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수 MBC PD수첩 PD는 ‘투사’로 기억된다. 2005년 ‘황우석 줄기세포 논문 조작’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는 영웅 신화라는 광풍과 싸웠다. 2010년 김재철 전 MBC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뒤에는 ‘유배지’로 일컬어지는 비제작부서를 전전하며 언론이 장악된 시대와 싸웠다. 30대 열혈 PD는 그렇게 돌고 돌아 50대가 되어 ‘PD수첩’의 얼굴로 돌아왔다. 12년 만에 ‘PD수첩’을 다시 쓰게 된 그는 이제 진실을 찾는 ‘무사’가 되겠다고 말한다. PD수첩 신년 첫 방송(9일)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 5일, 서울 상암동 MBC에서 한 PD를 만났다.

- 얼굴이 밝아졌다는 말 많이 듣지 않나.

“마음 상태가 드러나는 것 같다. 과거 신사업센터에서 스케이트장 관리할 때는 무슨 신이 났겠나. 사람 만나는 것을 피했고, 조용히 혼자 책을 읽거나 운동만 했다. 송출 주조정실에 있을 때도 그랬다. 지금은 사람 만나는 게 즐겁다. 즐거운 일과 소재를 갖고 얘기하니까 표정에 드러난다. 사람들이 피부도 고와졌다고 한다. ‘로션’ 하나 바꿨을 뿐인데.(웃음) 예전에는 상암 사옥에 오면 셋방살이하는 기분이었는데, 이제야 내 집이 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 12년 만에 ‘PD수첩’에 복귀한 소감은 어떤가.

“2006년 1월 방송을 끝으로 ‘PD수첩’을 떠나 ‘MBC 스페셜’, ‘W’를 맡다가 김재철 체제 이후 ‘귀양살이’만 했다. 영영 복귀하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2016년 말 촛불혁명이 시작되고 최승호 사장이 임명되기까지 격동의 한 해였다. 감개무량하다. 이제는 칼을 다시 잡은 느낌이다. ‘무사’로 다시 나를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PD수첩’을 맡으면 취재원을 대하는 것이라든가 모든 게 달라진다. 따뜻하게 대하던 다큐멘터리와 달리 긴장하면서 공격이나 견제를 해야 하기도 하고, 피해자의 진심을 끌어내기도 해야 한다. 무사는 진실을 찾아서 떠나야 한다는 면에서 프로그램을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다.”

▲ 'PD수첩' 진행을 맡은 한학수 PD가 지난 5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PD수첩' 진행을 맡은 한학수 PD가 지난 5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복귀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우리는 한 번에 두 가지 과제를 요구받고 있다. 하나는 무너진 시스템을 빨리 고쳐서 전성기 때로 부활하는 것이고, 완성도 면에서 부족했던 점이나 과제들을 한 번에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상황이다. 또 하나는 외형적으로 ‘PD수첩’의 모든 성과나 실패를 제 한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PD수첩’이 잘못하면 모든 화살이 내게 올 가능성이 있고, 잘해도 내게 돌아올 가능성이 있어서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다.”

- 동료들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 파업 기간 때도 1990년대 사번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작년, 재작년에도 ‘구체제(김재철-안광한-김장겸 사장)’가 정리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고민이 상당했다. 사실 다들 ‘PD수첩’을 맡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30~40대 초반이 전성기인데, 지금은 50대 초반에서 40대 후반 ‘시니어’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우리로서는 (‘PD수첩’ 참여가) 어려운 결정이었다. 뉴스와 더불어 시사, 탐사 부문이 빨리 자리잡지 않으면 시청자들이 실망하고, MBC를 아예 외면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있었기에 몇몇이 자원했다.”

해직 언론인이었던 강지웅 시사교양1부장을 필두로 모인 ‘PD수첩’ 팀에는 MC 한학수 PD와 박건식, 조준묵, 유해진, 김재영 PD 등 ‘공인된 선수’들이 모였다. 한 PD는 “과거에는 ‘의무복무’를 시키고 인사고과를 잘 준다고 해도 잘 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자발적인 지원자가 많았다”고 말했다. “모종의 공감대와 절박감”이 ‘농익은’ 탐사취재팀을 꾸리게 한 배경이다.

“30대, 40대, 50대 감수성이 다 다르다. 지금 상태에서 30대로 돌아간다면 훨씬 부드럽게 정곡을 잘 찔렀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엔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한 프로그램 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 했고 호흡도 빨랐다. 바둑도 초단(初段)자들은 모든 돌을 살리려다 보니 핵심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간 ‘귀양살이’도 오래 하지 않았나.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에서 좋은 책을 썼다. 스스로 바닥에 내려가 보니 상대방이나 어려운 사람들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됐다.”

- 요즘 시청자들은 TV만 보지 않는다.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 부분이 있나.

“형식적인 변화에 대해 계속 논의 중이고, 이를 위한 인적 구성도 꾸리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억지로 PD들을 출연시키지 않고 ‘원 MC’ 체제로 간다는 점도 중요한 결정 사항이다. 유튜브 생중계도 추진할 것이다.”

- ‘PD수첩’이 제 역할을 못하는 동안 자리를 지킨 시사·탐사프로그램들이 있다. 어떻게 차별화할 건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그런데 말입니다’라는 멘트는 대단히 소중하고 상징적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추리적 구성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의 ‘한 걸음 더 들어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은 뉴스를 조금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서 봤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말이다. ‘PD수첩’ 정체성은 ‘성역 없는 취재’다. 우회하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를 표현하는 것이 ‘그 현장에 깊숙이 들어가봤습니다’라는 멘트다. MC인 저와 제작 PD들이 현장과 사안을 우직하게 돌파한다는 방식으로 풀어가게 될 것 같다.”

- 프로그램 제작·취재 과정에 얼마나 참여하나.

“‘취재하는 진행자’이면서 ‘(직접) 제보받는 사회자’라는 콘셉트다. 물론 취재 핵심은 PD들이 쥐고 있다. 개별 PD들과 함께 전체 맥락을 공유하고, 그 중 핵심적인 부분, 예컨대 중요 인사들에 대한 인터뷰는 제가 직접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제보자들도 ‘PD수첩’ 상징인 사회자가 직접 제보자를 만나겠다고 한다면 더 신뢰하지 않을까.”

▲ 'PD수첩' 진행을 맡은 한학수 PD가 지난 5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PD수첩' 진행을 맡은 한학수 PD가 지난 5일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역대 진행자들과 다른 한학수만의 색깔은 뭔가.

“과거 ‘PD수첩’ 진행자 중에는 최진용, 송일준, 최승호, 김환균 PD 등 쟁쟁한 선배들이 많았다. 명성에 누를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한학수가 진행하는 PD수첩 색깔은 무엇이 돼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한학수에 대해 갖는 기대는 황우석 사태를 보도할 때의 처절함, 당대 권력이나 마찬가지였던 ‘황우석 열풍’에 도전했던 점도 있지 않을까. 또 하나는 지난 몇 년간 강도 높게 탄압받고 저항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성역 없이 취재하고 진실을 추구했던 성격을 ‘PD수첩’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PD들이 (진행자로)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2005년 당시 ‘PD수첩-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편은 ‘애국자’에 대한 공격으로 치부됐다. 언론은 검증보다 한 PD가 ‘황 교수 죽이러’(동아일보) 왔다며 비난에 가세했다. “여섯 살배기 큰 애와 아내가 지방으로 한 달가량 피신할 정도의 잊지 못할 기억”(PD저널)이다. “진실과 국익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라는 질문에 “진실이 국익”이라고 답한 대가였다. 한 PD는 ‘진실 보도를 통한 승리의 경험’이 상처를 아물게 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해왔던 많은 작업이 있지만 ‘황우석 사태를 취재한 한학수’가 대명사가 됐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사건이고, 숙명이다. 황우석 사태는 제 인생의 큰 틀을 바꿨다. 당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끝까지 싸워봤다는 경험은 이후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상처로 남은 부분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쉽게 아물었다. 저널리스트로서 본분을 지켰다는 보람이 있었다. 고통만 당했을 때는 상처로만 남다가, 해결하지 못하고 아픔으로 그칠 때가 있다. 저로서는 어떻게든 정리를 했고, 진실 보도를 했다.”

- 현 정부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비판할 건가.

“‘PD수첩’은 어떤 권력이든 비판하고 성역 없이 견제할 것이다. 권력의 속성에 비춰볼 때 시간이 지나면 국민을 무시하거나 거리감을 두는 등의 편한 방식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한 견제와 비판은 문재인 정부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안 좋은 모습이 속출한 것은, 그만큼 언론으로부터 견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 언론이 ‘기계적 중립’에 치우쳤다는 지적은 어떻게 보나.

“사안의 경중이 아닌 기계적 균형에 맞추려는 보도, 집권 세력에 모든 것을 요구하고 분노를 쏟아 부으면서 권력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한다는 무책임한 보도에 대한 염려 같다.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기계적인 비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 ‘가르치려 드는 언론’에 대한 거부감도 커지고 있다.

“주류 언론이 여론을 지배하던 시대는 완전히 잊어야 한다. 주요 일간지든 방송사든 어디도 여론을 통제할 수 없다. 섣부른 보도에는 당장 반론과 지적이 돌아온다. MBC ‘뉴스데스크’도 이미 두 번 사과하지 않았나. MBC는 바닥까지 왔고,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약속했기에 국민이 더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PD수첩’ 역시 짧은 한 단락, 말 한마디라도 사실과 다르면 여지없이 비판받을 것이다. ‘계몽의 시대’는 끝났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관계와 핵심을 보여주되 판단을 강요하기보다 ‘우리는 여기까지 취재했습니다’라고 전하는 방식이 맞다고 본다.”

‘PD수첩’ 제작진의 목표는 MBC에서 멀어졌던 시청자의 신뢰를 되찾아 올해 안에 ‘제보하고 싶은 프로그램 1위’가 되는 것이다. 한 P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욕심을 내서 1년 안에 1위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단기간에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한두 달 동안은 우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겨우 보여주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최소 3~4개월은 돼야 전반적으로 나아졌다고 평가할 만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작품이 회자되려면 최소 6개월에서 1년은 지나야 한다고 본다.”

오는 16일 두 번째 ‘PD수첩’ 주제는 국가정보원이다. 한 PD는 “아이템을 기획하고 배치할 때 우선순위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먼저 고쳐야 하는, 국민이 가려워하고 있는 부분이 ‘적폐’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PD수첩’ 제작진은 공공 담론, 공적 주제 등 묵직한 사안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구체제’에서 이뤄졌던 잘못된 부분들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과제를 대안으로 제시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국정원 개혁, 국민 안전, 법원의 권위주의, 지방 토호들의 적폐 등 우선순위에 맞게 풀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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