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제대로 데뷔조차 못 해본 서른 살 드라마 보조작가가 꿈을 접었다.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드라마 제작사 감독에게 멸시와 함께 성폭행까지 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고용이 불안정하고 업계 ‘블랙리스트’로 찍히면 퇴출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을’ 노동자들은 ‘직장 갑질’에 늘 시달리고 있다.
“이대로 그만두면 방송판 좁아서 어디서도 일 못 한다.” 방송사 비정규직 작가들이 실제로 프로그램 담당 PD로부터 들은 말이다. 한 방송사 막내 작가는 “한두 명의 PD나 팀장들이 작가를 뽑고, 그들이 언제든 작가들을 ‘자를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한 이런 갑질은 계속 이어지지 않겠느냐”며 “누군가에게 ‘폭언을 들어도 되는’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 작가로서, 팀의 구성원으로서 정당하게 인정받으며 일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호소했다.
지난 1일 노무사·변호사·노동전문가 등 241명이 참여해 출범한 ‘직장갑질119’는 이처럼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겪는 갑질과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고 바로잡아 보자는 취지에서 캠페인을 시작했다. 75% 이상의 직장인이 갑질을 경험하고, 직장인 10명 중 4명은 장시간 노동에 추가 수당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참거나 모르는 척’(41.3%)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 스태프인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직장 갑질은 다른 곳의 갑질과는 달리 고발하거나 신고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직장 갑질은 직장을 다닐 때는 고발하기 어렵고 직장을 옮긴 후에도 같은 업종에 취직하려면 불이익을 각오해야 한다”며 “따라서 온라인을 통해 불만과 갑질을 공유하고 자료를 수집해 재발 방지를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말 못 할 갑질 고통 혼자인 줄 알았는데… 뭉치면 이긴다”
직장갑질119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은 개설 후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업계 동료의 추천을 받고 채팅방에 들어와 비슷한 갑질 경험을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최근 선정적인 장기자랑 강요로 논란이 됐던 한림대 성심병원 사례도 채팅방에 들어온 간호사들이 병원 내 부당한 갑질에 대해 얘기하다가 누군가 재단 체육대회 장기자랑 동영상을 올리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한림 성심병원 직원들은 네이버 밴드를 만들어 뭉치기 시작했고, 노무사와 변호사 등 직장갑질119 스태프들도 참여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다. 전문가 면담 결과 한림대 일송재단이 운영하는 6개 성심병원(한강성심병원·강남성심병원‧춘천성심병원·한림대학교성심병원·동탄성심병원·강동성심병원)에서 동일하게 △임금 갑질 △휴가 갑질 △임산부 갑질 △잡무 갑질 △영업 갑질 △비품 갑질 △성희롱 갑질 △정치 갑질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갑질119 법률 스태프인 윤지영(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성심병원 상황과 관련해서도 고용노동부 간부들과 면담했고, 철저한 근로감독 요구와 함께 전체적으로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각종 사례를 설명했다”며 “현실이 생각 이상으로 너무 심각한데 이렇게 문제가 만연한 이유는 정부가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게 크다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 측은 오픈채팅방의 장점을 익명성과 접근성이라고 설명했다. 카카오톡 이용자는 누구나 채팅방에 승인 절차 없이 입장할 수 있고 익명을 사용할 수 있다. 박점규 위원은 “오픈채팅방에선 본인이 겪은 갑질을 고발하거나 노동 상담을 한다”며 “현재 준비되고 있는 직종별 모임을 소개받아 모임에 가입하거나,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직종 모임을 결성하면 된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