 위해 교문이 열렸다. 그 때 윤호씨와 친구들은 학교를 나갔다.

“그렇게 2년을 학교 밖에서 지냈어요. 호텔에서 지내기도 하고, PC방에서도 있었죠. 호텔은 학교보다 편했고 자유로웠죠. 근데 문제가 생겼어요. 엄마가 돈을 주기는 하지만 밖에서 지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이모한테, 친구들한테 돈을 빌렸어요. 그렇게 돈을 빌려도 모자라긴 했죠. 친구들이랑 게임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여자들 만나서 술 같이 먹으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엄마가 중학교를 다시 다니라고 했어요. 알겠다고 했어요. 저는 16살에 다시 중학교 1학년이 됐어요.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니까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2년 동안 놀았잖아요. 의자에 앉아서 집중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혼자 지내는 것도 너무 힘들고… 제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엄마가 한국으로 오라고 했어요.”

윤호씨는 한국으로 오면 어떻냐는 엄마의 제안에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윤호씨는 그 당시 한국으로 가서 엄마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급히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된 윤호씨는 친구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

▲ 황윤호씨
▲ 황윤호씨

왜 중국 사람한테 그러죠?

“처음 가본 한국은 너무 더웠어요. 인천공항에서 차를 타고 수원으로 갔어요. 빵빵하는 거 있잖아요. 클락션이요. 도로에서 안 들리더라고요. 신기했어요. 중국은 별다른 일 아니어도 클락션 자주 누르고 시끄러워요. 근데 한국은 조용하더라고요. 엄마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나니까 엄마랑 같이 한국에 있는 게 실감이 나더라고요.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엄마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하러 갔어요. 엄마가 출근하고 나면 집에서 혼자 컴퓨터를 했어요. 엄마는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왔어요. 그때도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돈을 줬어요. 엄마가 준 돈으로 핸드폰 사고, 서울 가서 쇼핑하고 놀았어요. 그렇게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이모부가 수원이주민센터 소개해줬어요.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니까 배워보려고 갔어요. 중국에서도 공부를 안했는데 한국에서 공부하려니까 짜증이 나긴했어요. 그래도 한국에 있으려고 했죠. 엄마도 여기 있고, 돈도 자유롭게 쓸 수 있잖아요.

이주민센터에서 한국을 배웠어요. 놀이공원도 가고, 남이섬도 가고, 갯벌 있는 바다도 갔어요. 근데 갑자기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에서 학교를 계속 다녔으면 친구는 많았을 거 같아요. 근데 한국에는 없잖아요. 한국에서는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이주민센터에서 1년을 지내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식당에서 서빙을 제일 많이 했어요. 근데 제가 성격이 급해요. 그래서 2개월 정도 지나면 그만두고 싶더라고요. 일했다가 그만두고 일했다가 그만두고 계속 그랬어요.”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았던 윤호씨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점차 외로워졌다. 드라마에서 봤던 한국의 모습과는 달랐고, 홀로 지내는 시간은 중국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에 있었더라면 친구들이라도 만났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속이 상했다. 이주민센터의 한국어 수업이 마무리 될 무렵 일자리를 구했다. 일을 시작한 이후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어리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어요. 제가 일했던 가게가 배달도 했거든요. 매장이 너무 바빠서 나중에 전화 달라고 했는데 소리를 지르면서 욕했어요. 속이 끓었어요. 같이 욕하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그 손님은 다시 전화해서 너는 이야기도 못 알아들으면서 왜 서빙하고 있냐고, 중국이나 가라고 하더라고요. 절 무시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손님이잖아요. 화가 났지만 참았어요.

그리고 또 제가 중국대사관에 갈 일이 있었거든요. 서울역에서 택시를 탔어요. 중국대사관이 남산에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정확히 위치는 모르니까요. 택시기사가 엉뚱한 곳을 빙빙 돌아갔어요. 딱 봐도 남산이 아닌 곳에서 내리라고 했어요. 화가 났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는 중국대사관 아니다, 다시 남산에 있는 중국대사관 가달라고 했죠. 중국대사관에 도착했는데 택시 요금이 5만 원인 거예요. 기사님이 실수한 건데 내가 왜 돈을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다시는 중국 사람을 태우지 않겠다면서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이게 중국 사람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아서 요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어요.

허탈했어요. 내가 한 일, 그게 잘못한 일이든 잘못하지 않은 일이든 그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죠. 왜 중국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그 다음부터 중국 사람이 아닌 척을 해요. 별로 티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외모만 보면 중국 사람 같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말을 거의 안 해요. 혹시 외국인이냐고 물어보면 일본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한테는 싸가지도 없고 시끄럽다고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윤호씨는 중국인을 향한 차별의 시선들에 지쳐갔다. 윤호씨가 실수를 해도 “중국 사람은 안 돼!”라고 이야기가 돌아오고, 윤호씨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이래서 중국 사람은…….” 하며 모욕감을 줬다. 한 개인으로 오롯이 바라봐주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의 정체성을 마음대로 택해서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내뱉는 사회로 인해 점점 지쳐갔다. 윤호씨는 점점 중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이게 나니까요

“가족이랑 지내면서 친구가 없는 것과 친구랑 놀면서 가족이 곁에 없는 것 중 뭐가 더 외롭고 힘든 일일까요? 저는 중국에 친구가 있잖아요. 엄마는 없었지만요. 같이 술도 먹고 힘든 이야기는 할 수 있었어요. 한국에는 엄마가 있어요. 근데 엄마한테 힘든 이야기 할 수는 없잖아요. 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건 외로운 일이에요. 중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었어요.

그 때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 남자를 만났어요. 1년 넘게 함께 지냈어요. 서로 힘이 되어주는 사이였어요. 그사람을 만나면서는 일을 안 했어요. 남자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중에 뭘 할까 이야기했어요. 함께 미래를 꿈 꿨어요. 제가 예전에는 빨리 결혼하고 엄마한테 손주를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살아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랑 가족들한테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사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게이를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들이 있잖아요. 밖에서도 눈치보고 신경 쓰는데 집에서도 눈치봐야 하나 싶어서요. 편하게 말하고 만나고 싶었어요. 나의 존재와 사랑을 인정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윤호씨는 중학교 1학년 때 본인이 남성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같은 학교의 멋진 친구가 있었고 친해지고 싶어서 선물과 편지를 전했다. 학교에 소문이 났다. 윤호씨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고백했다는 이야기였다. 윤호씨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소문을 즐겼기에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소문 때문인지 그 둘은 결국 사귀게 되었다.

그 사람과의 연애가 정리된 이후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만나고 헤어지며 지냈다. 아무리 당당한 윤호씨라도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의 시선을 모른 척 넘기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집에서까지 눈치를 보며 지내야할까라는 고민이 들었고 그 고민을 계기로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엄마한테 카톡을 보냈어요. ‘나 게이야’ 이렇게요. 그랬더니 엄마는 가지가지 한다고, 별 거 다하더니 이제는 남자 좋아하냐고 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른 말은 안했어요. 걱정하지도 않았고, 이후에 다시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메시지를 보낸 다음 날 엄마가 집에 와서 음식을 잔뜩 해줬어요.

엄마한테 이야기한 다음부터는 토요일마다 남자친구를 집에 초대했어요. 같이 밥 먹고 놀았어요. 명절에는 남자친구와 우리 집에서 함께 있었어요. 남자친구도 혼자 한국에서 지냈거든요. 그래서 엄마하고 이모들은 음식을 만들 때마다 윤호 남자친구 왜 안 오냐, 몇 시에 오냐고 물어봤어요. 음식도 따로 챙겨주고요. 집에서는 눈치 보지 않겠다고 했는데 진짜 눈치 안 보고 편하고 자연스럽게 지냈어요.”

할 수 있는 만큼 할 거예요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3년 전에 일했던 가게에 다시 갔어요. 일하려고요. 이제 제 나이가 적지 않잖아요. 더 이상 엄마한테 돈 달라고 말할 수 없어요. 지금 엄마는 동생 때문에 중국에 가 있고, 할머니도 아파서 제가 일 해서 돈을 벌어야 해요. 혼자서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죠. 엄마한테 용돈은 못 줘도 저 때문에 엄마가 부담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게 책임감인 거 같아요.

지금 일하는 곳은 수원에만 매장이 4개 있어요. 진짜 바빠요. 어제도 새벽까지 일했어요. 하루의 절반 이상을 가게에서 보내요. 음식 냄새와 전화벨 소리가 일상이에요. 일어나면 다리가 아프고 온몸이 아파요. 기운도 없고요. 사실 오늘도 쉬는 날인데 가게에 가요. 가게는 엄청 큰데 사람이 없으니까 사장님이 저한테 기대를 많이 해요. 그게 부담돼요.

예전에는 게이바에 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놀았는데 요즘은 집에서 잠자기 바빠요. 집에서 밥 언제 해먹었는지 기억도 안나요. 점심쯤 일어나서 출근하고 새벽까지 일하고 다시 잠자요. 그렇게 지내고 있어요. 중국 가고 싶어요. 그래도 참아야죠. 돈도 벌어야 하고 예전이랑 다르게 살고 싶기도 하고요.

이제는 참을성 있게 일 할 거예요. 5년 동안 일해서 돈을 모으고 중국에 커피숍 열 거예요. 그냥 커피만 파는 곳 말고요. 제가 만화 좋아해서 원피스나 나루토 같은 피규어를 전시해놓는 공간을 마련해놓으려고요. 그런 커피숍의 주인이 되고 싶어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느낌으로 잘 꾸며놓을 거예요. 지금은 참을성을 키워야 해요. 나중에 장사하려는데 짜증나고 힘들다고 그만두면 어떡해요. 망할 수도 있잖아요. 지금은 할 수 있는 만큼 할 거예요.”

윤호씨는 밤낮이 바뀌어 몸이 고단하고 힘들지만 하고 싶은 것을 꿈꾸며 이 시간을 지내겠다고 말했다. 커피숍을 상상하며 이야기하던 윤호씨의 얼굴이 생생하다. 미래를 상상하며 설렜던 것인지 입가에 미소가 걸린 모습이었다. 활짝 웃거나 큰 소리를 내며 웃진 않았지만 작은 미소로도 윤호씨의 마음이 전해졌다.

인터뷰를 마친 윤호씨는 가게로 향했다. 가게 홍보용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윤호씨가 걸어갈 때마다 어깨에 걸려있는 카메라가 움직이며 빛을 뿜어냈다. 앞으로 다가 올 윤호씨의 시간들이 지금 모습과 같이 소탈하고 당당하길 바란다.

※ 담 기획단이 발간한 서적 ‘담을 허물다’를 구매하실 분은 기획단 이메일 rotefarhe@hanmaila.net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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