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지난 8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가 공개한 최종 보고서에는 기본권의 주체를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현행 헌법 제2장(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10조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2장의 제목을 ‘기본권과 의무’로,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규정한 조항에서 ‘모든 국민’을 ‘모든 사람’으로만 바꿨다는 데 있다. 헌법에서 명시하지 않은 권리도 있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 ‘기본’이란 용어를 쓰고 국제적 위상에 맞게 기본권 적용 대상의 범위를 공동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장하자는 취지다.

개헌특위 자문위는 “세계화가 진전된 현실에서 거주 외국인들의 인권 문제를 입법정책이나 국제법, 조약에만 의존할 수 없으며 새로운 헌법에서는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류 보편성의 원칙과 가치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며 “다만 권리의 성격상 ‘국민’으로 한정해야 하는 경우에는 ‘국민’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 지난 2016년 12월3일 열린 제6차 박근혜 퇴진 국민촛불 집회 모습.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 학생이 방송차에 올라 자유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난 2016년 12월3일 열린 제6차 박근혜 퇴진 국민촛불 집회 모습.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 학생이 방송차에 올라 자유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최근 일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개헌특위 자문위 보고서 내용을 두고 ‘좌파 개헌안’이라는 이념적 색깔론을 씌우고 있지만, 헌법학자들 사이에선 인권과 민주주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논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는 평가가 많다.

지금 정치권의 개헌 관심사는 주로 권력구조(정부형태) 분산과 선거제도 개편에 쏠려 있지만, 헌법상 ‘모든 국민’을 ‘모든 사람’으로 확장한 것처럼 자문위의 제안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측면에서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조선일보는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부분을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사회’로 개정하자고 했다며 자문위가 마치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처럼 반발한다. 그러나 개정안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적시돼 있지 않고, 자문위 보고서는 개헌특위 ‘확정안’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문위 ‘권고안’에 불과하기에 보수언론의 ‘색깔론 프레임’은 지나친 호들갑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의 지적이다

외려 일각에서 대한민국이 계승해야 할 민주주의 정신에 ‘6·10항쟁’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과 ‘촛불시민혁명’ 등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6·10항쟁만 추가된 점이 아쉽다는 평가처럼 ‘이념적’으로도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9일 자문위 보고서 내용 중 헌법 전문과 관련해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위대한 이정표이자 시민 저항권의 현대적 모델을 보여준 민주항쟁”이라며 “그런 만큼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어 그 의미와 가치 규범을 확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 보고서 중 전문 개정안 갈무리.
▲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 보고서 중 전문 개정안 갈무리.
이 밖에도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국민발안·국민소환제 같은 국민주권 실현을 위한 직접민주제 도입 역시 자문위가 신설 제안한 내용이다.

자문위 개정안(헌법 제41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국민발안, 국민투표의 권리를 가지며, 일정 수 이상 국민 서명으로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의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소환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

이 조항의 신설 취지는 ‘국민주권 실현’과 함께 ‘대의제의 한계 보완’에 방점이 찍혔다. 지난해 대통령 탄핵을 끌어낸 우리 국민에게 실제 대통령과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권을 주자는 것이다. 현재 대통령 탄핵이 사법적 심판인 데 반해 국민소환은 정치적 심판이고, 국회의원 제명이 국회 내부의 심판이라면 국회의원 소환은 국민에 의한 심판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자문위는 “현재 헌법상 대통령 발의에 의한 국민투표와 국회의원 또는 대통령이 발의한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권이 전부여서 법률과 국가 주요 정책 등에 대한 실질적인 주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며 “국민의 입장에서 이번 개헌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고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주권 실현 방안으로 직접민주제를 확대 도입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현재도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로 직접 결정하게 돼 있어, 그런 점을 보면 대의제 자체가 절대 불변의 가치가 아니다”며 “대의제와 직접민주제를 어떻게 배분해서 제도화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의 판단 사안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교수는 “(국민소환제는) 국민의 대표자로서 제대로 입법을 하지 못한 국회의원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에게 책임지게 하는 제도이므로 국민주권을 제대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외려 대의민주제를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이런 권한을 주권자가 일종의 ‘히든카드’처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없어서 선거 때만 잠깐 국민에게 표를 구하다가 지나고 나면 국민 위에 지배하고 군림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8일 공개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 최종 보고서.
지난 8일 공개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 최종 보고서.
오 교수는 국민소환제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보수언론의 주장에 대해 “대의제 부작용이 이미 얼마나 심하게 드러나고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대의제 폐해를 더는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이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국민소환제 제도화는 주권을 제도화하는 형식이므로 국민 뜻을 받들어야 하는 의원들이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국민 통제를 받아야 하는 사람, 예를 들어 국정감사를 받아야 하는 행정공무원이 이를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번 국회 개헌특위 실무지원단장을 맡고 있는 한공식 국회운영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기본권 분야는 상대적으로 30년간 헌법 적용 과정에서 변화한 부분을 수용해 기본권을 신설·확대하기로 합의한 내용이 많고, 아동이나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분을 헌법에 담아야 한다는 제안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 위원은 “국민발안·소환제도 등 국민 참정권 확대 부분을 포함해 여러 다양한 인권적 측면에서 발전된 개념으로 논의가 이뤄진 부분은 충분히 높이 평가할 만하다”며 “이번에 헌법에 담기지 않더라도 이후 얼마든지 개헌 논의의 폭을 넓히는 차원에서 모두 올려놓을 수 있게 한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한 위원은 다만 이번 개헌 과정에선 자문위가 제안한 내용이더라도 상당 부분 공감대가 이뤄진 부분이 아니면 쟁점이 많은 부분까지 결론을 내어 개헌안에 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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