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인권단체들이 “담을 허물자”며 7편의 글을 썼다. 이웃에 살고 있는 인간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담”을 허물자는 게 집필 의도다. 담이 가로막은 존재는 이주민이다. ‘담’ 기획단은 한국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이주민 7명을 만나 그들의 굴곡진 삶을 생애사로 기록했다.

한국사회는 2016년 촛불로 사회 전반에서 개혁 국면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주민 인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미디어오늘은 ‘세계 이주민의 날’(매년 12월18일)이 있는 12월을 맞아 담 기획단이 발간한 이주민 구술 생애사 책 ‘담을 허물다’에 실린 글 전편(서문 포함)을 기획연재한다. <편집자주> 

[싣는 순서] 

①서문 :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②여성 이주노동자 스레이나 이야기 : “쑤쑤!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요!” 
③북한이탈주민 김복주 이야기 : “난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④이주노동자 오쟈 이야기 : “그건 선택이 아니었다.” 
⑤이주청소년 황윤호 이야기 : “혼자, 당연한 것 별거 아닌 것 낯선 것”
⑥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아웅틴툰 이야기 :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⑦종교적 난민신청자 ‘A’ 이야기 : “그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⑧귀국 이주노동자 날라끄 이야기 : “그냥 내 나라예요, 거기도!”


스레이나 씨는 몇 해 전부터 고용허가제 폐지나 이주민 권리 보장을 위한 집회에서 자주 봐 온, 낯익은 분이다. 집회에 참여하는 이주노동자들 중 여성은 그리 많지 않은 데다 단상에 올라 낯선 크메르어로 무엇인가를 힘차게 말하는 그녀의 단단하고 여문 모습은 자그마한 몸집과 대비되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통역이 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 영근 표정과 눈빛 때문이었을 게다.

스레이나 씨를 만나러 가는 길, 늦여름 더위 속에서 안산 다문화거리를 헤맸다. 이국의 언어로 된 간판들은 마치 초대장처럼 ‘알아보고, 알아듣는 이’, 적어도 ‘알려하는 이’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 가던 길을 다시 돌아 ‘지구인의 정류장’에 도착하니, 부당한 대우가 일상이었던 일터를 떠나 머리 뉠 곳을 찾아온 말간 얼굴의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 서넛이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는 함께 앉아 스레이나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한숨, 누군가의 맞장구가 스레이나 씨의 음성 속으로, 서른여덟 해, 결코 짧지 않은 그녀의 삶의 여정 속으로 늦여름 저녁노을처럼 스며들었다.

가족을 위해서, 내 일이기 때문에 떳떳하게 일했어요

스레이나 씨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에 있는 ‘콤쁘래악아인’ 군의 ‘크바찌로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묻는 내게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특별한 게 없었다고 했다. 특별할 게 없었던 캄보디아 작은 시골 마을의 10대 소녀, 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소녀 스레이나는 당차고 씩씩했다. 그리고 그 단단함이 마치 당연한 운명이라도 되는 듯 묵묵히 일했고 쉼 없이 돈을 벌었다.

▲ 스레이나씨 어린시절 가족사진
▲ 스레이나씨 어린시절 가족사진

“기억나는 건 열두 살 때쯤인데 그때 집안이 너무 가난했어요. 엄마가 과자 같은 것을 만들어서 파는 걸 같이 팔았어요. 보통은 5시까지 학교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저는 5시까지 못하고 2시에 끝내고 와서 엄마가 과자 만드는 것을 돕고 그걸 팔았어요. 형제는 여덟 명 있는데 저는 맏이이고 동생들은 모두 어렸기 때문에 쭉 그렇게 열여덟 살 때까지 공부는 못하고 일을 계속하게 됐어요.

열여덟 살 때 엄마한테 이제 과자 파는 일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는데 거기 물건 파는 곳도 있고 하니까 그곳에 가서 일하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거기는 아침 일곱 시부터 일해서 밤 열두 시쯤 되면 손님이 안 오고 일이 끝나는데 그렇게 하루 일하면 일 달러를 주니까, 그게 돈이 더 나으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했죠. 처음에는 거기서 그렇게 아르바이트처럼 하루에 일 달러를 받고 일했는데 한 달쯤 후에 사장님이 제가 일하는 걸 마음에 들어해서 쉬는 날 없이 고정으로 일해서 20달러를 월급처럼 받기로 했어요.

시간이 좀 지나니까 사장님이 월급을 제대로 안 주기 시작했어요. 두 달에 한 번씩 월급을 주고 그런 식이어서 5개월쯤 지나서는 그냥 다시 일당 받는 아르바이트로 하겠다고 했어요. 월급 한 번 받으려면 내가 막 사정하고 부탁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돼서,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아르바이트로 하겠다고 한 거죠.

그 뒤에는 맥주 파는 일을 했어요. 맥주 파는 일을 하면 월급이 40달러나 됐어요. 하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여자가 술 파는 것에 대해 편견이 있어요. 술 파는 여자는 술만 파는 게 아니라 다른 안 좋은 일도 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멸시해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알지만 내가 진짜 그런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가족을 위해서, 내 일이기 때문에 떳떳하게 일했어요. 맥주 파는 일은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 했어요. 그렇게 밤에 하는 일은 여자에게 안 좋다는 편견이 있어도 나는 그냥 떳떳하고 40달러를 받을 수 있으니까 일을 했어요. 그 전에는 월급이 20달러였는데 이 일은 두 배나 되니까요.”

하루 1달러, 그리고 노동의 대가일 뿐 아니라 멸시의 시선을 버틴 대가일지도 모를 40달러로 스레이나 씨의 가족은 소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동생들은 학교에 다니고 아픈 엄마는 치료를 받았다. 그녀에게 가족은 고된 노동과 남들의 차가운 시선과 편견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지만 동시에 삶의 여러 갈래 길 중에서 가족을 위한 책임의 길을 택하게끔 하는 보이지 않는 테두리이기도 했다.

“그렇게 맥주 가게에서 일하다가 알게 된 사람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사람이 자기 여동생의 가게(음식점)가 프놈펜에 있는데 여기서 월급 별로 안 주면 거기서 일하는 게 어떠냐고 했어요. 지금은 밤 12시까지 일하고 집에 가면 새벽 2시가 다 되니까 힘들지 않냐, 술 파는 일을 그만두고 음식점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같이 프놈펜에 갔어요. 프놈펜에서 일하게 된 거죠. 그때도 열여덟 살이었는데 그때까지는 한 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었고 혼자 산다는 것, 도시에 가서 산다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그런데 그때 딱 엄마가 몸이 아팠고 집에 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결심하고 집에 말도 안 하고 프놈펜으로 갔어요. 이때 엄마는 알고 있었고 아빠는 몰랐는데 아빠가 엄마한테 굉장히 화를 냈대요. 왜 애를 거기에 보냈냐고. 그러고 나서 하루 반 만에 아버지가 일하는 데로 찾아 왔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찾아 왔어요. 프놈펜 중서부 지역에 식당이 있었거든요, 집에서 한 20km 정도 거리였어요. 나는 아빠에게 여기서 일할 거니까 안 간다고 했어요. 동생들은 다 공부하고 있고 엄마는 아프고 아빠 혼자서 뭘 어떡할 거냐고, 나는 여기에서 일하겠다고 했어요.”

열여덟 소녀 스레이나는 가족을 위해 고향 마을을 떠나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갔다. 딸을 찾아온 아버지를 돌려보낼 만큼 당찬 그녀였지만 대도시에서의 삶은 낯설고 두려웠다. 고향을 떠난 이주자로서의 삶은 가진 것 없는 어린 스레이나에게 한편으로는 좋은 기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달리 선택할 수 없는 하나의 ‘비에스나(운명)’였다. 가족을 떠나 홀로 지내는 삶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프놈펜은 어느새 또 다른 고향처럼 익숙한 곳이 되었다.

“프놈펜 시내에 있는 음식점에서는 숙식하면서 지내니까, 숙식비 안 내는 대신 한 달에 20달러 받고 일했어요. 일한 지 2년이 지나서야 25달러로 올랐어요. 음식점이지만 사람들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니까 밤늦게까지 문 안 닫는 경우도 많아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일하는 사람들 모두 늦게 퇴근했어요. 그래서 2년 지나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둬야겠다고 하니까 사장이 월급 좀 올려주겠다고 해서 25달러로 올린 거예요. 

또 가게를 새로 지었는데 그때도 집 짓는 사람들을 따로 쓴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돌도 나르면서 다 같이 집 짓는 일까지 했어요. 식당에 직원이 10명 정도 있었는데 그 건물 짓는 일을 직원들이 그걸 다 한 거죠. 건물 3층으로 시멘트, 벽돌 이런 물건들을 다 날라야 하는데 쉬면서 일하자고 해도 사장님은 쉬지 말고 일하라고 했어요. 

일이 너무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그만두겠다고 하면 또 조금 월급을 올려주고 그럼 또 일하고, 또 그만둔다고 하면 또 월급 조금 올리고 계속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한국 오기 직전인 2011년쯤에는 100달러까지 월급이 올라갔어요. 거기서 그렇게 제가 13년 동안 일했어요. 18살부터 32살까지 13년 동안.”

스레이나 씨는 인터뷰 내내 ‘상황이 그러니까 그냥 한 거’,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훌쩍 넘긴 13년의 세월도 그녀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그냥’ 살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꾸만 그 ‘그냥’이 마음 한구석에서 덜그럭거린다.

그녀가 말하는 ‘그냥’의 세월, 그 고단한 노동의 시간과 찬란한 청춘의 시절이 순식간에 비추었다 사라지는 빛과 어둠처럼 정말 그냥 지나가기만 했을까?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캄보디아에서는 익숙한 정서인 전생의 카르마와 비에스나에 굴복하며 그녀 역시 순순히 그냥 그 시간을 보낸 것일까? 작고 여린 나무가 어느새 나의 키를 넘겨 저 높은 하늘로 쑤욱 쑥 뻗어 올라가는 것처럼, 바람과 눈비 속에 흔들리더라도 건강한 생명력과 용기로 뿌리 내리고 가지 뻗으며 자라온 그 성장의 시간을 그녀는 ‘그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너른 벌판 군데군데 홀로 불쑥, 곧게 솟은 나무, 그녀의 삶이 그려내는 풍경은 몇 번의 방문 내내 인상 깊었던 캄보디아 들판의 풍경과 겹쳐졌다.

“2011년에 여동생이 자기 친구가 NPIC시험에 통과했다면서 나한테 언니도 해보라고 알려줬어요. 그 시험을 봐야 한국에 올 수 있어요. 일하던 식당은 새벽에도 할 일이 많이 있었어요. 식당 여주인은 시간도 없는데 공부는 무슨 공부냐, 여기에서 일이나 하라고 했어요. 저는 공부를 하려고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미리 식당에서 팔 아침 음식 준비를 다 해 두고 7시 반에서 8시까지는 수업하는 곳으로 가서 아침에 공부했어요.

15일 동안 잠도 하나도 안 자고 그렇게 공부를 했어요. 주로 읽기를 했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한 달 공부하는데 나는 15일만 공부했어요. 수업 듣는 건 한 달에 15달러였는데 한 달을 못 채우고 시험을 친 거죠.

나는 일만 해서 친구도 없고 사실 아무것도 정보가 없었어요. 누가 알려 준 것도 아니고 시험 보려고 잠깐 공부만 한 거지 한국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안녕하세요’ 이런 말만 겨우 배운 거죠. 140점을 받아야 합격하는데 나는 120점 밖에 못 받아서 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많이 울었어요. ‘이렇게 잠도 안 자고 힘들게 공부했는데 왜 안 되는 거야’ 이러면서요. 그때는 일자리가 농업 쪽은 없었고 제조업만 자리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아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100점에서 120점 되는 사람들은 농촌에서 일하는 거로 모집을 하니 저도 기회가 있을 수 있다고 한번 알아보라고요. 친구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안 믿었어요. 그런데 그 말을 해준 친구의 형제가 한국에 일하러 보내는 거랑 관련된 기관에서 일하고 있어서 또 그 말이 맞나 싶었어요. 시험결과는 합격통지문을 주는 게 아니라 시험 친 학교에다가 합격한 사람 이름을 쭉 붙여 놓았어요. 자세히 보니까 거기에 내가 합격했다고 나와 있었어요. 시험 볼 때도 부모님에게 얘기 안 했어요. 하지만 동생들은 전부 알고 있었어요.

합격하니까 부모님도 좋아하셨어요. 가게에서 일할 때는 월급도 적고, 이제 나이도 있고 오랫동안 그렇게 일하면서 살아왔으니까 한국에 가는 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시험을 본 뒤에 8개월 만에 한국에 왔어요. 월급을 받아서 가족한테 보내는 돈 말고 따로 모아놓은 돈이 좀 있었어요. 1200달러 정도였어요. 비행기 표는 700달러였어요. 캄보디아는 중간에 사기꾼같은 브로커가 있어요. 그런데 나는 한국에 보내는 기관이랑 관련된 친구도 있고 공무원 중에 아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사기는 안 당했어요.

7일 동안 교육을 받고 뭐 준비할 시간도 없이 2012년 4월 4일에 한국에 왔어요. 어쨌거나 한국에 오게 된 사실 자체가 너무 기쁘고 즐거웠어요. 300달러든 400달러든 이제 한 달에 월급을 그 이상 벌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죠. 300~400달러는 30~40만 원인데 내가 13년 일한 식당에서 받던 월급 100달러의 서너 배를 받는 거니까 300~400달러만 벌더라도 이렇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그냥 온 것 자체가 즐거워서 막 일을 열심히 하고 싶었고 바로바로 일하고 싶었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게까지 가는 데 1시간 반, 오는 데 1시간 반

“처음 일한 곳에는 캄보디아 사람 4명이 같이 일을 했어요. 충주 농장이었어요. 아욱, 적겨자, 대파, 상추, 배추, 청경채, 근대도 있었어요. 비닐하우스가 한 오십 개 정도 있고 키우는 것도 종류가 많았어요. 일하는 사람은 한국 사람도 있었고 중국 사람도 있었고요.

같이 온 캄보디아 사람 4명은 오후에 도착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래도 모두 착해서 오자마자 일을 막 시작했는데 거기 있던 아줌마들이 말도 못 알아듣는 애들이 왔다고 별로 안 좋아하고 그런 느낌으로 얘길 하는 거 같았어요. 한 달쯤 일하고 나서 말을 좀 알아들었어요.

일은 아침 6시부터 낮 12시까지 하고 점심 먹고 1시부터 6시까지 또 일이에요. 오전에 6시간, 오후에 5시간이지만 점심시간은 한 시간 다 못 쉬고 밥 먹자마자 또 일했어요. 첫 월급 받았을 때 월급이 많은 건지 적은 건지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좀 의심스럽기는 했어요. 6시부터 12시까지 일을 하고 밥을 먹는다고 계약했는데 1시까지 일을 하고 밥을 먹었고 밥 먹자마자 바로 일을 했기 때문에 점심시간 한 시간 쉬기로 한 건 어떻게 계산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일을 시키는 만큼 돈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지만, 한국 온 지 얼마 안 돼서 물어볼 수도 없었고 계속 일만 했죠. 그리고 사장님이나 다른 누구하고도 얘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5개월 동안 슈퍼나 마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캄보디아 사람 네 명은 남자 둘, 여자 둘 이렇게 있었는데 하루는 남자 둘이 자전거를 한 대 발견하고 그걸 타고 좀 멀리까지 나가 본 거예요. 갔다가 돌아와서 어디 어디에 상점이 있다고 말해 줬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까지 가려면 굉장히 멀지만 한 번 가보자 했어요. 보통 휴일이 딱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토요일에 쉬는 날이 생겨서 시내로 나가 봤어요. 나중에 보니까 택시를 타면 7천 원 정도 나오는 거리였어요. 한 달에 한 번 사장님이 월급을 통장에 넣어주러 갈 때 차에 우리를 태워서 시내에 있는 은행에 데리고 갔어요. 돈 넣고 또 바로 돌아와서 다시 일했어요. 그래서 아무 데도 못 가보고 어디가 어딘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어요.

그러다가 그렇게 시내가 어디 있고 가게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된 다음부터는 토요일이나 일요일 쉬는 날이나 평일에도 일 끝나고 나서 사장님이 퇴근하고 나면 바로 밖으로 놀러 나갔어요. 그냥 걸어서 갔는데 가는 데만 1시간 반 걸렸어요. 걸어서 가는 거 1시간 반, 오는 거 1시간 반. 그래도 좋았어요. 밖에 갈 수 있다는 게.

그때 처음 5개월 동안은 전화기도 없었어요. 전화기를 개설할 수는 있었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내용은 잘 몰랐어요. 그래서 직접 어디 연락하거나 얘기할 수는 없었어요. 다른 데 사는 친구 중에 핸드폰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시내에 나가서 공중전화로 그 친구한테 가끔 전화해서 나는 지금 잘 지내고 있다고 우리 가족한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핸드폰은 필요하니까 나중에 사장님이 충주 시내에 가서 전화기를 사라고 알려주긴 했는데 충주에 가니까 대리점에서 우리한테는 휴대폰을 안 팔았어요. 보통 한국 사람들은 요금제로 매달 자동으로 돈 내는 거 쓰는데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 쓰면 힘들다고 하면서 전화기를 아예 안 팔았어요.

숙소는 그냥 괜찮았어요. 컨테이너지만 깔끔한 컨테이너, 안에 욕실은 있었고 화장실은 바깥에 있었지만 괜찮았어요. 기숙사에 처음에 가니까 세탁기만 하나 있고 물건이 하나도 없어서 모두 다 새로 필요했어요. 사장님은 아무 신경도 안 썼고 근처에 사장님 친구가 우리한테 잘 대해 주고 필요한 거, 옷장이나 이런 걸 구해 줬어요. 처음 왔을 때는 인터넷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캄보디아의 시골 마을에서 대도시 프놈펜을 거쳐 TV 속에 나오는 잘 사는 나라 한국에 온 스레이나, 그녀가 처음 만난 한국은 캄보디아의 고향 시골 마을보다 더 외진 곳이었다. 비닐하우스와 농장과 밭으로 둘러싸인 충주의 어느 농촌 마을에서 만난 한국은 TV 속의 한국과는 사뭇 달랐다. 스마트폰이 일상적이던 2012년, 평화로워 보이는 한국 농촌 어느 한 귀퉁이에서 말할 곳도, 연락할 곳도, 갈 곳도 없이 그저 해 떠서 해 질 때까지 쉼 없이 일하는 숨겨진 이주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철저히 고립된 이방인이었다. 논두렁과 밭고랑 사이에 쪼그려 앉아 일하는 새, 이들 청춘의 시간 속에도 거칠고 깊은 고랑이 파이고 있었다.

▲ 한국에 온 스레이나씨가 농장일을 하는 모습
▲ 한국에 온 스레이나씨가 농장일을 하는 모습

노동부에 신고 해봤자 바로 이길 수는 없어요

“한국 와서 처음에 월급이 87만 원쯤 됐어요. 일한 지 6개월쯤 됐을 때 마트에서 다른 데서 일하는 캄보디아 노동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너희는 몇 시간 일하냐고 물어봤어요. 그만큼 일하고 87만 원이면 너무하다고 얘기하면서 자기는 3개월 지나고 나서 바로 110만 원 받는데 너네는 5개월이나 지났는데 그거 잘못된 거 아니냐.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사장님을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노동부에 가서 얘길 했어요. 한국에서는 노동부에 가서 신고를 해봤자 바로 이길 수는 없어요.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노동부에 갔었는데 그때마다 노동부에서는 자꾸 사장님이랑 화해하라고 자꾸 그렇게만 얘기했어요. 같이 일하던 캄보디아 사람 중에 라비라는 여성 노동자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삐다오 씨를 알고 있었어요.(삐다오 씨는 당시 지구인의 정류장과 수원이주민센터에서 활동을 했음)

삐다오 씨한테 우리 얘기를 했더니 그럴 때는 노동 시간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증거를 남겨야 한다고 알려줬어요. 삐다오 씨가 또 얘기를 해줘서 여기, 지구인의 정류장에 왔어요. 4명이 같이 와서 김이찬 선생님한테 상담을 두 번 정도 했어요. 선생님이 그때마다 지금 도망치면 안 되고 돌아가서 비디오든지 뭐든지 증거를 찍어오라고 했어요. 일한 시간을 적어서 체크하고 비디오라도 찍어 놓아야 한다고, 노동시간 기록이 없으면 지금 상황만으로는 증거가 부족할 거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단 돌아갔어요. 어쨌든 계속 노동부에 진정 넣고 신고하고 그래서 결국 한 달에 110만 원을 받았어요.”

스레이나 씨처럼 농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제조업 노동자들과는 달리 근로기준법 63조(적용의 제외) 규정에 의해 근로기준법에 명시되어 있는 근로시간, 휴게와 휴일에 관한 기본적인 보장을 받지 못한다. 

1일 8시간 근무, 1주일 40시간 근무 규정에서도 제외되어 심지어는 한 달 근로 시간이 300시간이 넘는 경우도 있고, 시간 외 근무에 대한 초과수당을 받지도 못한다. 수많은 농업 종사 이주노동자들은 한 달에 겨우 하루나 이틀을 쉬고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다. 게다가 어떤 사업주들은 초과근로 수당은 고사하고 초과근로 시간에 대한 최저임금조차 주지 않은 채 60시간을 일하건 70시간을 일하건 주 40시간 기준의 최저임금만을 지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근로기준법 63조는 그야말로 이주노동자들의 노예노동을 합법화하는 노예노동법이 되고 있다. 땅은 정직하다. 땀 흘리고 수고한 만큼의 결실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땀 흘린 자에게 돌아갈 땅의 선물을 가로챈다. 약자의 희생으로 돌아온 풍요는 더 이상 자연의 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매일 내 앞에 차려지는 밥상 속에 누군가의 눈물과 한숨이 묻어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을 편하고 감사하게 먹을 수 있을까?

“한 번은 그 농장에서 사장님이 일하는 시간을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에서 6시부터 7시까지로 바꿨어요. 사장님 말은 겨울에는 일이 적어서 아침 9시에 시작해서 5시에 끝나니까 그때 일 안 하는 시간만큼 지금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그대로 일했어요. 

10월 중순이 되니까 시골이라 어둡고 추워요. 그때는 그럼 사장님 말대로 9시 시작해서 5시에 끝나야 하는데 그때도 6시에서 7시까지 똑같이 일했어요. 우리가 왜 그러냐고 항의를 하니까 다시 6시부터 6시까지만 일하는 거로 시간을 깎아준다고 깎았어요.

결국 노동부에 또 진정을 했어요. 퇴직금은 받아야 되니까 1년은 채워서 일을 하고 마지막 달에 사장님한테 항의를 했어요. 우리한테 105만 원, 110만 원 주는데 원래는 120만 원은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어요. 다른 노동자는 120만 원을 받는다는 걸 들었다고 말했어요. 사장님은 1년 일한 사람은 105만 원 주는 거라고 노동부에서 얘길 했대요. 105만 원이 맞다고 사장님은 계속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그 뒤로 우리는 일 못하겠다고 하고 그런 거 다 비디오도 찍었어요.

우리는 진짜 추석에도 하루도 못 쉬고 일을 했어요. 가끔이긴 했지만, 저녁 8시까지 일을 한 적도 있었어요. 한 번은 사장님이 남자 노동자 두 명한테 일 끝난 저녁에 야채를 마트에 갖다 주라고 시켰어요. 늦게까지 일을 시키면 꼭 증거를 남기라고 들은 게 있으니까 8시도 더 넘게까지 왜 일을 시키냐고 항의를 하며 녹음을 했어요. 이렇게 항의를 하니 사장 동생이 와서 노동자들을 때리려고 하고 막 욕하고 무섭게 했어요. 그때는 사진을 찍지는 않았고 그 다음날 캄보디아 노동자 4명이 짐을 싸서 나와 버렸어요.

무작정 나와서 충주 버스터미널에서 버스 타고 안산에 와서 지구인의 정류장 쉼터에 새벽 두 시에 도착했어요. 지구인의 정류장 쉼터가 집처럼 생겨서 어딘지 못 찾고 뱅뱅 돌다가 두 시에 온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참 웃긴 게요. 노동부에 진정 하자마자 3일 만에 사장님이 회사 바꾸는 거 허락했어요. 그때 다 같이 진정을 했거든요. 증거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장이 겁을 먹은 거죠. 

2013년 4월이네요. 지구인의 정류장 쉼터에 온 날이요. 한국 온 지 1년 막 지났을 때니까요. 그 뒤에 6월까지 잠깐 아르바이트하면서 지내다가 생극에 있는 버섯농장에 가서 월급 105만 원 받고 6개월 정도 일하고 또 나왔어요. 일한 거에 비해서 월급이 너무 적어서요. 그 뒤에 또 다른 농장 가서 3개월 있었는데 또 문제가 생겨서 다시 쉼터에 두 달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양평 농장에 가서 비자가 끝날 때까지 일했어요.”

캄보디아 사람인 내가 있으면 캄보디아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더 잘 할 수 있어요

“처음에 농장에서 무작정 나온 뒤부터 크메르노동권협회를 알게 돼서 관계를 맺고 같이 일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가장 중요한 일들은 협회 일이에요.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아주 많은 문제를 겪고 있고 어려워하는 것을 봤어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거 보면서 내 마음에 어떤 감정이 생겼어요. 나도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도와줘야 한다는 그런 마음이 생겼어요. 나한테 꼭 어떤 결과가 돌아오는 게 없더라도 일단 도와주는 게 기쁘다, 즐겁다, 이런 마음.

김이찬 선생님은 한국 사람이고 나는 캄보디아 사람이에요. 한국 선생님 있지만, 캄보디아 사람인 내가 있으면 캄보디아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더 잘 할 수 있어요.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증거 자료를 모으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설명해 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중요해요.”

▲ 스레이나씨가 세계이주민의날 행사에 참여해 피켓을 들고 있다.
▲ 스레이나씨가 세계이주민의날 행사에 참여해 피켓을 들고 있다.

스레이나 씨는 E-9 비자 기간이 만료된 뒤 캄보디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번에는 E-9 비자가 아닌 D-4 비자를 쥔 채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D-4, 학생 비자. 지금은 공부하러 와 있어요. 성공회대학교에서 한국어 공부하고 있어요. 공부하는 거 다 좋아요. 다 괜찮아요. 3개월마다 비자 연장하고 있어요. 이제 한국 온 지 5년 2개월인데 전에 노동자일 때는 사실 한국어로 한국 사람이랑 얘기할 시간도 별로 없었고 여러 가지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시시콜콜 얘기할 기회도 없고 얘기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학생으로 있으니까, 지금은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게 답답해요. 한국말을 잘하고 싶어요. 협회나 노동자들의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하는데 한국말이 잘 안되니까 어려운 게 많아요. 과연 내가 이 일을 할 만큼 역량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나한테 어떤 능력이 있든 없든 이 일을 하고 싶고 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어요.”

이주노동자에서 유학생이 된 스레이나 씨, 한국은 그녀의 신분을 체류허가인 비자에 묶어 놓으려 한다. 그러나 비자 속의 알파벳과 숫자는 그녀의 마음마저 묶어 놓지는 못했다. 유학생 스레이나는 노동자였던 스레이나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일하고 공부한다. 노동자인 친구들 곁에서 노동자로서 그들과 한 목소리를 내고 크메르노동권협회의 회장이라는 역할을 맡아 기꺼이 그들을 돕는다.

그녀의 고뇌와 보람, 기쁨과 슬픔, 수많은 만남의 의미, 이 모든 다층적인 삶의 결 속에 새겨진 이야기들은 한 줄 비자 타입 안에는 없다. 어느 누구의 삶도 허가 받고 허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삶이란 누군가에게 허가 받은 대로만 살아야 하는 것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오롯이 지금 여기에서 미지의 세계를 더듬듯 자기 삶의 여정을 걸어 나갈 수 있을 뿐이다.

매일매일 내가 혼자라고 느껴요

스레이나 씨에게 5년 뒤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를 물었다.

“사실 지금은 아무 생각 안 나요.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요. 매일매일 나는 내가 혼자라고 느껴요. 여기 한국 선생님도 있고 부모님도 계시지만 제 마음에서는 항상 나는 혼자라고 느껴요. 미래는 생각 안 해요. 결혼도 안 했어요. 이 반지는 그냥 내가 사서 낀 거예요. 결혼 안 해도 그냥 끼는 사람 많아요.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할 거예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알고 가족들에 대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결혼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동안 벌었던 돈은 다 고향에 보냈어요. 지금은 학생 비자니까 돈을 별로 보내지 않아요. 고향에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이 있는데 깔끔하게 새로 지은 집이에요. 그 집은 제가 번 돈으로 다 지었어요. 한국 오기 직전부터 짓기 시작했고 한국 와서 보낸 돈으로 다 완성했으니까 온전히 제가 지은 집이에요. 

그래도 집 서류나 등기 이런 거, 소유 등록 같은 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몰라요. 소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내 동생들, 내 동생들도 믿어요. 동생들이 ‘이 집은 내 거야’ 절대로 그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캄보디아에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그런 거 어떻게 해도 다 괜찮아요.”

‘나는 혼자’라는 스레이나 씨는 가족을 위한 책임의 자리, 한국 땅에서 어려움을 겪는 다른 캄보디아 노동자들을 위한 책임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혼자’인 그녀는 언제나 ‘함께’의 세상을 만들어 왔다. 홀로 삶의 굽이굽이에 도사린 역경을 이겨내 온 그녀의 손, 그녀의 손에 끼워진 작고 빛나는 반지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당당히 스스로의 삶을 만들고 살아낸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을까? 그녀는 그 손으로 지금도 바지런히 크메르노동권협회를 꾸려가고 이끌어 가고 있었다.

잊지 마세요! 쑤쑤!

“제가 생각할 때 요즘에 오는 많은 캄보디아 노동자들은 캄보디아에서 별로 심각하고 힘든 일을 안 겪어 보고 한국에 와요. 저랑은 다르게 큰 어려움 없이 그냥 학교 마치고 오니까 한국에 가면 행복하겠지, 즐겁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오기도 해요.

그런데 진짜로 와서 보면 장애물을 굉장히 많이 만나게 되는 거죠. 실제로 일이나 상황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더라도 노동자 스스로 힘들게 느끼는 경우도 있는 거 같아요. 아마 그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더 힘들게 느끼는 거겠죠.

물론 진짜 힘든 일도 많아요.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살 때 사회적으로 힘들게 만드는 것도 많고요. 누구나 마음에는 이런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을 수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강해요. 마음을 강하게!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요.

남성 노동자든 여성 노동자든 상관없이 좀 굉장히 ‘쑤쑤(파이팅)’해야 해요. 자기 삶에 대해서 좀 더 힘을 내야 해요. 우리는 살면서 어떤 종류의 비에스나(운명)를 만날 수 있어요. 어떤 운명이라도 해법이 있을 거예요. 사람마다 상황이 많이 다르고 당연히 살다 보면 어떤 문제를 만날 수가 있는데 이제 어떤 걸 만나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해요. 여성은 더 어려울 수 있지만, 여성도 힘을 내면 이겨낼 수 있어요. 우리가 같이 하면 더 잘 이겨낼 수 있어요. 우리는 힘을 내야 해요. 힘을 낼 수 있고 해결할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쑤쑤!”

얘기가 끝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잠시 머무는 이곳, 낯선 한국 땅의 낯선 쉼터. 하지만 어딘가 낯선 듯 익숙한 이야기. “쑤쑤!”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등을, 어깨를 감싸 안았다. 스레이나 씨의 단단한 어깨에서 느껴지는 결기, 그 단단함이 외려 부드럽고 따스하게 다가왔다. 담담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의 당당하고 여문 모습, 운명을 끌어안되 그 운명에 무릎 꿇지 않고 함께하는 이들을 모으며 변화의 길을 찾아가는 그녀의 용기가 빛나 보였다.

※ 담 기획단이 발간한 서적 ‘담을 허물다’를 구매하실 분은 기획단 이메일 rotefarhe@hanmaila.net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이 인터뷰는 크메르어와 한국어로 진행되었고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님께서 통역해주었다.

* 크메르노동권협회

크메르노동권협회는 2013년 1월 20일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96명이 모여 결성한 단체이다. 안산에서 이주노동자 미디어 운동과 노동 상담, 쉼터 운영을 해 오던 지구인의 정류장의 활동을 바탕으로 모이게 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이주노동자 자치단체로 선거를 통해 대표단을 선출하고 상담, 문화,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한 활동뿐 아니라 캄보디아 내의 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폭력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현재 크메르노동권협회의 회원은 700여 명이며 지구인의 정류장이 운영하던 쉼터도 크메르노동권협회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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