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1987’은 1987년의 절반만 보여준다. 1987년을 1월부터 6월로 제한하면서 ‘6월항쟁’의 그늘을 가리고 밝은 면만 부각한다. ‘1987’의 많은 장점과 의미를 담은 영화평이 개봉 전부터 쏟아졌다. 동의할 수 있는 다수의견이다.

물론 1987년 1월 박종철에서 시작해서 6월 이한열로 마무리되는 ‘6월항쟁’이나 그 과정에서의 희생이 헛되다는 뜻은 아니다. ‘6월항쟁’으로 얻어 낸 대통령직선제는 당시로선 의미 있는 진보였다. 권력구조를 바꿔 낸 혁명적 운동이다. 반세기 대한민국 도약의 두 축을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라 한다면 ‘6월항쟁’의 기억은 전자가 후자를 압도한 경험이다. 영화에선 박처장(김윤석 분)으로 대표되는 ‘악’을 최검사(하정우 분), 윤기자(이희준 분), 한병용 교도관(유해진 분) 등이 맞서는 구도로 표현된다.

▲ 영화 '1987' 한 장면. 윤기자(이희준, 왼쪽)와 최검사(하정우)
▲ 영화 '1987' 한 장면. 윤기자(이희준, 왼쪽)와 최검사(하정우)

30년이 흘렀지만 6월항쟁과 그로 얻은 현행 헌법에 대한 재평가는 부족하다. 여전히 ‘추억할만한 소재’ 정도로만 남아있다. 철저한 고증으로 당시를 재현한 영화 ‘1987’은 역설적으로 87년을 바라보는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7’이 그린 시기는 386(80년대 학번, 60년대 생)으로 불리며 한국사회 전면에 등장한 서울 중심·대학생 운동권·중산층 넥타이부대 등으로 대변되는 이들의 시간이다. 87년을 6개월의 투쟁으로 가둘 때 가장 빛을 보는 이들은 누군가? 현재를 지배하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가? 영화는 원래 12월로 예정된 대선을 고려해 개봉날짜를 정하려 했다. 정치를 담은 영화는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 영화는 많은 평론가에게 ‘주인공이 딱히 없는 게 장점’이라고 평가받는다. 다수가 각자의 위치에서 싸웠고 그 노력들이 모여 직선제를 쟁취한 게 주인공 없는 이 영화와 닮았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비중 있는 인물 중 검사·기자·대학생 등 당시 기득권이 아닌 사람은 없다. 몇몇 엘리트들이 직선제를 쟁취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는 이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운동권 세대’는 강동원(이한열 역할)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특히 강동원의 등장과 죽음 장면을 보면 민주화 세력의 나르시시즘이 이 영화의 중요한 정서라는 걸 읽을 수 있다.

87년 6월의 배경

6월항쟁을 전후로 좀 더 확대하면 배경과 한계가 보인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불만을 가시적으로 확인한 건 1985년 2월12일 제12대 총선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는 민주한국당이라는 어용야당을 만들고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맞서려면 여야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우당(友黨)’이라 불렀다. 하지만 군사독재의 폭압 속에 2월 총선에서 ‘우당’이 몰락하고, 선명야당인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우뚝 섰다. 여당인 민정당보다 야당들의 득표수가 더 많았다.

80년 광주 이후 첫 해방공간이라고 평가받는 1986년 인천5·3민주항쟁을 87년 6·10항쟁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의 열망은 86년 3월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을 돌던 신민당 개헌현판식에서 터졌다. 5월3일 인천대회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를 앞두고 4월30일 여야영수회담을 진행해 전두환은 ‘개헌을 허용하겠다’고,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과격 운동 세력과 손을 떼겠다’고 약속했다. 제도권 야당의 운동세력을 향한 속내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건이다.

당시 5·3의 요구는 군부 퇴진을 넘어섰다. ‘민주화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왜 근본적 사회 변혁이 필요한가’, ‘내 일터가 얼마나 처참한가’ 등은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들이다. 5·3 이후 군부정권의 탄압은 거세졌다. 6월항쟁을 기억하는 이들 중에는 5·3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도 많다. 5.3에서 나온 질문도 소멸했다.

같은해 6월6일, 부천경찰서 문귀동 형사는 5·3 관련자의 행방을 물으며 서울대학생 권인숙(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을 성고문했다. 권인숙은 이 사실을 폭로했고, 경찰은 이를 은폐했다. 당시 안기부를 배후에 둔 경찰 위세에 밀린 검찰은 가해자를 불기소처분하며 처벌하지 않았다. 여성인권 담론 역시 87년 6월항쟁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성고문 사건 뿐 아니라 5공 내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검찰로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을 제압할 기회이기도 했다.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가 1986년 9월 ‘말’지에 부당한 권력이 내린 ‘보도지침’을 폭로한 것도 언론통제 분위기에 흠집을 낸 일이다. 87년 1월15일자 중앙일보의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특종 보도와 이어지는 동아일보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관련 보도들은 ‘보도지침 폭로’와 무관하지 않다.

87년 4월13일 전두환은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당시 헌법을 지키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여전히 사회는 엄혹했고, 전두환 일당은 자신들의 힘을 신뢰한 것이다. 같은해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3명 더 있다’는 경찰의 은폐·조작 사실을 밝히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86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쏠리는 국제사회의 관심은 정부의 폭력성을 일정 부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 유시민 작가는 ‘알쓸신잡2’에서 우스갯소리로 “올림픽을 앞두고 서머타임(표준시를 1시간 앞당기는 제도) 덕에 퇴근하고 데모할 시간이 많았다”고 말했다. 6월항쟁의 토대는 영화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두텁다.

반쪽짜리 승리, 남은 과제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 결과적으로 반쪽짜리 승리다. 해방공간은 6월로 끝났다.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역사에서 배제됐다. 8·9월 두 달간 발생한 노동쟁의는 3200여건, 하루 평균 44건을 기록했다. 86년 5·3 인천에서 노동자들이 외쳤던 요구와 비슷했다.

진실을 파헤친 영웅으로 1987이 기록한 언론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기회주의적으로나마 반독재를 외치던 언론은 다시 보신주의로 돌아왔다.

1987년 7월30일자 동아일보의 한 기사 제목은 “노사분규급증…생산활동 위축”이었다. 당시 대다수 기사가 비슷한 톤을 보였다.

▲ 1987년 7월30일 노동자들의 투쟁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 1987년 7월30일 노동자들의 투쟁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해당 기사에는 ‘“너무 많은 요구 큰부담” 기업주’와 ‘일부선 민주화 역기능 우려 여론도’라는 소제목이 달렸다.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식상한 것들이다. 이날 동아일보는 “대다수 분규는 △임금인상 △체불임금지급 △근로조건개선 등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어용노조퇴진 △노조결성방해중단 등을 요구하는 조직분규 성격의 분쟁도 10여건에 이른다”고 전했다.

야당 역시 노동자대투쟁에 비판적이었다.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긴 커녕 오히려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했다. 중산층 역시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서 거리를 뒀다. 그들이 6월항쟁에서 얻은 성과가 훼손될까 우려해 거리를 두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노동자의 요구가 묵살되고 노조에 대한 혐오분위기는 한 세대가 흘렀지만 지속되고 있다. 2018년 새해에도 여전히 하늘에 올라 노동권을 외치는 노동자들이 있다.

6월항쟁은 직선제 쟁취라는 성과가 있었으니 그렇지 못한 과거들이 다소 배제될 수 있다는 관점은 비민주적이다. 사건으로만 보면 3·1운동도, 5·18도, 전태일의 분신도 당장 혁명적인 성과를 내진 못했다.

영화 마지막에도 등장하는 장면. 87년 7월9일 고 이한열 열사 추모식에서 문익환 목사의 연설은 “전태일 열사여”로 시작해서 “이한열 열사여”로 끝난다. 평범하지만 주인으로 살고자 외치며 목숨을 잃은 이들에겐 우열이 없다. 노동자, 여성, 대학생의 구분이 없고 투쟁의 종류나 방법의 차별도 없다.

1987년 헌법은 한계에 다다랐다. 가혹하게 평가하면 직선제를 제외하면 후퇴한 측면도 있다. 전두환·노태우 측과 김대중 측, 김영삼 측 여야 대표 8인이 모여 새 헌법안에 대해 협상을 진행했다. 국민의 직접적인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6·29는 속이구’라는 말도 나돌았다. 6·29 선언에는 김대중 사면복권이 포함됐다.

당시 민정당 여론조사 담당 김종인씨는 지난해 7월 SBS와 인터뷰에서 “노태우 당 대표에게 ‘직선제 해도 대통령이 될 테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라는 얘기를 내가 많이 했죠. 내가 그때 여론조사를 담당하고 있을 때인데 1노3김 대입해도 노태우 씨가 38% 안에서 당선이 되게 돼있어요”라고 말했다. 군부의 선거 전략에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이 당했다.

대통령 임기가 가장 중요한 논점이었다. 4년 중임제나 7년 단임제 등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다음 대통령 할 사람이 많이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5년 단임으로 합의를 봤고, 전두환은 5년 단임 직선제 개헌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찬했다.

▲ 1987년 12월23일 노태우 대통령 당선 축하연. 사진=정부기록사진집
▲ 1987년 12월23일 노태우 대통령 당선 축하연. 사진=정부기록사진집

유신헌법의 조항들이 부활했다. 군인·공무원 등이 국가에 배상청구를 금지하게 한 국가배상법이 3공화국에서 위헌 결정이 났는데 이 조항이 유신헌법에 헌법으로 들어왔고, 87년 헌법에도 포함됐다. 군인 국가배상 금지법, 공무원노조 금지 등도 포함됐다. 국민은 6월항쟁의 결과물을 만져보지 못했다. 87년 12월16일 제13대 대선은 전두환의 예상대로 노태우가 당선됐다. 직격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은 죽었지만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없었다. 1987년은 ‘1987’의 경험 이상으로 아픈 해였다.

시대가 달라졌다. 거악만 때리면 되는 시대는 갔다. 대통령이 바뀌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만 대통령만 바뀐다고 서민들의 삶이 달라질 수는 없다.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산업화 세대를 예쁘게 그린 영화 ‘국제시장’의 이 명대사는 국제시장이 비판받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1987년도 과거를 팔아 현재를 사는 이들의 손에서 해방시킬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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