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적폐청산의 원천, ‘제로 아워’

1945년 5월8일. 베를린에서는 나치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나온다. 이날은 독일이 패배한 날이자 히틀러 독재에서 해방된 날이다. 낡은 세계의 몰락과 새로운 출발이라는 모순 속에서 독일인들은 제로 아워(Zero Hour), 즉 0시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1·2차 대전 이후 30여 년간 이어져 온 참담한 과거와의 역사적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종전 이후 독일이 경제적으로는 물론 도덕적으로도 승리한 역사라고 한다면 그 원동력은 바로 이 단어에 담겨 있다. 베를린의 0시는 조금의 핑계도 대지 않는 완전한 패배를 인정한 전후(戰後) 독일이 이룬 성공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완전히 몰락한 방송을 새롭게 개혁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 독일이 2차대전 이후 공영방송 재건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다룬 문제는 방송 이사회 구성의 문제였다. 독일 방송계도 0시라고 강조한 한스 브레도프의 정신에 따라 독일은 ‘방송의회’라는 지구상 가장 민주적인 지배구조(Governance)를 탄생시켰다. 사진은 독일 방송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한스 브레도프(Hans Bredow)(좌)와 독일 제2공영방송 ZDF 로고.
▲ 독일이 2차대전 이후 공영방송 재건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다룬 문제는 방송 이사회 구성의 문제였다. 독일 방송계도 0시라고 강조한 한스 브레도프의 정신에 따라 독일은 ‘방송의회’라는 지구상 가장 민주적인 지배구조(Governance)를 탄생시켰다. 사진은 독일 방송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한스 브레도프(Hans Bredow)(좌)와 독일 제2공영방송 ZDF 로고.
독일 방송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한스 브레도프(Hans Bredow)가 공영방송 재건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다룬 문제는 바로 방송 이사회 구성의 문제였다. 나치 정권하의 제국방송 사장으로서 방송을 정치권에서 독립시키려다가 파면당했지만 결코 방송 민주화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브레도프. 독일 방송계도 0시라고 강조한 그의 정신에 따라 독일은 ‘방송의회’라는 지구상 가장 민주적인 지배구조(Governance)를 탄생시켰다. 우리의 방송이사회격에 해당하는 이 방송의회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제2공영방송 ZDF는 무려 60명에 달한다. 최근 정치권의 비율을 줄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몇 명이 감소한 숫자다.

우리의 ‘0시’, 시민이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지난해 겨울 광화문의 0시를 경험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시민들은 오랜 동안 쌓여온 이른바 적폐를 걷어내는 함성을 내질렀다. 한국 현대사의 0시가 시작되는 소리였을까.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이 함성 소리에 수구기득권 세력은 만천하에 그 정체를 드러냈다. 그리고 소멸되기 시작했다.

▲ 지난 12월8일 첫 출근하는 최승호 MBC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 12월8일 첫 출근하는 최승호 MBC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방송계에도 0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KBS와 MBC의 구성원들은 장기간 파업을 이끌었고 마침내 이사진이 교체되고 있다. 다큐영화 ‘공범자들’을 만들어 언론계 수구세력의 실체에 상당히 근접하는 날카로운 기자의 눈을 보여준 최승호 피디는 MBC 신임 사장이 되었다. 한때 이 방송사의 주력 시사프로그램인 ‘PD수첩’을 만든 해직 언론인이었던 그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사장에 대한 그것보다 더 크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눈 때문이다. 이 겨울 하얗게 내려 소복소복 쌓이는 감상적인 눈이 아니다. 시민의 부릅뜬 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20여 회에 걸쳐 광화문 인근에서 진행된 시민 문화 파티 돌마고(돌아오라 마봉춘(MBC)·고봉순(KBS))에 참여한 시민들의 눈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호(號)의 패러다임을 생산하는 끝판왕인 이 방송사들을 시청하는 국민의 눈 때문이다.

대대로 이어지는 합리적 지배구조 만들어야

수년간 진행된 사회 대개혁 논쟁에서 독일 시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단절과 출발의 정신, 0시의 정신이 과감하게 반영된 독일 방송의회는 오늘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법으로 방송법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지만 지배구조는 여전히 그 정신 그대로다. 광고를 제한적으로만 허용하고 질 좋은 프로그램만을 고집하는 그 정신 그대로다. 시청료를 분리고지하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부담하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수신료제도 역시 그대로다. UHD 화질 경쟁이 아닌 디지털 다채널 방송으로 콘텐츠 다양화를 실현시키는 모습도 시청료만으로 고급 정보를 제공한다는 그 정신 그대로다. 민주주의 완전체를 실현시키려는 0시의 정신이다.

▲ 지난 12월11일, 방통위가 강규형 KBS 이사에 대한 해임 건의 사전 통지를 함에따라, KBS 정상화에 가닥이 잡히고 있다. 사진은 관련 내용을 전하는 MBC 뉴스 화면. 사진=MBC 보도 화면 갈무리
▲ 지난 12월11일, 방통위가 강규형 KBS 이사에 대한 해임 건의 사전 통지를 함에따라, KBS 정상화에 가닥이 잡히고 있다. 사진은 관련 내용을 전하는 MBC 뉴스 화면. 사진=MBC 보도 화면 갈무리
그래서 중요하다. 서두르지 않고, 이제는 한물간 진영 논리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방송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제도와 프로그램을 고민하는 것 말이다. 이래서 예컨대 방송법 개정 논의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방송사 이사와 사장 선임 구조를 바꾸는 일은 정말 당장 시급한 문제인가. 정치권을 배제하려는 순수한 의도는 방송 전문성과 충돌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야의 정쟁 구도가 방송법 개정 논의를 서두르게 만드는 원인은 아닌가. 방송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모든 것들이 정당한 지위를 얻고 충분히 논의되고 있는가.

독일과 우리의 방송문화와 제도가 100%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베를린 0시와 광화문 0시의 정신은 같다.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들려는 상식적인 진보세력의 함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막강한 합리성의 지배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방송 개혁의 시계는 이제 0시다.

※ 이 칼럼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발행하는 웹진 ‘e-시민과언론’과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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