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HER, 2013)’와 ‘알파고(ALPHAGO, 2017)’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 말고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약 8100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영화 그녀(HER)에서 AI(인공지능)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 테오도르는 사랑하는 인공지능 사만다의 대답을 듣고 절망한다. 인간과 AI의 차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 영화 '그녀' 중 한 장면.
▲ 영화 '그녀' 중 한 장면.
영화 ‘그녀’는 먼 미래를 배경으로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먼 미래의 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에서 알파고가 이세돌 9단 기사를 4:1로 이긴 것도 지난해 3월에 발생한 일이다.

영화 ‘알파고’는 2016년 벌어졌던 이 둘의 매치와 뒷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구글 딥마인드팀이 알파고에게 바둑을 학습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을 보면 ‘저 기계를 어떻게 사람이 이길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알파고는 최정상들의 바둑 대국 10만 개가 입력돼 있는 AI다. 그 대전을 모두 분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바둑을 둔다. 입력된 데이터뿐 아니라 판 후이 유럽지역 바둑 챔피언 등 세계 바둑 정상들과 실제 대국을 통해 실수를 보완한다. 알파고는 바둑을 두면서 50~60수를 예상한다. 바둑은 10의 170승(乘)이라는 경우의 수를 가졌는데, 알파고는 이 한 수보다 50수 이상의 수를 예상한다. 이러니 알파고가 생각하는 경우의 수는 인간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 영화 '알파고'의 포스터.
▲ 영화 '알파고'의 포스터.
알파고와 시합을 하기 전, 이세돌 기사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아직까지는 사람이 이긴다’고 확신했다. 첫 번째 시합 전 이세돌 기사는 “바둑이라는 게임은 직관이 중요한데, 기계가 인간의 직관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5:0으로 이길 것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세돌 기사는 알파고에게 연속 패했다.

예상과 달리, 이세돌 기사는 4번째 대국에서 처음으로 알파고를 이길 수 있었다. 4번째 대국을 승리로 이끈 78수에 대해 알파고는 ‘이 수를 놓을 확률은 0.007%’라고 분석한다. 이세돌 기사는 인간이라면 보통 놓지 않는 수를 놓고, 알파고는 이 수에 당황해 실수를 연발하며 4국에서 패하게 된다. 하지만 이 기적의 수를 남기고 5국에서 이세돌은 다시 알파고에게 패한다.

▲ 영화 '알파고'의 한 장면.
▲ 영화 '알파고'의 한 장면.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학습을 거듭한 AI 알파고의 능력을 알파고를 만든 장본인들조차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딥마인드팀은 알파고가 놓는 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바둑 챔피언들도 알파고의 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딥마인드 팀은 알파고의 수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고 “사실 우리가 알파고를 평가할 수가 없죠”라고 말한다.

알파고의 수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유는 알파고가 몇십 수를 앞서서 생각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인간은 바둑을 두면서 ‘바둑에서 이기려면 집을 크게 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큰 집을 짓기 위한 수를 둔다. 그러나 알파고는 ‘큰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알파고는 그저 한 집 차이라도 이길 수 있는 수를 둔다. 이것이 알파고와 인간이 두는 수의 차이점이었다. 그래서 알파고는 인간이 애초에 생각하지 못하는 수를 두고, 인간은 그 수를 ‘실수’라고 생각한다.

알파고가 보여준 것은 ‘이미 AI가 인간을 이길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메시지였다. 그것도 인간 중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인간 대표’를 이길 수 있다는 점은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대전을 관람하러 온 이세돌의 딸이 “아직은 기계가 인간을 이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한 말도 그저 희망사항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AI도 인간이 만든 것이니, 인간이 기계한테 진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습을 하는 어느 과정에서 AI는 이미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간다. 딥마인드팀이 알파고가 놓은 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제 실수를 할지 대전 내내 전전긍긍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영화 알파고를 보고 나면 “왜 인간은 인간을 이길 기계를 만들기 위해 저토록 고심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답은 영화 마지막 크레디트에서 찾을 수 있다. 마지막 크레디트에는 “이세돌 기사는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 두 달간 모든 대국에서 승리한다”고 쓰여 있다. 인간을 이기는 기계를 통해, 인간은 절망하지만 결국 더 진화된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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