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전남 목포 신항, 오후 8시께. 항만으로 향하는 택시 창문 너머로 커다란 고철 덩어리가 보였다. 어두컴컴한 풍경 한 가운데 웬 배가 누워있나 싶어 창문을 내리고 보니, ‘세월호’였다. 언론사에 입사한 지 1년이 갓 지난 찰나 터졌던 대형 참사. 누군가의 부모이자 아내·남편이며 아들·딸이던 대한민국 국민 304명이 하루아침에 실종자와 사망자로 변했던,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다른 국민들이 지켜봐야 했던, 유가족만 600여 명이 넘는 바로 그, 세월호.

▲ 세월호가 인양된 전남 목포신항. 사진=유성애 기자
▲ 세월호가 인양된 전남 목포신항. 사진=유성애 기자
그간 쓴 관련 기사만 어림잡아 수백 개다. 예은 아빠, 영석 엄마, 주현 엄마….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과 부모 이름을 외울 정도다. 그러나 세월호 실물을 본 건 처음이었다. 고 양승진 교사의 부인 유백형씨와 함께 선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녹색이던 갑판은 녹이 슬어 황톳빛으로 변해있었고, 배 안 문짝은 떨어져 나가 너덜너덜했다. 선체 내부엔 ‘위험, 추락주의’란 종이만 펄럭였다. 그 밤 세월호 주변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했고, 인적 없는 항만에는 길고양이 한 마리만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최근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을 만나 사연을 들었다. 회사에서 긴급 편성한 기획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http://omn.kr/olvf)에 참여하면서다. 참사 뒤 1313일. 언론과 사람이 무서워 입을 닫고 살아온 이들이다. 꼬박 세 번 겨울을 날 동안 가족의 시신(혹은 뼛조각)이 발견돼 유가족이 되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남편·아들·동생의 시신을 찾지 못해 이들이 입던 교복과 양복만 관 속에 넣어야 했던 가족들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이들은 결국 시신 없는 장례식을 치렀다.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아 여러 번 혼절했다는 고 남현철 학생의 부모. 아들 교복과 가방, 이름표까지 흔적이란 흔적은 다 나왔는데 아이만 나오지 않았다는 고 박영인 학생의 부모.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로 또 여행을 간다며 남편을 부러워했다던 고 양승진 교사의 부인. 제주도로 이사 가던 일가족 4명 중 여섯 살 딸 한 명만 살아서 돌아온 친동생 가족, 그 동생과 조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3년 넘게 팽목항과 목포 신항을 지켜온 고 권재근씨의 친형(조카 고 권혁규). 이들 가족마다 한 명의 기자가 만났다.

▲ 사진=유성애 기자
▲ 사진=유성애 기자
취재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이들 유가족의 자책이었다. “손가락질 받기 전에 떠나겠다”는 말을 반복하는 가족이 있었다. ‘세금 도둑’이라는 일부 언론의 비판 프레임을 그대로 내면화한 듯 했다.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의 악성 댓글, 이우현·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의 세금 발언을 예로 들며 "국민들은 이제 세월호에 관심 없지 않느냐. (시신을) 찾을 수도 없으니 사람들이 더 손가락질하기 전에 떠나기로 했다"는 말을 들을 땐 가슴 한쪽이 울컥 시리기도 했다.

‘어떤 일은 겪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문장이, 세월호 유가족(미수습자 가족)들을 만날 때마다 자주 떠올랐다. 기자로서의 관찰은 짧지만 유족이 감당해야 할 삶은 길다. 어느 쪽을 봐도, 어떤 난리를 쳐도 2014년 4월 일어난 참사는 결말을 바꿀 수 없는 비극이었다. 이건 비단 세월호 유족들뿐 아니라, 참사 뒤를 지켜본 다수 국민들에게도 해당하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참사로부터 1323일(만 3년 7개월 12일)째인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 유성애 오마이뉴스 기자
▲ 유성애 오마이뉴스 기자
“아이들 죽음으로 한국 사회가 정말 안전하게 바뀌길 바란다”는 한 세월호 유족 어머니의 말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사회적 참사법’ 통과로부터, 활동 기한과 인력 등 독립성이 보장된 2기 특조위 활동으로부터, 더는 국가의 부실한 안전·재난 관리 체계로 인해 희생되는 국민이 없는 날까지. 한 유가족의 말처럼, “세월호 진상규명은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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