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은 절대로 ‘광고를 위한 편집배려’를 약속하지 말아야 한다. 노르웨이기자협회가 1944년 결의한 언론윤리헌장 중 ‘언론인의 정직성’을 규정한 준칙 중 하나다. 준칙 중엔 “후원행위가 편집에 영향력을 끼치도록 허용하는 것은 바림직한 언론관례에 모순”되며 “편집자들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하도록 명령받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다.

이를 명문화한 이유는 ‘민주적 여론형성’이 언론의 역할이라는 점에서다. “자유로운 정보 전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저지하는 압력에 굴복해선 안되”고 “일반 시민들을 공권력·공공기관·기업의 침해 행위로부터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직성이 흔들리면 시민들은 특정 광고주나 정치집단이 선별한 정보만을 언론기관을 통해 받게 된다. 왜곡된 사실관계가 전달되는 것이다.

▲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인권센터,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등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인권센터,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등은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반올림 언론보도피해소송 판결의 의미' 토론회를 열었다.


28일 오전 열린 ‘반올림 언론보도피해소송 판결의 의미’ 토론회에서 주요하게 다뤄진 내용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인권센터,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등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토론회를 열고 반올림이 지난 7월과 11월 두 차례 승소한 왜곡보도 손해배상 소송의 의미를 평가했다.

삼성전자 허위 주장도 확인한 판결

“반올림은 삼성전자와 가족당사자간 대화가 진전을 보일 때마다 회사가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하며 협상을 방해해왔다.”(디지털데일리 2015년 8월5일자)

“(반올림은) 실질적 보상은 뒷전인 채 단체를 존속시키기 위해 협상을 끌어왔다.”(디지털데일리 2014년 9월6일자)

“직업병에 걸린 근로가 140명이 암 진단을 받고 50명이 사망했다는 반올림의 거짓 주장”(뉴데일리경제 2015년 10월27일자)

“하루가 멀다하고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담배꽁초를 마구잡이로 버리는 등 기초적인 공공질서조차 무시하면서…(중략)…”(뉴데일리경제 2015년 12월3일자)

서울중앙지법 민사44단독 류종명 판사는 지난 7월13일 인터넷매체 ‘디지털데일리’가 모욕행위로 반올림의 인격권을 침해했다며 천만원 손해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9단독 정일예 판사는 지난 11월2일 ‘뉴데일리경제’의 허위보도 및 명예훼손 행위를 인정해 천만 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을 통해 확인된 왜곡보도 및 명예훼손 부분은 △삼성전자와 반올림 간 협상 과정 △반올림 주장 △반올림 활동에 대한 평가 등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판결문을 종합하면 ‘반올림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 협상이 난항을 겪는다’는 보도는 왜곡이다. 법원은 △반올림은 조정위원회가 마련한 조정권고안을 대체로 찬성했지만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원회 측은 반대한 점 △이후 삼성전자가 조정절차 중단을 요청한 후 자체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진행한 점 △조정위원회가 이에 ‘보상’ 쟁점에 대해 입장 차이가 커 추가 조정 논의를 보류한다고 밝힌 점 등을 인정했다. 즉 삼성전자의 일방적인 절차 추진 등이 사실관계로 적시된 것이다.

반올림은 이로 인해 삼성전자 측 주장의 허위성도 확인됐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삼성의 자체 보상 절차는 조정위원회 권고안을 수용한 것’이라거나 ‘교섭 쟁점이 모두 해결됐다’는 취지로 입장을 밝혀왔다. 반올림을 대리한 김성순 변호사(법무법인 해냄)는 “법원이 사실관계를 정리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제 사실과 부합하지 않음이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이 비판은 삼성전자가 반올림과 대화를 시작한 2014년 5월 경부터 삼성 측 주장을 검증없이 보도한 다른 언론사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 반올림에 따르면 해당 시기 ‘반도체-백혈병 산재 논란 7년 만에 해결 실마리’(서울신문), ‘삼성 백혈병 등 직업병 논란 7년만에 해결 실마리’(한경닷컴) 등 사실관계를 엄밀히 규명하지 않은 보도들이 대량 생산됐다. 삼성전자가 사실상 권고안을 거부했음에도 “조정위가 권고한 대부분의 제안을 수용했다”(이데일리)는 보도, “직업병 피해보상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헤럴드경제)는 보도도 반복 생산됐다.

“결국 '삼성발 언론플레이'에 대한 법적 판단”

반올림 주장에 대한 왜곡보도도 확인됐다. △반올림이 발표한 직업병 피해 규모는 거짓이라거나 △반도체 공장과 피해자 질병 간엔 관련성이 없고 △반올림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공익법인 설립을 주장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법원은 직업병 재해자 통계가 거짓이라는 보도에 대해 ‘반올림은 주장의 이유를 소명했으나 뉴데일리경제는 거짓이라는 주장을 입증할 자료를 전혀 제출하지 않고 있다’며 허위 사실 적시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또한 “(연구보고서 등이) 반도체 공장의 발암물질과 백혈병 등의 발병이 서로 인과관계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점이 없음에도 뉴데일리가 일부 내용만 발췌해 최종 결론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며 “허위라고 봄이 상당하다”고 적시했다.

반올림은 지난 10월30일 자신들의 주장을 왜곡 보도한 언론사 한국경제, 문화일보, 아시아경제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추가로 제기했다. 한국경제는 반올림이 공익법인 설립을 배타적으로 주장한 적이 없음에도 “시민단체 반올림은 ‘공익법인을 설립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고 네 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또다른 피청구인 문화일보도 2015년 10월12일 “사과 요구 → 조정위 거부 → 권고안 수정요구…‘반대 쳇바퀴’ 8년” 제목의 기사에서 “삼성전자와 가대위는 사단법인을 제외한 대부분 권고안을 수용했으나 반올림은 최근 권고안에 대해 15개 항목에 걸쳐 조목조목 반대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반올림의 수정 요구안에는 삼성전자가 내년부터 매년 100억 원 이상을 무기한 내놔야 한다는 황당한 요구까지 포함돼있다” 등의 내용을 명시했다. ‘삼성전자가 권고안을 수용했고 반올림이 반대했다’는 내용은 판결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반올림은 100억 원 이상 기금을 요구한 사실이 없다는 입장이다.

반올림 상임활동가 임자운 변호사는 “이런 주장은 삼성 측이 해왔던 것들이어서 결국 삼성발 언론플레이에 대한 법적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임 변호사는 “2014년 5월 권오현 당시 삼성전자 대표가 사과 기자회견을 한 이후부터 대다수 언론의 경제팀 기자들이 반올림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면서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방조자’에 불과했던 언론이 ‘공모자’가 됐다”고 지적했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2007년 3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국내 44개 언론사를 대상으로 삼성반도체 직업병 관련 기사를 검색한 결과 전체 389건 중 경향신문(105건)과 한겨레(95건)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심 교수는 반올림 보도가 극히 일부 언론사에 편중되는 사실은 언론이 국내 최대 광고주인 삼성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에 따라 “실질적으로 자기의 보도가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는 것보다 얼마나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더 고민하게 되는 것”이라면서 “뉴데일리나 디지털데일리의 경우 ‘反반올림’을 자신들의 브랜드로 구축해 자기 포지션을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원 “공적 비판에도 인권 존중 지켜라”

법원은 문제 보도의 명예훼손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무리 공적인 존재의 공적인 관심사에 관한 문제 제기가 널리 허용돼야 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정황의 뒷받침도 없이 악의적으로 모함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언론중재법(언론구제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4조 2항은 언론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해야 하고,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타인의 권리나 공중도덕 또는 사회윤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정한다.

▲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과 언론인권센터,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등은 22일 오전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언론보도피해 공익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이하늬 기자
▲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과 언론인권센터,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등은 22일 오전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언론보도피해 공익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이하늬 기자

뉴데일리경제는 기사를 통해 “집회가 벼슬인 마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억지주장을 일삼는 반올림의 민낯”, “시위와 싸움을 훈장으로 여기는 전문 시위꾼들이 반올림을 장악” 등의 평가를 내놨다. 디지털데일리는 “단체 존립을 위해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있다” “지난 8년간 쓰고 있었던 거짓 정의 가면” “삼성과 싸워 이겼다는 훈장” 등의 표현을 썼다.

김 변호사는 “공적 영역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넓게 인정돼야 하지만 동시에 언론의 보도는 공정·객관적이어야 한다”며 “이번 판결은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재확인한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본질 가리는 보도, 마땅한 방법 없어… 언론계가 자정해야”

반올림은 반올림 및 직업병 피해 당사자라는 허위보도 피해자가 있었기 때문에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김 변호사는 “언론사의 보도가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인격권을 침해해 모욕하는 경우 이는 민사상 불법행위가 돼 상대방 정신적 손해에 대해 위자료를 배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는 왜곡보도일 경우엔 마땅한 법적 구제 수단을 찾기 어렵다.

김 변호사는 “인터넷으로 삼성 반도체 직업병, 반올림 등을 검색하면 많은 기사들이 뜬다. 그런데 도저히 사안의 본질을 알 수가 없다. 잘못된 보도가 민주적 의사 형성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라며 “언론에 따라서는 특정 사안에 대한 보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바스쿠트 툰작 유엔 특별보고관이 작성한 ‘유해화학물질과 폐기물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 보고서’ 오보 사례를 지적했다. 2016년 9월12일 30여 개 언론사는 해당 보고서가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취지의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다. 특별보고관이 5개 조항 이상에 걸쳐 삼성전자 및 한국 정부를 비판했음에도 긍정적으로 평가한 1개 항만을 기사화한 것이다.

바스쿠트 툰작 보고관은 3일 후인 9월15일 보고서 발표 자리에서 “지난 주 한국 언론들이 잘못 전달한 내용이 있어 이 기회에 특별히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면서 “삼성전자나 대한민국 정부 어느 쪽도 노동환경이 안전함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직접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민주적 공론장 형성을 위해서는 언론계의 자정작용 및 신뢰를 중심으로 한 수익구조 형성을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일단 국민이 소유한 언론사들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면서 “이슈를 선점할 수 있고 시청자에게 신뢰성있는 정보 전달해서 자사 경쟁력을 높이고 신뢰를 얻는 선순환 구조”를 언급했다.

심 교수는 노르웨이기자협회의 ‘광고를 위한 편집배려 금지’ 조항을 강조했다. 그는 △광고주로부터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언론사 △언론인의 자율적인 윤리강령준수 및 교육 △악의적 보도·왜곡보도에 대한 효과적인 중재 및 조정제도 필요 등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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