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다발성신경병증, 재생불량성빈혈, 난소암, 유방암, 뇌종양, 림프종, 폐암, 불임.’ 이들 9가지 질병이 전자산업 직업병 목록에 오르기까지 자그만치 10년이 걸렸다. 2007년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23세 사망)의 산재 승인 신청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산재 인정 싸움의 결과다.

이마저도 반올림이 발견한 추정 직업병 30여 개 중 3분의 1에 불과하다. 산재 승인을 받은 피해노동자도 전체 신청자 92명 중 4분의 1이 되지 않는 21명이다.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은 “질병과 업무 간 상당한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산재 승인 요구를 기각해왔다.

그러던 중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 직업병 인정 운동의 ‘전환기’라 칭할 만큼의 진일보한 판례가 나왔다. 대법원 제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지난 8월29일 삼성 LCD 천안공장 노동자였던 이희진씨(33)의 ‘다발성경화증’을 직업병이라 확인했다. 이씨가 1·2심에서 모두 패소한 사건이었다. 재판부는 “업무와 질병 간 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 관점이 아닌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판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11월 한 달 간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뇌종양과 백혈병, 소방공무원의 뇌종양이 법원에서 연달아 직업병으로 인정됐다. 모두 지난 8월 대법원 판결을 인용했다. 반올림 상임활동가 임자운 변호사는 “직업병 인정 범위가 보다 넓어질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했다. 그는 지난 2013년부터 반올림 활동가로 일하며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 직업병 피해노동자들의 산재 인정 소송을 맡아왔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7일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반올림 사무실에서 임 변호사를 만나 지난 10년 간의 산재 인정 투쟁 과정을 들었다.

▲ 반올림 상임활동가 임자운 변호사.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반올림 상임활동가 임자운 변호사.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삼성 반도체 직업병 운동 10년, ‘종합선물세트’ 판례 나오다

그는 대법원 판결을 ‘종합선물세트’라고 불렀다. 지난 10년간 반올림이 지적한 산재 불승인 판단의 문제점들이 종합적으로 논박돼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판결문 처음부터 산재보상법 취지를 정리하고 반도체·LCD 산업 등 직업병 입증이 어려운 첨단산업분야의 특수성을 지적했다.

“첨단산업분야에서는 ‘직업병’에 대한 경험적·이론적 연구결과가 없거나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다. 첨단산업은 발전속도가 매우 빨라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빈번히 바뀌고 화학물질 자체나 작업방식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경우도 많다.”

“산업재해보상보험으로 근로자를 보호할 현실적·규범적 이유가 있다.”

대법원은 이를 전제로 1·2심 판단을 뒤집었다. 1심 재판부는 “화학물질에 일부 노출됐을지라도 질병을 유발시킬 정도라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고, 2심 재판부는 이와 함께 “한국산업안전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에서 역학조사를 실시했으나 평가위원들 의견이 팽팽하게 나뉘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대법원은 다발성경화증이 희귀질환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승인 근거를 밝혔다.

“현재 의학·자연과학 수준에서 발병원인 의심 요인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사업주의 협조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으로 작업환경상 유해요소들의 종류와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었다면 이는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

“여러 유해요소가 존재하는 경우, 개별 유해요인들이 질병의 발병 혹은 악화에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근로복지공단 관점 바꾸라는 법원의 명령”

“대법원 판결은 근로복지공단으로 하여금 산재보상 제도를 목적에 맞게 운영하라고 명령한 셈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이 판결문을 제대로 읽었다면 더이상 산재 불승인 이유에 ‘그것’을 올리지 못할 것이다.”

임 변호사가 말한 ‘그것’은 “발병 원인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아서 산재를 불승인하는 논리”를 말한다. 이는 반올림이 지난 10년 동안 산재 인정을 두고 근로복지공단 및 법원, 삼성전자와 싸워 온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임 변호사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15년 간 일한뒤 루게릭병(근위추성측색경화증)에 걸린 이윤성씨(45) 사례를 언급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13년 8월 근로복지공단이 이씨에게 내린 산재 불승인 처분이 정당했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씨가 화학물질 및 전기장에 노출됐을 가능성은 있지만 노출 정도가 건강이나 신체에 영향을 줄 정도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화학물질과 질병 간 연관성에 대해 실험연구 및 역학연구가 아직까지 없다” “이씨가 근무했던 공장에 이씨 외 루게릭병을 진단받은 사람이 없다”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밖에 반올림이 패소한 소송 6건 판결문 모두 유사한 취지의 논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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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변호사는 “발병 원인을 모르면 ‘모른다’ ‘업무관련성을 판단하기 어렵다’로 둬야지 직업병이 아니라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며 “역학조사 평가위원들이 판단을 하지 않는게 오히려 과학적”이라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 및 사업주의 비협조적 태도를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은 대법 판례로 남아 향후 하급심에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임 변호사에 따르면 반올림의 산재 인정 소송은 ‘정보 은폐’와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업환경측정 자료, 화학물질 목록, 출퇴근 기록 등 작업환경과 관련된 안전보건자료는 사용자가 생산하고 관리한다. 작업환경의 위험성을 증명해야 하는 노동자에게 필요한 자료다. 임 변호사는 삼성전자는 작업환경측정 결과 등 공개해야 마땅한 정보까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비공개해 소송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고 말했다.

‘83%’. 임 변호사가 반올림의 산재 소송 10건을 분석한 결과 삼성전자 측은 법원이 답변 및 제출을 요구한 자료 77건 중 64건(83%)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전산자료를 1년이 지나면 폐기한다고 하거나 ‘클린룸’ 출입기록을 3개월이 지나면 폐기한다고 답하고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도 한다”며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만 노동자들은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반올림 분석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법원의 자료제출 요구 35건 중 25건(71%)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비공개 이유는 삼성전자의 이유와 동일한 ‘사업주의 영업비밀’이었다. 반올림은 2013년 고용노동부 장관의 명령으로 실시된 ‘삼성 반도체·LCD 공장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의 경우 소송에서 14차례 제출을 요구했고 단 1차례만 부분적으로 공개됐다. 반올림은 이 보고서에 대한 정보공개 소송까지 진행해 지난 10월13일 법원으로부터 공개 명령을 받아냈다.

지난한 자료제출 공방 끝에 소송을 끝내지 못하고 숨을 거둔 피해자도 있다. 삼성전자 화성공장 15라인에서 일하다가 급성골수성 백혈병을 얻었던 고 김기철씨(32세 사망)다. 그는 1심 소송이 2년 가량 지연되던 중인 2017년 1월14일 사망했다. 법원은 이 사건에서 고용노동부에 해당 사업장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및 ‘삼성 반도체·LCD 공장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방고용노동관서가 판단할 문제”라며 공개하지 제출하지 않았다. 임 변호사는 “그 자료가 본부에 있다는 것은 확인해서 알고 있었는데 무책임한 답변으로 일관했다”면서 “이런 답을 하는데만 3~4개월씩 소요돼 소송이 길어졌고 그 사이 김씨가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인터뷰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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