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가 지난달 8일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을 포함한 국정원 연루 의혹 15개 사건 조사를 마무리했다고 발표한 한 달 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실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을 국정원 댓글 수사 방해에 연루됐다가 자살한 정치호 변호사의 동료라고 소개한 이 고발인은 “그렇게 영혼이 맑고 순수했던 동료는 죽음에 이르고, 거짓과 위선, 더 나아가 책임을 동료나 아랫사람한테 전가해버리는 타락한 간부들은 호가호위하는 현실을 보면서 밤잠을 뒤척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번 적폐청산 TF 조사에서도 이 간부들은 유우성에 대해 수사 착수를 반대했으나 국장이 강권했다고 진술하는 등 아직까지도 나쁜 버릇을 버리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며 “조직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이상 곪고 썩어 터진 것은 하루속히 도려내고,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부끄러운 선배들은 더 발붙이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호소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민변 변호인단으로부터 편지 내용을 전해 들은 유우성씨는 또 한 번 울분을 토했다.

유씨는 “국정원 적폐청산 TF에서 간첩조작 피해자인 나와 동생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고 끝냈을 때 실망감이 너무 컸다”면서 “이번 내부 제보자 고발을 통해 한 점의 의혹 없이 진실이 밝혀지고 더는 간첩이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지지 않기를 간곡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변호인단 김용민 변호사가 7일 오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국정원 내부 고발자로 추정되는 직원이 보낸 편지 내용을 설명했다. 사진=강성원 기자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변호인단 김용민 변호사가 7일 오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국정원 내부 고발자로 추정되는 직원이 보낸 편지 내용을 설명했다. 사진=강성원 기자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관련 내용을 매우 상세히 알고 있는 내부 직원이 답답함을 호소할 정도로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국정원 TF 조사는 부실했음이 드러났다. 간첩조작 피해자들은 아직도 억울해하고 있지만, 이들의 인권을 유린한 숱한 의혹의 진상은 앞으로도 규명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유우성씨 변호인단으로 활동해 온 장경욱 변호사는 국정원 적폐청산 제1과제인 간첩조작 사건마저 이 정도 조사로 끝난다면 국정원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과 가깝다고 지적했다.

장 변호사는 “지금 국정원 개혁위는 대공수사권이 이관되고 대외안보정보원으로 개명하면 국정원이 견제될 거라고 보는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인적 청산 없인 간첩조작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며 “국정원 내부 사업을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고 위법행위가 드러나면 처벌할 수 있는 특별 수사 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지난 15일 장 변호사와 만나 나눈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제보 내용을 봤을 때 내부 고발자는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인물로 보인다.

“이 제보자는 현직 국정원 직원일 것으로 확실시되는 분이다. 증거조작 수사 참여자들의 역할과 직책, 준비 상황까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이 제보자는 익명으로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에 제보할까 생각하다 내부에 책임을 전가 문제가 심각해 바꿔야겠다는 게 우리에게 제보한 동기가 된 것 같다. 내부 직원들의 간첩 조작이 드러났는데도 윗선에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아랫사람에게만 전가하면서 (국정원 댓글 수사 방해 관련) 정치호 변호사(국정원 소속)가 죽음에 이르게 되자 고민하다가 제보한 걸로 보인다. 지금 검찰 수사나 국정원 감찰의 핵심은 제보 내용인데, 이 정도면 누군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거다. 설령 이 제보자를 특정하지 못하더라도 제보의 신빙성은 수사 과정에서 확인하면 검증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남재준 전 원장이 간첩조작 사건 위장사무실도 지시했을 거라고 보나.

“제보 내용에 서천호 국정원 2차장이 위장 사무실에 들렀다고 나오는데 서 차장이 보고했으리라 확신한다. 내부 결재라인이 단장, 국장을 거쳐 2차장까지 다 올라간다. 검찰에서 국정원장에게 압수수색을 통보했을 것이고 압수수색을 어떻게 대비할지 대공수사국 직원들이 기획해 남 전 원장에게 보고했으리라 본다. 제보자 편지에는 직원들이 기획해서 상부 결재를 받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예산을 들여 위장 사무실을 설치한 후 자축연까지 열었다고 나온다. 보고라인상 남 전 원장까지 관여했음을 수사에서 밝혀야 한다. 당장 제보 내용 말고는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도 조사하면 관련 서류와 보고·결재라인이 드러날 수 있다. 지금 댓글 사건도 ‘현안TF’ 관련자들을 조사하면서 남 전 원장의 수사 방해 지시를 밝혀냈는데 간접조작 사건 역시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한다.”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 변호인단 장경욱 변호사.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 변호인단 장경욱 변호사.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국정원 적폐청산 TF의 유우성 사건 조사 결과에 대해 변호인단이 강하게 비판했다.

“적폐청산 TF 조사가 성과가 있었다지만 간첩조작 사건 관련해선 이런(위장 사무실) 일이 벌어진 것조차 몰랐고 제대로 조사한 게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TF에 감찰 직원도 있고 내부 검사도 있다는데 얼마나 형식적인 조사에 그쳤는지 보여준다. 유가려 가혹행위를 비롯해 국정원이 돈다발로 탈북자를 매수하고 중국에서 찍은 사진을 북한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증거를 제출하는 등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는데 고의적인 은폐나 범죄 행위는 없는 것처럼 결론 냈다. 연변에서 찍은 사진을 회령에서 찍었다고 할 정도의 무능함이면 심각하게 징계할 사안이다. 하마터면 사람을 죽일 뻔한 게 아닌가. 국정원 적폐 청산 과제 중 핵심적인 게 간첩조작인데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도 이렇게 조사 못 하면서 국정원 개혁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얼핏 보면 국정원이 검찰까지 농락한 거로 보이나, 간첩사건 땐 검찰이 사실상 국정원과 공모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샀다.

“이 사건도 영화 ‘자백’에 나오듯 유가려가 검사에게 진실을 얘기했다고 한다. 문서 조작이나 유우성의 중국 알리바이를 밝혀 줄 이화 증인을 제대로 수사하면 유가려의 허위 자백은 충분히 깨질 수 있었는데도 검찰은 그러지 않았다. 국정원이 만든 탈북자 진술서도 검사가 직접 불러서 물었으면 탈북자 증인들이 국정원의 조정에 따랐음을 밝힐 수 있었다. 간첩 조작 피해자인 유우성에게 유리한 증거와 상황은 모르쇠하고 국정원이 증거를 왜곡·조작한 것을 검사들은 자기들이 가담하지 않았다면서 무능함을 자인했다. 간첩 조작 흔적을 과실로 검증 못 한 책임밖에 없다지만 수사를 통해 분명 알았을 거라 본다.”

-특히 어떤 점에서 그런 의심이 드나.

“유우성 사건을 담당한 이시원 검사는 유가려가 ‘모두 허위 자백이었다’고 고백하자 ‘그러면 못 도와준다’고 말한 거로 유명하다. 검찰이 국정원의 증거 조작과 인권침해를 미리 예방할 수 있게 수사지휘를 해야 하는데 이문성·이시원 검사는 국정원의 무소불위 권력을 견제하지 못하고 설거지해준 셈이다. 유우성의 통신내역을 보면 유우성이 중국에 있었음이 확인됨에도 검찰은 이를 무시하고 유우성이 북한에 다녀왔다는 범죄 혐의 사실을 확정했다. 우리가 공소장을 그렇게 만들면 안 된다고 통신내역을 요구하고 나서야 공소장을 변경했다. 유우성 출입경 기록도 검찰은 ‘출-입-입-입’으로 나온 진본을 알고 있었다. 2006년 어머니 장례를 위해 중국에서 북으로 ‘출’, 다시 나온 게 ‘입’으로 끝인데 국정원은 유가려에게 강요해 오빠가 북한 보위부로 잡혀갔다는 허위 자백을 받았다. 그리고 검찰이 2심에서 ‘출-입-출-입’으로 나온 가짜 출입경 기록을 내더라. 우린 단순한 전산오류 때문에 ‘출-입-입-입’으로 나온 진본을 알고 있었기에 위조범을 잡을 수 있었다. 검사들이 분명히 진본을 알고도 ‘출-입-출-입’으로 조작된 출입경 기록을 증거로 냈다면 미필적 고의가 있는 거다.”

▲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최승호 연출) 스틸컷.
▲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최승호 연출) 스틸컷.
-최근 발족한 검찰 과거사위원회에 민변 변호인단 김용민 변호사도 포함돼 있는데 거기서도 조사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나.

“증거조작 관련 수사 방해에 국정원 파견 검사까지 가담했다면 국정원이 간첩조작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 검사와 공모해 수사 방해를 했을 개연성도 있다고 본다. 이시원·이문성 검사의 혐의를 덮기 위해 국정원 압수수색도 파견 검사를 동원해 증거인멸 했다는 추정도 가능해 그런 의혹까지 검찰 과거사위에서 조사해 줬으면 좋겠다. 국정원은 비밀주의로 수사와 감찰도 막고있다. 국민의 견제와 감시 안 받겠다면 내부감찰이 중요하고 적폐청산 TF도 하나의 내부감찰인데 권한이 미약하다고 국정원 직원 말만 듣고 용인해서야 되겠나. 지금 국정원 개혁위는 대공수사권이 이관되면 정부 공약이 실행돼 국정원이 견제될 거라고 보는 것 같은데 제대로 인적 청산을 해야 한다. 앞으로 대공수사권이 이관된다고 해도 똑같은 사람들이 증거 수집해서 옛날 식구끼리 넘겨주는 것밖에 안 된다. 과거 악행에 대한 인적청산 없인 국민을 위한 국정원 개혁은 불가능하다.

-결국 대공수사권 이전만으론 간첩조작 사건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쪽으로 귀결된다.

“경찰 공안으로 가더라도 오십보백보라고 본다. 국정원은 지금까진 자기들이 정보를 수집하면 검찰의 지휘를 받아 수사했다. 그걸 이제 경찰과 하는 거랑 뭐가 다르나. 공안 검찰이 제대로 국정원 수사를 지휘해 간첩조작을 막은 사례가 있었나. 국정원의 탈북자 합동신문센터도 계속 하겠다는 것이고 해외에서 북한 식당에 간다면 사찰도 계속 하겠다는 건데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다. 조삼모사식 얘기로 들린다. 검찰이 두 번이나 국정원 압수수색에서 농락당한 것도 개선 방안이 있어야 한다. 국정원이 비밀정보기관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수사조차 못 할 게 아니라 내부 정보망과 비밀로 분류된 것도 비밀 준수 의무를 준수하면서 수사 목적상 언제든지 들여다볼 수 있는 독립 수사 기구가 필요하다. 국회 정보위원회도 의원들이 전문성 없이 감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듣고 브리핑하는 수준이다. 일반 검찰이나 감사원이 하는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 국정원 내부 사업을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고 위법행위가 드러나면 처벌할 수 있는 특별 기구를 둬야 한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재발 방지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공수사권 분리와 대외안보정보원으로 개명하면 국정원이 개혁되는 게 아니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논의와 검·경 수사권 조정 등 함께 개혁할 과제가 많다. 총괄적인 개혁이 이뤄져야 하는데 입법도 지지부진 안 되고 있어 이러다 보면 동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국정원 개혁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우보수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국정원을 정권 보위 도구로 사용하는 악행을 저질러 왔고, 국정원은 그것을 자기 무기 삼아 영향력을 강화해 왔다. 정치권이 남북 적대 관계 속에서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려 한다면 우리 국민은 정권이 교체돼도 여기서 탈출 못 한다. 국보법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 얼마나 심각하게 인권을 제약당하고 있는지 인정해야 한다. 이런 근본적 문제의식을 안 가지면 국정원은 언제든 비밀주의로 들어갈 수 있다. 청와대와 검찰이 모르면 끊임없이 국정원은 정권의 견제를 안 받을 수준, 탈 나지 않을 수준으로 잠복하면서 적응해 계속 수요를 만들어 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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