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인권단체들이 “담을 허물자”며 7편의 글을 썼다. 이웃에 살고 있는 인간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담”을 허물자는 게 집필 의도다. 담이 가로막은 존재는 이주민이다. ‘담’ 기획단은 한국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이주민 7명을 만나 그들의 굴곡진 삶을 생애사로 기록했다.

한국사회는 2016년 촛불로 사회 전반에서 개혁 국면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주민 인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미디어오늘은 ‘세계 이주민의 날’(매년 12월18일)이 있는 12월을 맞아 담 기획단이 발간한 이주민 구술 생애사 책 ‘담을 허물다’에 실린 글 전편(서문 포함)을 기획연재한다. <편집자주> 

[싣는 순서]

①서문 :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②여성 이주노동자 스레이나 이야기 : “쑤쑤!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요!”
③북한이탈주민 김복주 이야기 : “난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④이주노동자 오쟈 이야기 : “그건 선택이 아니었다.”
⑤이주청소년 황윤호 이야기 : “혼자, 당연한 것 별거 아닌 것 낯선 것”
⑥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아웅틴툰 이야기 :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⑦종교적 난민신청자 ‘A’ 이야기 : “그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⑧귀국 이주노동자 날라끄 이야기 : “그냥 내 나라예요, 거기도!”


▲ 2017년 11월 한 지역 문화 행사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김복주씨
▲ 2017년 11월 한 지역 문화 행사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김복주씨

인터뷰를 위해 김복주 님이 단장으로 있는 한국평화통일예술단을 찾아갔다. 예술단 연습실에서 만난 김복주 님은 화려했고 아름다웠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트로트 가수라 그런지 달라도 뭔가 달랐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북한이탈주민이 겪었을 법한 우여곡절과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는데, 김복주 님이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는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시대의 아픔은 김복주 님에게 살려면 죽기를 각오하고 강을 건너도록 했다.

나는 멀고도 가까운 평양에서 왔어요

내가 태어난 곳은 평양이에요. 국적은 대한민국이죠. 보통 새터민, 북한이탈주민이라고 하는데 북한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이주민이랑 달라요. 국적이 처음부터 대한민국이거든요. 나이는 비밀로 할래요. 지금은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면서 공연 기획도 하고 대학에서 예술 공부를 하고 있어요.

내 이름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복주라는 이름은 평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 바로 위에 언니가 지어준 거예요. 언니가 한글로 ‘주’님의 ‘복’받은 자가 되라는 뜻으로 만들어 줬거든요. 그때만 해도 내가 종교를 완전히 받아들인 게 아니라 내 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한자로 ‘복 복(福)’자 ‘주인 주(主)’자로 뜻을 만들었어요.

한국에 와서도 김복주로 주민등록증 만들고 살았는데 생활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2013년에 개명했어요. ‘아름다울 가(嘉)’자에 ‘볼 람(覽)’자로요. 볼수록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가람이라는 이름은 기억을 잘 못해요. 복주라는 이름이 너무 강렬했나 봐요. 정겹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래서 가수 활동명이 김복주예요. 우리는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게 중요하잖아요.

지금은 안산에서 살고 있어요. 제일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살았던 곳이기도 해요. 그다음에 서울 갔다가 제주도까지 갔었는데 다시 안산으로 돌아왔어요. 한국에 오기 전 평양에선 어디에 살았는지 뭘 했는지는 자세하게 말하기 힘들어요. 어머니랑 언니, 동생들이 거기에 살고 있으니까요. 얘기해 줄 수 있는 건 형제가 2남 3녀였는데 제가 딱 중간이라는 거, 예술 쪽 일을 했다는 거 정도에요. 예술은 제가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다들 아시다시피 북한은 어렸을 때부터 인재를 발탁하거든요. 나도 우연히 다섯 살 때 발탁돼서 예술가로 쭉 키워졌어요. 아마 평양에 계속 있었으면 TV에 종종 나오는 북한 예술단 단원으로 활동했을 거예요.

예술 쪽 말고도 내가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여행도 할 겸 북한 팔도를 다 돌면서 장사를 했어요. 한국에선 보따리 장사라고 하던데 북한말로는 그걸 달리기 장사꾼이라고 해요. 시장에서 물건 떼다가 동네 여기저기 다니면서 파는 거예요. 황해남북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양강도, 자강도 이렇게 팔도를 다니면서 ‘지역마다 특색이 이렇구나,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이런 걸 알게 되고 배웠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북한이라고 하면 다 똑같이 살 거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런 부분이 있죠. 하지만 지역마다 말이나 억양 이런 게 조금씩 다르거든요. 자주 먹는 것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 달라요. 우리도 왜 경상도랑 전라도랑 말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정치적으로 다르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가족이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한국에 왔어요

나는 내가 한국에서 살 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잠깐 중국에서 돈 벌고 가족들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흘러흘러 한국에 왔어요. 북한에서는 중국으로 갈 때 강을 건너잖아요. 그때 안전하게 건너게 해주고 중국에 일자리도 알아봐 주는 브로커들이 있어요. 나도 거기 통해서 넘어갔죠.

막상 중국에 도착했는데 생활이 쉽지 않았어요. 돈이 안 모여서 북한에서 가져간 생활비도 다 썼어요. 주로 식당에서 일했는데 사장님이 북한 사람이라고 월급을 안 주는 거예요. 내가 불법으로 중국에 들어왔으니까 돈을 못 받아도 어디 신고할 수도 없고 하소연할 사람도 없으니까 무시한 거죠. 우리말로 꼬장질 한다고 하는데 그 짓을 하더라고요. 돈도 돈인데 한번은 사장님한테 일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때려요. 그런 일을 겪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중국이랑 너무 다르고 혼란스러워서 빨리 북한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일식당에서 일했는데 손님으로 왔던 한국 분이랑 우연히 이야기하다가 한국에 오게 됐어요. 이 손님은 한국에서 택시 운전을 했는데 아내가 중국 교포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아내랑 중국에 왔다가 우리 식당에 들렀는데 내가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굉장히 반갑고 친절하게 대해주더라고요. 나도 지금까지 봤던 중국인들이랑은 다르니까 지금까지 일에 대해 하소연도 하고 그랬죠. 그랬더니 이분이 한국에 들어와 사는 북한 사람이 많으니까 나보고도 한국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아 그땐 완전 충격이었어요. 아니 북한 사람이 어떻게 한국에 들어가지? 거기서 어떻게 살지? 믿기지 않는 거죠.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 동안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차피 나는 가진 게 하나도 없어서 죽을 각오를 했어요. 저에겐 선택이 북한에 가거나 한국에 가서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 둘 중에 하나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어차피 고생할 거면 우리보다 발전한 한국에 가서 자리를 잡자고 생각했어요. 그때 김대중 대통령 다음에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라 김정일도 만나고 분위기가 괜찮았잖아요. 나는 그때 10년 안에 통일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때까지만 고생한다 생각하고 미리 한국에서 자리 잡고 통일하면 우리 가족들이랑 행복하게 살자 마음먹었죠. 그렇게 한국에 가기로 하고 이분한테 70만 원을 빌렸어요. 그 돈으로 브로커를 구해서 그 사람이 알려준 데로 길을 걷고 또 걷고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산 넘고 강 건넜어요. 3개 나라를 거쳐서 한국에 왔어요. 그게 벌써 2007년이니까 올해로 한국에 온 지 11년 됐네요.

처음 한국에서의 생활은 지옥 같았어요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인천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만세 부르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던데, 나는 왠지 다시는 북한에 못 갈 것 같고, 왠지 모르게 후회가 되더라고요. 내가 선택을 잘못한 건 아닌지 마음이 너무 복잡했어요. 한국에 오자마자 국정원에 가서 왜 한국에 왔는지 조사받고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한국에서 살아가는데 반드시 알아야 기본 교육이라고 해야 하나요? 지하철은 어떻게 타는지,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는지 뭐 이런 걸 배웠어요.

3개월 동안 하나원에 있다가 사회로 나오는데 정문 앞에서 브로커를 만났어요. 나는 안산에서 온 적십자 직원 분 차 타고 경찰서에 가는 길이었거든요. 전입신고를 해야 해서요. 브로커들은 거기까지 계속 쫓아오더라고요. 내가 한국에 올 때 450만 원이 들었으니까 그 돈을 빨리 갚으라는 거죠. 그런데 내가 당장 돈이 어디 있어요. 재산이라고는 하나원에서 나올 때 생활정착비로 받은 300만 원이 전부였거든요. 그 이야기를 했더니 지금 300만 원 주면 그것만 받고 남은 돈은 안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돈 줘버리고 브로커들은 돌려보냈어요.

사회로 나오자마자 그 일을 겪고 하나원에서 구해준 임대아파트에 들어갔는데 어떤 남자 분이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창틀 공사를 했는데 40만 원 들어갔다고 돈을 달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어떡해요. 나는 이불이랑 밥솥 하나가 전부였는데 한국에서 아는 사람은 그 택시 기사 분밖에 없고요. 어쩔 수 없이 그분한테 전화를 했더니 그분도 돈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분 친구한테 40만 원을 빌렸어요.

이 택시 기사 분이 참 고마운 게 중국에서 나한테 70만 원 빌려줄 때도 자기가 가진 돈이 없어서 은행에서 대출 받아서 빌려줬더라고요. 나는 한국 사람들이 다 잘사는 줄 알았는데 그 분도 없는 살림에 나를 도와주려고 빚을 진 거죠. 지금도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루가 너무 길었는데 이상하게 눈물은 안 나더라고요. 울 새가 없었던 거죠. 아, 그리고 집은 또 왜 이렇게 더러워요. 한국 사람들 엄청 깔끔하지 않아요? 근데 그 집은 얼마나 더럽던지 그날 밤새 집에 있는 곰팡이를 닦고 또 닦았어요.

다음날엔 바로 공장에 취업했고요. 안산은 공단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바로 일을 구했는데 거기가 반도체 하청 공장이었어요. 방진복이라고 하나요. 그 하얀색 옷 뒤집어쓰고 일했어요. 한 달 월급이 120만 원이었는데 4대 보험 내면 110만 원 남았어요. 이 돈으로 언제 생활하고 빚을 갚나 막막했죠. 나는 나 혼자 잘 살자고 한국에 온 게 아니잖아요. 가족들하고 다 같이 잘 살려고 온 거라 돈이 더 필요해서 공장 퇴근하고 24시간 하는 동태찌개 식당에서 서빙을 했어요.

그렇게 번 돈을 편지와 함께 브로커 통해서 북한에 있는 엄마한테 보냈는데 2년 만에 끊겼어요. 그 브로커가 제가 준 돈을 엄마한테 안 주고 자기 주머니에 챙기고, 나처럼 한국에 아예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생이별을 했으니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 김복주씨는 고향이 생각날 때 경기도 임진각을 찾는다.
▲ 김복주씨는 고향이 생각날 때 경기도 임진각을 찾는다.

우연한 기회로 예술 활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공장 일 그만두고 다시 취업하려고 하는데 북한 예술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 선생님께 내가 일을 구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니까 한국에도 북한 예술단이 있으니 거기서 일을 해보라고 안내를 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예술단 들어가서 일하다가 가수를 하게 됐어요. 지금은 내가 가수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다시 예술 쪽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일단 한국에 북한 예술단이 있을 거라고도 상상을 못했고요.

그런데 우연히 북한 예술단에서 활동하고 한국가수협회에도 등록해서 정식 트로트 가수가 된 거죠. 영화도 몇 편 찍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예술 공부도 하고 있고요. 내가 워낙 호기심이 많다고 했잖아요. 예술 쪽 일을 다시 시작하니까 한국이랑 북한 예술을 둘 다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할 때 필요한 호흡이나 발성이 조금씩 다르고, 느낌이나 정서도 달라서 그런 걸 배우고 있어요. 노래 말고도 북한에선 재담이라고 하고 한국에선 연극이라고 하죠. 그 공연 연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학교에서 실습 프로그램으로 내가 연출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어요.

힘들 때마다 예술 활동이 나를 잡아주었어요

남들이 저한테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가수 김복주입니다, 연기자 김복주입니다” 이렇게 소개해요. 그런데 직업이라고 하면 이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근데 그게 안 돼요. 지금까지 가수로 활동하면서 번 돈보다 알바하면서 번 게 더 많아요. 식당 서빙하고 막노동 뛰고 각종 행사에 스텝으로 나가고, 정수기 팔고 가사도우미도 해 보고 닥치는 대로 일했거든요. 어디나 예술로 먹고사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고흐도 살아있을 때 얼마나 가난했어요. 그래도 한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연출 공부하고 영화에 출연하면서 예술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나를 응원하는 팬들이 있거든요. 내가 한국에서 노래하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내 노래를 듣고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하루의 피곤을 풀면서 즐거워하는 팬들이 있다는 거죠. 북한에서는 예술 활동이 내가 해야 하는 거, 나한테 주어진 일이었는데 한국에선 조금 다르잖아요. 팬 중에 어떤 분은 내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주기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라고 문자 보내주고 힘내라고 선물 보내주고 응원해 주세요. 얼굴 아는 팬들은 행사장이나 공연할 때 찾아와 주시고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가족처럼 지내요. 그게 정말 큰 힘이 됐어요. 누군가가 나를 믿어 주고 바라봐 주니까 버팀목이 되더라고요.

물론 가수로 활동하면서 행복했던 일보다 상처받은 것도 많았어요. 그래도 ‘힘들지만 가수하길 잘했다’ ‘포기 안 하고 이거 하길 잘했다’ 싶은 게 있어요. 내가 매년 명절이나 연휴에 사비를 털어서 개인 자선음악회를 열었거든요. 공연팀 섭외하고 손님들 먹을 음식 준비하고요.

그걸 왜 시작했냐면 내 팬들이랑 홍대에서 작은 콘서트를 했었어요. 그런데 공연할 땐 몰랐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까 뭔가 굉장히 허전하더라고요. 이 허전한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내 노래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면 좋겠더라고요. 누구보다 내가 명절이나 연휴에 힘들어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매년 한 번 정도 북한이탈주민이나 이주민, 혼자 사는 사람들이랑 같이 북적북적하게 노래도 듣고 놀고먹고 쉬면서 보낼 수 있는 음악회를 열었죠.

요즘은 많은 거 바라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는 일로 한 달 동안 먹고 사는 데 지장 없고, 예술 활동을 오래 할 수 있을 정도만 돈을 벌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더 욕심을 낸다면 한국과 북한이 교류하는 데 있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어요. 북한은 한국 노래나 드라마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군 간부들이 가수 최진희 씨 엄청 좋아해요. 회식할 때 ‘홍도야, 울지 마라’ 이 노래도 많이 부르고요. 내 남동생도 18번 노래가 가수 나훈아 씨 ‘갈무리’였어요. 그런데 한국은 북한 노래에 대해 아는 게 ‘휘파람’ ‘반갑습니다’ 말고 없을 거예요. 거기도 다 사람 사는 세상이고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인데 너무 아는 게 없어요. 알 기회도 없고요.

같으면서도 다른 세상이 어지러웠어요

여기서 살다 보니 나랑 다른 이주민이랑 다른 게 있더라고요. 이주민은 외국인이지만 몇몇 나라 빼고는 같은 자본주의 체제 사회에서 살다가 오잖아요. 그래서 한국에 오면 언어나 문화는 달라도 적응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같은 민족이라 말은 통하는데 사회 체제가 다르니까 적응하는 게 더 어색하고 어렵더라고요. 먹고 사는 것도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한국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살잖아요. 근데 여기는 경쟁 사회라서 누가 도와주지를 않아요.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아야 해요. 한국에서 11년 살면서 오늘은 뭘 먹어야 하나, 뭘 입어야 하나, 이달 생활비는 얼마나 남았나 늘 걱정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 행복하다면 행복하고, 즐겁다면 즐겁게 살고 있기는 한데 가족들이 있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바쁘게 살 때는 괜찮은데 명절이나 연휴가 길거나, 봄에 꽃 피고 그러면 생각이 많아져요. ‘내가 이렇게 바쁘게 노력하면서 살고 있는데 통일은 왜 안 되나’ ‘통일이 오기는 하는 건가’ ‘통일이 안 돼서 우리 가족들 영영 못 만나면 어떡하나’ ‘만일 가족들 영영 못 만나게 되면 저승에서 미안해서 어떻게 얼굴을 어떻게 볼까’ 계속 이 생각만 들어요. 이게 깊어지면 우울증이 심해져서 잠도 못 자고 웃으려고 노력해도 웃을 수가 없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서 그냥 확 죽어버릴까 나쁜 생각도 많이 했었어요.

나도 여러분도 시대의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북한에 있을 때 ‘한국’ 하면 어떤 이미지였는지 알아요? 나는 늘 우리 민족, 같은 나라, 애틋함, 그리움, 이런 거였어요. 한국에 연고가 있거나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남조선 인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했죠. 다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통일은 언제 되는지 궁금했고요.

물론 한국에서 ‘북한’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북한에서도 한국에 대해 나쁜 이미지가 있었어요. 북한 방송에서 한국은 학교도 그렇고 병원도 돈을 내고 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돈 없으면 공부도 못하고 병원 치료도 못 받아서 죽는다고요. 북한은 나라에서 국민들이 아프면 병원에서 무상으로 치료해 주고 계절별로 입을 옷 다 주고, 먹을 것을 주고, 공부 잘하면 나라에서 대학까지 보내주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국에 와서 굉장히 놀란 것 중 하나가 한국 군대가 북한 군대를 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였어요. 그게 너무 속상해요.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나는 북한에 있을 때 한국 군대가 적군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북한 군대도 절대 한국 군대를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북한 군대는 자기 나라 국익을 위해서 한반도를 어지럽히고 반으로 가른 강대국 군대가 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국이랑 북한 주민은 모두 피해자라고 생각하고요. 너는 스스로 선택해서 한국에 왔으니까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내 생각엔 나도 여러분도 모두 다 피해자예요. 전쟁이 없었다면 왜 내가 가족이랑 생이별하고 고생하면서 살겠어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북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이 내 몸을 앞뒤로 살피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뭐하는 거래요?” 물어보니까 “어, 뿔이 없네” “꼬리가 없네” 이러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북한 사람은 얼굴이랑 꼬리에 뿔 달린 괴물이라고 배웠다는 거예요. 한국사람들 다 그렇게 배우나요? 정말 그 얘기 들었을 땐 뒷머리 뒷북치겠더라고요. 그리고 한국 사람들 왜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 쏘면 나한테 “북한은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따지는데 그거 너무 불편해요. 아니 내가 미사일 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북한에 살지도 않는데 왜 나한테 따져요. 난 거기서 태어난 죄밖에 없잖아요. 북한하고 관계가 안 좋으면 왜 내 행사가 갑자기 없어지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고 하잖아요. 나는 우리가 서로 북맹, 남맹이라는 생각이에요. 서로를 너무 몰라요. 그래서 내가 노래도 하고 영화도 출연하면서 서로를 알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누가 나보고 좌파래요. 그래서 내가 “좌파가 뭐예요?” 물어보니까 빨갱이래요. 아니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빨갱이 같은 소리를 해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 사람한테 이랬어요. “아니 그쪽은 먹고 살기가 참 편하신가 봐요. 나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매일 아등바등 사는데. 서로 싸우지 말고 빨리 통일하자는 게 빨갱이 짓이면 난 그 짓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따졌어요.

대체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요? 나는 우리가 남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가족들 만날 수 있으면 그게 통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이나 북한이나 무조건 같은 생각과 방식으로 살자는 거 아니에요. 두 개 나라, 두 개 체제로 가도 돼요. 난 그저 우리가 서로 싸우지 않고 고향에서 가족들이랑 함께 살고 싶은 거예요. 여기서 평양이 얼마나 가까워요. 제 자가용으로 안산에서 출발하면 평양까지 2~3시간이면 갈 거예요. 대전보다 가깝죠. 그런데 거기에 갈 수 없으니 얼마나 비극적이고 통탄할 일이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해요

뭔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그저 평소에 생각했던 거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 잘 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인터뷰라는 거 이전에도 몇 번 해봤는데 썩 좋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개인적인 생각이나 사생활이 드러나게 되니까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래도 이번 인터뷰에 응한 건 나 같은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더 솔직한 심정은 한국 사람들이 북한이탈주민들이 겪는 고충에 대해 알아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물론 내 이야기에 손가락질하고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괜찮아요.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남한테 피해준 적 없고 정직하고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 많이 했거든요.

이야기를 하는 내내 김복주 님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 눈시울을 보는 내 마음엔 무거운 돌 하나가 얹어진 느낌이었다. 이 돌덩이는 집으로 가는 길에서나 이야기를 정리할 때마다 나를 눌러댔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겪는 고충을 알아주면 좋겠다던 김복주 님의 마음을 세상에 온전히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은 게 있었다. 김복주 님은 내가 느낀 이 돌덩이를 늘 홀로 지고 살았다는 것을. 힘들고 지칠 땐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들에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다시 힘내고 버텼던 것이다. 김복주 님의 절실함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부터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이야기까지 세상에 꺼내주었다. 나는 이제 김복주 님이 홀로 지고 있던 돌덩이를 나눠 드는 친구가 되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여러분에게도 같은 마음이 전달되길 바란다.

※ 담 기획단이 발간한 서적 ‘담을 허물다’를 구매하실 분은 기획단 이메일 rotefarhe@hanmaila.net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북한이탈주민

북한이탈주민 또는 탈북자, 새터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이탈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주민을 가리킨다. 북한이탈주민은 대한민국의 법률상 용어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주소ㆍ직계가족ㆍ배우자ㆍ직장 등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벗어난 후 대한민국 이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출처: 위키백과사전)

** 하나원

하나원은 1999년 7월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사회 정착 지원을 위해 관여하는 대한민국 통일부 소속기관이다. 북한이탈주민은 입국 후 일정 기간 동안 탈북 과정에서 겪은 신체적·심리적 문제부터 한국 생활에서 필요한 부분을 하나원에서 지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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