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영화 ‘도둑들’이 나왔다. 낄낄거리고 웃었다. 옆을 돌아보니 창살이 있었고 아래 바닥은 차가웠다. 갇혀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쇼크가 왔다. 갑자기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벌써 4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구치소 생활은 추억이 아닌 끔찍한 기억이다. 어차피 무죄가 날 거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잘 지내보자고 되뇌였다. 밖에 나가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2013년 5월5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저택에 화염병이 날아 들었다. 언론은 테러라고 했다. 언론은 화염병을 던진 방화범의 모습이라며 CCTV 영상을 공개하고 50대 남성이라고 했다. 5월17일 유력한 용의자가 긴급체포됐다. 이름은 임옥현(당시 37세), 직업은 삼성그룹 IT 프로그래머, 통합진보당 당원, 시민사회단체 회원.

언론은 칼춤을 췄다. 대기업에 다니는 진보당 당원 임씨는 테러를 벌인 극악무도한 방화 미수범이 됐다. 체포를 당한 뒤 이틀 만에 영장이 기각됐다. 하지만 경찰은 영장을 재청구했고, 그는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구치소에서 4개월을 살았다. 보석으로 풀려났다. 재판에서 검경이 내세운 CCTV 영상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CCTV 속 인물이 임씨인지, 여러 개의 CCTV에 잡힌 인물이 동일인물인지도 특정할 수 없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CCTV 화면을 휴대폰으로 찍어온 것도 있었다.

임씨의 집안에서 방화의 직접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신발이나 옷가지 등등에서 인화 물질은 한점도 나오지 않았다. 검경은 최첨단 수사기법이라며 걸음걸이 기법으로 임씨가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CCTV 속 인물의 걸음걸이 특성을 분석한 결과 임씨와 같다고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언론은 검경의 과학수사로 원세훈 전 원장 자택 방화미수범을 잡았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재판부는 걸음걸이 수사 기법의 오류를 지적했다.

(관련기사 : 대기업 과장에서 국정원장 테러리스트가 되다)

결국 2014년 4월25일 임씨는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해 8월 2심에서도 무죄를 받았다. 2심에서 검경은 추가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 공판은 3~4차례 열리고 허무하게 끝났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방화범은 죄가 없는 피해자가 됐다. 1심 판결이 나온 이후 언론은 단신 처리를 하거나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한 종편 채널에서 회사를 통해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응하지 않았다. 자신을 방화범으로 만들었던 언론을 믿을 수 없었다.

임씨는 “그때 와서 좋게 써주면 뭐하나 싶었다. 중립적으로 쓴 기사는 거의 없고 테러라는 얘기만 나왔다”며 “모든 사건이 그렇지만 양쪽 이해관계가 있으면 최소한 양쪽의 얘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2심 판결이 나올 때는 언론에 대한 기대를 아예 접었다”고 말했다.

임씨는 긴급체포를 당하고 난 뒤 영장이 기각되고 다음날 출근한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인사팀에서 그를 불렀다. 언론에 실명과 직장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회사에서 방화범 피의자 신분이 돼 있었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자택 방화 사건 1~2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임옥현씨. 그는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자택 방화 사건 1~2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임옥현씨. 그는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임씨는 주로 파견을 나가 타 기업과 프로젝트 단위로 팀을 이뤄 모바일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을 했다. 2013년 11월 구치소에서 나온 뒤 그는 본사로 출퇴근을 했다. 관리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가 보였다. 삼성은 입사했을 때부터 퇴사할 때까지 성적이 수십년 동안 기록에 남는다는 말이 있다. 한번 눈밖에 난 조직에서 ‘성공’은 머나먼 꿈이었다. 사건만 없었으면 계속 다녔겠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임씨는 1심 무죄 선고를 받고 2014년 5월 사표를 던졌다.

퇴사 후 임씨는 청년단체에서 상근직으로 일했다. 연봉 6천만 원, 인센티브를 합치면 8천만 원 가까이 벌었지만 퇴직 후 모아둔 돈은 금세 사라졌다. 경제생활을 해야겠다 싶어서 취업을 하려 했지만 방화미수범이라는 딱지로 어렵겠다 싶었다.

평소 차(茶)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수제차를 만들었다. 제조부터 포장, 유통까지 1인 사업을 시작했다. 큰 손해는 보지 않았지만 벌이도 시원치 않았다. 6개월 만에 사업을 접었다. 지인이 경기도 가평에 펜션을 만든다고 했다.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임씨는 거처를 가평으로 옮겼다. 그는 현재 펜션을 관리 운영하고 있다.

방화 사건 이후 180도 변한 임씨의 삶이다. 그는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무죄 선고가 날 가능성이 높다. 2심 판결 이후 3년이 흘렀지만 대법원은 깜깜무소식이다.

임씨는 “생각보다 왜 이렇게 길어지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넘기기 전, 대법원 선고가 나서 원세훈 전 원장 저택 방화 사건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고 싶다는 게 임씨의 생각이다.

방화 사건 당시 2013년 5월 원세훈 전 원장은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로 코너에 몰렸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고 국정원의 정치개입 행위를 근절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그리고 터진 사건이 화염병 투척 사건이었다. 원세훈 전 원장으로서는 악화된 여론을 돌이켜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건이 터지고 댓글 사건 수사를 압박하는 ‘불순한 세력’이 원세훈 전 원장을 직접 위해하려는 게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임씨는 화염병 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난 원 전 원장의 범죄 행각은 상상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원 전 원장은 민간인 댓글 부대를 운영한 의혹도 받고 있다. 국정원 돈을 유용해 국정원 안가를 고쳐 호화 생활을 하고, 해외공작금 유용 혐의도 받고 있다.

국정원이 검찰에 원 전 원장의 개인비리와 댓글 수사를 놓고 거래를 하려는 정황도 드러났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2014년 4월 댓글 수사 당시 국정원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원 전 원장 개인비리 사건과 병합해 수사하도록 협조하는 것을 전제로 빅딜을 모색해야 한다. 조직적 개입으로 비화되고, 직원들이 연루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국정원에 파견된 검사는 댓글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가짜 사무실을 만드는 등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들을 저질렀다. 같은 시기 국정원은 “잔불 정리를 확실히 할 사람을 후임자로 앉혀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하며 댓글 사건을 수사한 서울 수서경찰서장 후임 인사에 관여한 정황까지 국정원 적폐청산 티에프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댓글 수사를 덮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움직였던 행태들을 보면 원세훈 화염병 방화 사건도 규명돼야할 대상이다.

임씨는 “요즘 나오는 원세훈 관련 뉴스를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댓글 사건을 덮기 위해 저렇게 한 건데 화염병 사건도 조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며 “당시에 구속을 안 시키고도 충분히 재판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증거도 없는데 황당했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구속을 시킬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임씨는 “의혹을 가졌던 게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고 드러난 사건이 얼마나 많나. 제 사건 뿐만 아니라 굳이 말하면 모든 국민들이 댓글 사건으로 인해 크고 작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피해자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임씨는 대법원 선고가 나오면 국가배상 청구를 할 계획이다. 무죄 선고가 나면 형사보상은 신청하면 바로 처리되지만 민사소송인 국가배상 청구는 또 한번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이번 사건으로 억울하게 구금돼 손해를 봤던 금전적 피해와 정신적 피해를 얼마나 인정할 지는 재판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임씨는 구치소 생활 당시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를 전했다.

“까마귀라고 불리는 검정색 옷을 착용하고 있는 보안요원을 대동해 접견실로 가는 죄수를 일명 범털이라고 하는데 제가 접견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가 범털인 원세훈 전 원장과 마주쳐 지나갔다. 원래 사건 관련자하고는 접촉을 못하도록 하는데 우연치 않게 접견실 근처에서 마주쳤다. 마스크를 썼는데 눈빛을 보고 알아보겠더라. 기분이 참 묘했다.”

원세훈 전 원장은 2013년 7월 건설업자로부터 억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당시 원 전 원장은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불구속 기소돼 구속될 위기를 피했지만 개인비리 혐의로 결국 영장이 발부돼 구속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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