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무고·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역고소’를 당할 시 참고할 수 있는 대응방안 안내서가 발간됐다.

한국 여성의 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원 ‘울림’은 여성가족부 후원을 받고 공동 기획·제작한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를 지난 달 30일 발간해 단체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전자파일 형태로 무료로 배포 중이다.

▲ 한국 여성의 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원 ‘울림’이 지난 11월30일 발간한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표지.
▲ 한국 여성의 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원 ‘울림’이 지난 11월30일 발간한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표지.

안내서 제작자들은 책자에 대해 “실제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성폭력 가해자들이 ‘일단 하고 보는’ 역고소의 과정 및 이를 어떻게 분별 있게 감지해야 하는지, 어떠한 역고소에 휘말리더라도 스스로가 당당한 피해자임을 잊지 말고 힘을 낼 것을 말하기 위해 썼다”며 “피해자를 지원하는 상담소와 병원 등 관련 기관들, 경찰과 검찰, 법원, 언론,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 주변인인 우리 모두에게 이 안내서가 길잡이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성폭력 역고소는 성폭력 가해자가 피소 이후 피해자를 무고죄로 고소하거나, 피해자의 고소 여부와 상관없이 피해자를 명예훼손·모욕·위증 혐의 등으로 고소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뜻한다.

제작자들은 역고소가 근래 ‘가해자들의 행동지침으로 유포되고 있다’는 지적을 내놨다.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 규정이 폐지되면서 성폭력 가해자 입장에서 처벌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진 것과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다. 친고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범죄다.

이들은 “성폭력 무고에 관한 논란은 실제 있지도 않은 성폭력 피해를 허위로 신고하는 여성의 수가 너무 많아서라기보다는 △성폭력이 이전처럼 더 이상 개인적 합의 수준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 △엄벌주의에 대한 불안 △여성에 대한 성적 통제와 위협이라는 남성우위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두려움에 기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책자에 따르면 사회적 편견에 기댄 수사기관의 부실수사, 성급한 처분 등은 무고 논란을 강화하는 주 요인이다. 한국 수사기관이 “‘허위신고’와 ‘성폭력이 일어났음을 증명하는데 실패한 수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지적으로, “성폭력 사건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신고자의 호소가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뜻이다.

제작자들은 국제경찰장협회(IACP)의 성폭력 사건 수사 지침을 들며 ‘수사기관의 적극적 증명 책임’을 강조했다. 국제경찰장협회는 △철저하고 완벽한 수사를 마쳐야 할 것(수사관 심증·불신·짐작에 따른 예단 지양) △무혐의 입증에 대해 물증을 제시할 것 △허위신고 판단 시 피해자 반응·행동에 의존하지 않을 것 등을 지침으로 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증거제시 없이 성폭력 피해자를 무고의 피의자로 기소하는 일 자체가 차단”될 수 있다.

▲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내지 캡쳐.
▲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내지 캡쳐.

수사과정에서 수사관의 편견이 반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고소 피해자 사례를 종합하면 수사관들은 가해자로부터 “서로 사랑했다”, “썸타는 사이였다” 등의 진술을 듣고 피해자에게 정말 사귀는 사이였는지, 성폭력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었는지 등을 물은 뒤 피해자의 반응에 관심을 둔다. “계속되는 질문에 기억이 흩어진 피해자는 당황하며, 확신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다시 의혹의 대상이 되는” 흐름이 만들어진다는 지적이다.

안내서는 이에 따라 ‘증거 확보’, ‘수사관 인권 침해 대응’, ‘일관된 진술을 위한 작업’, ‘법률 자문’ 등을 대응방안 골자로 제시했다. 필요한 증거 확보의 경우 녹음·캡쳐·기록의 생활화를 강조했다. 물리적 폭력이나 강간의 경우 각종 진료 및 상담기록, 증거물 등을 확보하고, 그 외 성폭력의 경우에도 △카드내역 및 통화내역 △문자메시지·이메일·채팅 내역 △사건 정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물적·인적 증거를 확보할 것을 제시했다.

안내서엔 수사관 인권 침해와 관련해 ‘수사 절차 시 2차 피해 체크리스트’ 예시 9개 항목이 적혀 있다. △평소 품행, 평판, 직업, 성관계 이력 등 사건과 무관한 질문을 받았는지 △충분히 반항했는지를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여러 차례 질문했는지 △비난조의 질문을 받았는지 등 체크리스트에 해당되는 사항을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수사관에 문제를 제기하라는 지침이다.

안내서는 피해자가 “초기진술 당시 기억이 뒤죽박죽이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럴 경우 진술의 일관성이 흔들려 수사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안내서는 △사건 발생 후 최소한 이틀 정도는 휴식 및 정리시간을 가질 것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를 충분히 수사관에게 전달하고 기억나는 한도 내에서 핵심 내용만 진술할 것 △모든 진술조사 시 진술내용을 메모할 것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질문에는 모른다고 답할 것 △수사관 조사에 일희일비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말 것 등을 제시했다.

법률 상담은 신고 전 단계부터 받을 필요가 있다. 안내서는 “법률상담을 통해 피해사실이 어떤 범죄에 해당하고, 범죄 구성요건은 무엇인지, 소송의 쟁점은 무엇인지, 증거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소송 진행 과정과 소요되는 시간 및 비용은 어느 정도인지, 가해자가 어떤 방법으로 대응해올 것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료법률상담은 전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위기센터, 대한법률구조공단, 대한변호사협회 소속 지방변호사회 등에서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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