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죽음과 이어진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 속 언론인들이 주목받고 있다. 배우 이희준이 열연한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를 비롯해 고문치사 사건을 파헤쳤던 당시 사회부 기자들의 ‘분투’가 영화에 잘 담겨 있다는 평가다.

특종의 시작은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였다. 그는 출입처인 검찰을 돌다가 대검찰청 이홍규 공안 4과장으로부터 사건 얼개를 파악했다. 추가 취재를 통해 ‘불후의 기사’를 보도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1987년 1월15일자)라는 제목의 사회면 2단 기사에 사회가 뒤집어졌다.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 다음날이었다.

신성호 전 기자는 현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다. 불편한 사실 하나는 그가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 특보를 지냈다는 것이다.

▲ 영화 ‘1987’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밝혀내는 기자들이 등장한다.
▲ 영화 ‘1987’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밝혀내는 기자들이 등장한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비판 여론이 거셌던 국면에서 국민을 설득하기보다 언론을 통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박종철 특종’으로 진실을 알린 대기자로서 그는 어떤 보좌와 자문을 했던 걸까.

신 교수가 홍보 특보에 임명됐던 2015년 1월은 ‘정윤회 문건’ 보도를 통해 비선들의 국정농단을 폭로한 세계일보에 대한 청와대 탄압이 고조된 직후다. 박근혜 청와대의 수석비서관 회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일지 2014년 11월28일치를 보면, 청와대가 “세계일보 공격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있다. 업무일지 12월1일치에는 “압수수색 장소-세계일보사”라는 글귀가 김기춘 비서실장을 의미하는 ‘장’과 함께 쓰여 있다.

청와대 홍보 특보였던 신 교수는 2015년 1월경 정윤회 문건 보도 당시 사장이었던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을 만났고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도 한용걸 세계일보 편집국장을 접촉해 ‘보도 외압’, ‘사태 무마’ 의혹이 일었다.

신 교수는 당시 기자에게 “외압을 넣거나 압력을 행사한 적은 전혀 없다”며 “(만남 이후) 특별히 따로 (위에) 보고한 것은 없었다. 그냥 청와대와 언론 사이의 통로 역할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김 전 수석도 지난해 1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증인으로 출석해 한 전 국장과의 만남에 대해 “정윤회 문건 보도 이후 ‘불통’이 많이 보도돼 소통이 중요하다고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김 전 수석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리에 관여한 혐의(직권남용)로 지난해 7월 징역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지난 2016년 12월 국회에서 가결된 탄핵소추안을 보면, ‘언론의 자유 조항 위배’ 사례로 세계일보 탄압이 거론됐고, 그 내용 가운데 하나로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은 2015. 1. 세계일보 편집국장 한용걸을, 신성호 청와대 홍보특보는 세계일보 조한규 사장을 만나 세계일보의 추가 보도에 대하여 수습을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대목이 있다.

▲ 중앙일보 8일자 2면.
▲ 중앙일보 8일자 2면.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는 전직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하면서도 “이 사건에 나타난 모든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세계일보에 구체적으로 누가 압력을 행사하였는지 분명하지 않고 피청구인이 관여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지난 8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언론이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으면 결국 그로 인한 피해는 국민들과 국가 전체에 퍼진다”고 말했다. 이어 “(언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길은 다른 게 없다. 오직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권력을 감시하는 기사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기자’로서, 홍보 특보 시절 최고 권력자에게 이와 같은 ‘진언’을 전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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