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신선한 고기’라는 문구와 함께 돼지 그림이 있다. 돼지고기를 이용한 가공식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마크다. 여기에 스마트폰을 대면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살아있는 돼지들이 좁은 공간에서 약물을 맞으며 누워있는 광경이다. 그 외에 토끼들이 동물실험을 당하고 있는 영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주헌 작가의 ‘씻김’(Ssitkim:a litany) 작품 일부다. 이주헌 작가는 동아방송예술대학에서 인터랙티브 미디어(Interactive, 텍스트 외에 그래픽이나 사진, 동영상 등을 통합해 편집한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제작을 강의하고 있다.

▲ 이주헌 작가의 '씻김' 작품 일부. 사진=정민경 기자.
▲ 이주헌 작가의 '씻김' 작품 일부. 사진=정민경 기자.
이주헌 작가의 ‘씻김’은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을 이용한 뉴미디어 아트다. 증강현실을 이용해 예술작품을 만들고, 이를 전시하는 사례는 국내에서는 생소한 시도다.

현재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NMARA Space ‘동재’에서는 이주헌 작가 등 증강현실을 활용한 전시 ‘AR을 활용한 다원예술: Requiem for Hybrid Life: 혼종 생명을 위한 진혼곡’을 감상할 수 있다. (2018년 2월28일까지 전시, 무료)

이주헌 작가는 “우리는 매일 수많은 동물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제품들 속에서 살고 있다”며 “수많은 생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계적으로 살해되지만,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생명체에 대한 작은 위로의 행동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매일 사용하는 식료품의 포장에는 동물들의 초상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려져 있다. 심지어 그들의 죽음으로 얻어진 신체 부위가 신선하고, 깨끗하다고 광고된다. 그들의 품질이 최상급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동물실험 속에서 무고한 희생이 있었는지, 공장형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많은 동물이 기계부품처럼 처리되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이주헌 작가. 사진=정민경 기자.
▲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이주헌 작가. 사진=정민경 기자.
이주헌 작가는 ‘뷰포리아’(Vuforia)라는 소프트웨어 개발 키드(SDK)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뷰포리아는 증강현실 콘텐츠를 쉽게 만들 수 있는 앱이다. 전시장에서도 해당 앱을 깔아야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아직 아이폰에서 뷰포리아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다. 전시장에서는 해당 앱이 깔린 태블릿 PC를 이용해 감상하면 된다.

이 작가는 “증강현실로 보여줄 그래픽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지만, 뷰포리아를 이용해 증강현실을 만드는 것은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다”면서 “관련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처음 3일 정도만 배운다면, 서너 시간이면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관객들이 직접 태블릿 PC나 스마트폰을 들고 작품을 봐야 하는 특징 때문에 보통 전시장과 달리 증강현실 전시장에서는 관객들이 활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작가는 이런 모습 역시 의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강현실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에 또 다른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외에도 관객들의 반응을 끌어 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관객들이 직접 움직이고 증강현실을 보면서 작품이 완성되는 셈이다.”

이 전시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전시를 보고 난 후 관람객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증강현실 스티커다. 이 스티커에 있는 이미지에 뷰포리아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전시장 밖에서도 전시를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인 김경미 NMARA 대표는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전시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인데, 이런 제한을 디지털 기술로 극복해보려고 했다”며 “언제 어디서든 다시 전시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NMARA Space ‘동재’에서는 이주헌 작가 등 증강현실을 활용한 전시 ‘AR을 활용한 다원예술: Requiem for Hybrid Life: 혼종 생명을 위한 진혼곡’을 감상할 수 있다. (2018년 2월28일까지 전시, 무료)
▲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NMARA Space ‘동재’에서는 이주헌 작가 등 증강현실을 활용한 전시 ‘AR을 활용한 다원예술: Requiem for Hybrid Life: 혼종 생명을 위한 진혼곡’을 감상할 수 있다. (2018년 2월28일까지 전시, 무료)
한편 이주헌 작가는 이번 전시 외에도 증강현실을 이용한 전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 세운상가를 주제로 두 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주헌 작가의 개인전은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전시 공간 ‘b Arts’에서 30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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