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발생한 이후 피해자 뿐 아니라 피해자를 도운 직원에 대해서도 회사가 불리한 조치를 해선 안 된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지난 1998년 대법원에서 최초로 성희롱을 불법행위로 규정(서울대 신아무개 교수가 계약직 조교를 성희롱한 사건)한 이후 20여 년 만이다. 성희롱 사건이 개인 간 일탈행위를 넘어 조직 내 권력문제라는 걸 인정한 셈이라 이번 판결을 환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대법원 재판부는 지난 22일 르노삼성자동차 직원 A씨가 르노삼성자동차를 상대로 낸 직장 내 성희롱 불리한 조치 등에 관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A씨가 이긴 부분에 대해서는 그대로 인정했고, 회사 측이 이긴 부분에 대해서는 A씨의 손을 들어주는 취지로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했다.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은 2012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A씨는 자신의 1차 근무평정권한을 가지고 있는 직속 상사인 최아무개 부장에게 1년 간 성희롱을 당했고, 이를 회사에 알렸지만 가해자는 정직 2주 등의 가벼운 징계만 받았다. 이후 A씨는 조직적인 따돌림, 업무배제, 각종 징계를 받았고, A씨를 향한 악의적인 소문이 사내에 퍼졌다. A씨를 도와준 회사동료 B씨도 징계를 받았다. A씨는 가해자인 최 부장과 부서 담당 이사, 인사팀장, 르노삼성 등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2014년 12월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가해자에 대한 성희롱 행위만 불법행위로 인정했고, 다른 피고들의 죄는 묻지 않았다. 가해자와 부서 담당 이사는 1심 이후 회사를 떠났다. 1년 뒤인 2015년 12월18일 서울고등법원은 회사 책임 일부를 인정했다.

▲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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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성희롱의 사용자 책임에 대해 “상급자가 그 부하직원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을 한 경우 그 자체로 직무위반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피고(르노삼성)는 사용자 책임을 부정했던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을 토대로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성희롱 예방 의무 도입 전 판결”이라며 적용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성희롱 이후 이어진 불리한 조치에 대해 △전문 업무에서 배제 △A씨 견책 징계처분 △조력자(A씨의 후배) 정직징계 △A씨 직무정지·대기발령 등 크게 4가지를 다퉜다. 재판부는 이 중 첫 번째에 대해서만 사용자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또한 인사팀에서 A씨에게 불리한 소문을 유포한 것과 관련해 비밀유지의무를 위반한 것이며 이에 회사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르노삼성은 자신들이 일부 진 부분에 대해 불복했다.

대법원에 사건이 올라간 지 2년 만인 지난 22일 대법원은 A씨의 주장을 모두 인정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2항에 따르면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해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안 된다.

대법원은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한 경우 사업주는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피해를 구제할 의무를 부담하는데도 오히려 불리한 조치나 대우를 하기도 한다”며 “이러한 행위는 피해자가 그 피해를 감내하고 문제를 덮어버리도록 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뿐 아니라 성희롱을 당한 것 이상의 또 다른 정신적 고통을 줄 수 있다”고 언급했다.

대법원은 관련 분쟁이 있을 경우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회사 측의 불리한 조치가 성희롱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사업주에게 증명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2심 재판부는 회사가 A씨에 대한 징계·직무정지·대기발령 등에 대해 사유를 제시했기 때문에 불리한 조치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책위)는 “성희롱을 문제제기하는 순간 많은 피해자가 직·간접적인 보복조치, 불이익 조치에 노출되지만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기업은 그 조치들에 대한 사유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피해자를 배제하기 위해 일을 적게 주면 업무성과가 적다는 이유로 징계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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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피해자는 문제제기 이후 고립되기 마련이다. 르노삼성 사건의 경우에도 다수 동료들이 법정에서 가해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대법원은 “우리 사회에서 직장 내 성희롱의 특수성에 비추어 피해자와 그에게 도움을 준 동료는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갖는 관계에 있을 수 있다. 피해자 등은 동료가 자기 때문에 불리한 조치를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 밖의 근로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돼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거나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봤다.

따라서 대법원은 “사업주가 피해자 등을 도와준 동료에게 부당한 징계처분을 했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사업주가 피해자 등에 대한 보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결했다.

직장 내에서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의 의무도 규정했다. 대법원은 “조사참여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비밀을 엄격하게 지키고 공정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 “조사하면서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면 피해자 등에게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고, 결국 피해자가 성희롱을 신고하는 것조차 단념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자는 조사 참여자에게 비밀유지·공정성 등 의무를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A씨와 공동대책위 등은 지난 2014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상 불리한 조치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르노삼성을 고용노동부에 고소·고발했다. 노동부 업무매뉴얼에 따르면 고소·고발 사건은 2개월 내에 사건을 처리하도록 돼 있지만 르노삼성 건은 아직 기소 여부를 정하지 않았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송옥주·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8년 상반기에 공소시효가 끝난다며 조속한 처리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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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대책위는 대법 판결 직후 “고용노동부와 검찰이 사측을 처벌할 책임이 있음에도 4년 째 판단을 유보하는 등 직무유기를 해왔던 사실에도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라며 “이번 판결이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했지만 오히려 사측으로부터 불이익 조치를 받는 모든 피해자와 조력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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