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의 구조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한 후 국제법정이 열렸습니다. 이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병에게 법정은 책임을 추궁합니다. 그러자 그는 상병이 지시한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상병에게 다시 책임을 추궁합니다. 상병은 대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종국에는 모든 것이 최종 명령권자인 ‘천황’(일왕)의 책임이라고 상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종전 후 효과적으로 일본을 통치할 필요가 있었던 미국은 ‘일왕’을 사면했고, ‘일왕’이 사면된 마당에 그의 지시를 받은 아랫것들에게 책임이 있을 리가 없었지요. 결국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는데,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이 거대한 무책임을 ‘무책임의 구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무책임한 구조에서 진정한 반성이나 사과가 있기는 힘듭니다. 1945년 8월 하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 즉 ‘군부와 공무원, 그리고 민간인들 모두를 포함한 일억 명의 일본인 전부가 하나가 돼 철저한 자기반성과 참회를 해야 한다’는 말은 무책임의 구조에서 나오게 되는 기만의 극치였습니다. 그 일억 명 속에는 재일조선인을 포함해 차별당하고 핍박받은 사람들도 매우 많았을 뿐 아니라,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사실 ‘누구의 책임도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28일 오전 언론노조MBC본부 조합원들이 서울 상암동 MBC사옥 로비에 마련된 벽보에 붙은 사장후보자들에 대한 질문지를 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난달 28일 오전 언론노조MBC본부 조합원들이 서울 상암동 MBC사옥 로비에 마련된 벽보에 붙은 사장후보자들에 대한 질문지를 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더군다나 일본 군부 관료들은 전쟁 책임과 관련한 문서들을 패전 직후부터 파기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집단으로 동등한 전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악랄한 주장, 마루야마의 표현을 빌자면 ‘위험한 상황에 처한 오징어가 먹물을 뿌리는 행동’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 공식적 수준의 총참회(말하자면 오징어의 먹물)는 결국 흐지부지됐습니다.

책임 있는 자에게는 책임 추궁을

이제 곧 공영방송 MBC의 신임사장이 선출될 것입니다. 사장 후보자의 정책설명회를 인터넷에서 생중계로 공개하는, MBC 역사상 최초의 방식으로 선출될 신임사장에게 거는 시청자들과 구성원들의 기대가 큽니다.

▲ 김만진 MBC 콘텐츠제작국 PD
▲ 김만진 MBC 콘텐츠제작국 PD
신임사장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지만, 한 가지만 여기에서 특별히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김장겸 사장 퇴진 이후 MBC의 구성원들, 특히 시사문제를 다루는 보도국 기자들과 시사교양 피디들을 중심으로 지난 몇 년간 MBC가 시청자들에게 행한 잘못된 점들을 반성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이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사장 후보들의 정책설명회에서도 이런 프로그램들을 제작, 방송해서 시청자들의 용서를 구하겠다는 정책들이 발표됐습니다. 말하자면 MBC 외부를 향해 MBC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가 돼 ‘참회’하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의식일 테지요.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MBC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가 돼 외부를 향해 반성하는 일과 함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부의 책임 있는 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과 처벌입니다. 굳이 ‘적폐 청산’이라는 상투어를 쓰지 않더라도, 지난 몇 년간 MBC 구성원들이 살아온 방식이 그 내실에 있어 ‘다 같지 않음’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한 사람 한 사람 다 꼼꼼하게 따져서 단호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정치보복’으로 몰아가고 싶은 사람들 이야기 다 들어주다 ‘무책임의 구조’에 빠져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오면, 시청자들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 로비에서 열린 언론노조MBC본부의 기자회견에서 장준성 교섭쟁의국장이 김장겸 전 사장 등 경영진의 휴대전화 분쇄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 로비에서 열린 언론노조MBC본부의 기자회견에서 장준성 교섭쟁의국장이 김장겸 전 사장 등 경영진의 휴대전화 분쇄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부당노동행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고발당한 MBC 인사들 중 어떤 이는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고 대신 변호사를 만나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합니다. 들리는 말로 그는 ‘나에게 무슨 책임이 있나? 사장이, 그리고 임원들이 시켜서 한 일들이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무엇이 두려운지 업무용으로 회사에서 지급한 핸드폰을 완전히 조각조각 내어 파쇄하고, 문서절단기로 지난 시절의 서류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있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너무 부조화스럽습니다. 패전 직후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된 수동표현은 ‘다마사레타(속았다)’였다고 하는데, 요즘 MBC 안에서 가장 유행하는 수동표현은 ‘강요당했다’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네요.

그래서 신임 사장이 해야 할 일들 중 우선순위의 윗자리에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이 있는 자를 가려내고 또 그중에서도 경중을 가려 따지는 것, 그리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묻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새 출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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