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죽음은 한 명의 안타까운 희생을 넘어섰다. 지난 1년 동안 방송계 노동환경과 한국 사회의 노동문화·착취구조를 명명백백 드러낸 사건이 됐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헬조선’ 현실에 경각심을 줄 수 있고, 우리 주변에 있는 방송노동자들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고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씨는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는 메시지를 내걸고 있다. CJ E&M에 입사한지 만 1년도 안 된 신입사원이었던 이한빛 PD는 드라마 ‘혼술남녀’ 마지막 방송이 나간 직후인 지난해 10월26일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조연출로 혹독한 노동조건에 놓인 그는 정규직 직원으로서 비정규직 스태프 등에 대해 ‘갑질’할 것을 강요받았다. 유서에 따르면 그는 열악한 노동착취 시스템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 PD는 55일 중 2일 밖에 쉬지 못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팠어요. (중략)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고 이한빛 PD 유서 중)

▲ 고 이한빛 PD. 사단법인 '방송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한 줄기의 빛, 한빛' 산하 '한빛방송노동인권센터'은 오는 1월 설립될 예정이다. 사진=이한솔씨 제공
▲ 고 이한빛 PD. 사단법인 '방송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한 줄기의 빛, 한빛' 산하 '한빛방송노동인권센터'은 오는 1월 설립될 예정이다. 사진=이한솔 제공

고인의 죽음을 잊지 않는 방법은 또 다른 희생자를 막는 것이다. 유족들은 지난 4월 그의 죽음과 관련한 진실을 세상에 폭로했고, CJ E&M에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그리고 지난 6월 회사의 공식 사과를 받아냈다. 유족들은 회사에 위로금이 아닌 기금을 요구했고 이 PD의 이름을 딴 추모법인 ‘방송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한줄기의 빛, 한빛’ 산하에 ‘한빛방송노동인권센터(인권센터)’를 2018년 1월 세울 예정이다.

이씨의 아버지 이용관씨가 법인 이사장과 공동대표를 맡고, 언론노조위원장도 공동대표를 맡게 된다. ‘tvN혼술남녀조연술사망사건대책위’에서 활동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시민단체에서도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오는 1월 유족은 CJ E&M이 합의사항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만날 예정이다. 이씨에 따르면 한정애·신경민 의원실에서 이 문제에 관심이 많다.

이씨는 형의 의지를 계승했다. 지금은 인권센터 창립 준비를 하면서 한겨레21과 함께 스토리펀딩도 진행 중이다. 방송작가유니온, 청년유니온, 전국언론노동조합 등에서 열악한 업계 현실 관련 기고를 보내오고 한겨레21이 영화산업노조 관계자를 인터뷰해 총 9회로 진행할 예정이다. 스토리펀딩 후원금은 인권센터 초기 자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연재 첫 화는 이한솔씨가 작성했다. 이씨는 “청년을 존중하고 우리 노동과 문화를 존중할 수 있길 희망한다”며 “형이 ‘변화의 초석’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썼다. 미디어오늘이 지난 7일 이씨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현재 대학생인 그는 학업과 동시에 인권센터 사무실을 물색 중이다. 이씨는 “DMC를 중심으로 찾고 있다”며 “서울시에도 지원을 요청했는데, 결과는 1월에 나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인권센터가 생기면 수많은 방송노동자들이 찾아와 쉬거나 상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언론노조에 있는 변호사·노무사 분들이 상담할 예정”이라고 전한 뒤 “방송사에서 커버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고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씨가 서울 상암동 CJ E&M 앞에서 1인시위를 진행했다. 사진=이한솔 제공
▲ 고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씨가 서울 상암동 CJ E&M 앞에서 1인시위를 진행했다. 사진=이한솔 제공

인권센터가 등장하기까지 35개 시민사회단체가 유족들을 도와 문제제기에 나섰고, 정권이 교체되면서 ‘갑질’에 대해 비판하는 분위기도 형성됐다. 이씨는 “시민들의 지지가 정말 컸다”며 “청년세대가 열악한 대우를 직접 겪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CJ E&M이 만드는 드라마의 특성도 작용했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그는 “‘혼술남녀’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아이러니 하지 않나. 희망 없는 청년을 위로한다는 드라마였는데”라며 “(청년 주거문제 등을 다룬)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도 우리와 교섭이 마무리되면서 방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CJ E&M은 ‘혼술남녀’ 시즌2를 제작하려고 했지만 이 PD의 사망으로 제작을 중단했고, 최근 시즌2 대신 의학드라마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형의 사망 당시 이씨는 군 복무 중이었다. “답답했어요. CJ E&M 모르게 (방송 노동자들) 인터뷰도 따는 등 (진상에 대해) 조사해야 하잖아요. 회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주로 찾아다녔죠. 시민단체 등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지만 그분들이 가면 (비정규직 등 노동자들이) 쉽게 말을 하지 않죠. 제가 동생이라고 하면 그래도 얘기를 좀 해주셨죠.” 그렇게 6개월을 준비해서 세상에 진실을 폭로했다.

방송사가 저지른 일에 대해 방송사들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지상파·종편·보도매체들 기자들이 취재를 다 하고 나서 국장라인에서 (아이템이) 잘렸다고 (제게) 사과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실제로 방송을 하지 않는 언론사에서만 보도가 나갔죠. 어쨌거나 ‘누워서 침뱉기’라고 보는 것 같아요. ‘다 저러는데 CJ E&M만 공격받을 건 아니다’ 이러니 못내는 거겠죠.”

▲ 페이스북 'tvN 혼술남녀에서 신입조연출이 죽었다' 페이지 게시물
▲ 페이스북 'tvN 혼술남녀에서 신입조연출이 죽었다' 페이지 게시물

그는 형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서울 상암동 CJ E&M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며 수많은 ‘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제보 받은 내용으로 계산했는데 월 평균 4일 쉬더라. 그런데 하루 8시간씩 주6일을 일하는 걸로 보면 안 된다. 노동시간이 보통 하루 평균 19시간이다. 형의 경우도 오전 4시에 집에 와서 오전 6시에 출근한 거 보면 비슷하다. 성폭력 사건도 많았다. 최근에 유행한 드라마에서도 있었다.”

형의 의지를 이어받은 동생의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콘텐츠를 생산하는 경우 프리랜서가 많고, 예술영역이라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근거들이 부족해요. 노동자로 보는 문화도 아닌 것 같고. ‘몇 시간 일할 것인가’라는 개념은 없고 기간에 맞게 돈에 맞게 찍어내야 하니 노동으로 환산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거죠. 방송 종사자들이 제일 많이 말했던 건데요. 카메라 뒤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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