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기업의 사회 공헌이냐”(박주원 CSR서울이니셔티브 운영위원장)

기업 책임경영 컨설팅 전문가인 박주원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를 보고 ‘이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냐’고 탄식했다. 정경유착 형성에 활용된 ‘눈먼 돈’ 대부분이 기업의 사회공헌 기금 회계인 것을 보고서다. 청와대 경제수석실 지시에 전국경제인연합회 사회공헌팀이 움직였고 대기업 사회공헌 주무팀은 A4 한두 장 분량의 제안서만 보고 ‘공익성’을 판단해 기금을 마련했다.

그에 따르면 이같은 정경유착은 한국 대기업의 빈곤한 책임 경영 의식을 볼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그는 기업이 사회 공헌을 ‘자금 아웃 소싱’ 수준으로 여기기에 이를 ‘정부 쌈짓돈’으로 본 정권과 유착됐다고 말했다. 지역사회에 밀착해 실질적인 개선을 이끌어내는데 방점이 찍혀야지 ‘돈 내기’를 사회적 책임이자 공헌으로 인식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기업들이 국정농단 이후 ‘우리는 돈을 냈으니 잘못은 돈 받은 사람의 책임’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빈곤한 책임의식은 ‘삼성 뇌물 사건’ 항소심 공판마다 등장하고 있다. 삼성 측 피고인들은 1심 때보다 다양한 근거로 한국영재스포츠센터 등에 흘러간 자금이 공익적 후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1심 재판부가 미르·K스포츠재단의 공익성을 인정한 것에 착안해 ‘영재센터 뇌물’도 공익 활동으로 규정하려는 전략으로 비춰진다.

더 강력해진 근거로 “뇌물 아닌 사회공헌” 주장

특검은 삼성전자의 ‘졸속’ 후원금 지급 과정을 비판하며 정상적인 후원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2015년 10월 지원 당시 영재센터는 활동 전력이 없는 신생단체였다. 계약 논의를 할 때까지 법인등록도 안된 상태였고 후원금 지급 계약을 마친 당일 법인 등록 절차를 거쳤다. 이 마저도 삼성전자 직원이 계약 당일 ‘법인 등록을 신속히 해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뇌물공여 혐의 등 항소심 2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뇌물공여 혐의 등 항소심 2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민중의소리

영재센터가 급하게 작성한 1차 후원제안서는 오타·비문이 다수 포함됐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과 그에 따른 객관적 수치나 자료, 예산안이 없었다. 삼성전자 담당 부서는 후원 전 반드시 거치는 금액 검토 절차도 누락했다. 삼성전자는 영재센터가 사업자등록을 하기 전 이미 내부 품의를 올렸고 영재센터가 법인등록을 한 당일 바로 5억5천만 원 지급 결재를 완료했다. 영재센터와 삼성전자는 ‘퀵서비스’로 계약서를 주고 받았다.

“영재센터 취지와 사회공헌 효과가 좋았다.”(강기재 삼성전자 과장)
“사회공헌적 성격이 강할수록 (디테일은) 판단 대상이 아니다”
“(삼성전자에서) 이런 후원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았으니 공신력 있는 단체라 여겼다.”
“이규혁, 전이경 등 국가대표 이사진을 보고 단체를 믿었다.”

삼성 측 피고인들은 지난 9일 영재센터 후원 결정에 관여한 강기재 삼성전자 과장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또한 추가 증거도 다수 제출했다. 강원연구원이 발간한 ‘강원도 동계스포츠 육성 방안’ 보고서, 영재센터 활동을 보도한 각종 언론기사 등은 영재센터 공익성을 입증하는 취지로 제출됐다.

목이 타들어가는 ‘사회공헌’ 현장

실제 NPO(비영리단체) 관계자들은 이같은 증언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혀를 내두른다. 소규모 복지 재단 조차 삼성전자보다 엄밀한 검토과정을 거칠 뿐더러 기업의 경우 지원금을 받는 절차가 훨씬 까다롭다는 지적이다.

NPO 단체들은 의료·교육, 문화·체육, 취약계층 지원, 환경보전 등 분야를 막론하고 극심한 후원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한 NPO 사무국장 A씨는 “공급이 수요에 한참 모자라는게 이 바닥 생리”라며 “복지 프로그램을 돌려야 하는데 2년 정도는 선정됐지만 그 뒤 4년 동안 내리 탈락해 결국 없는 대로 프로그램을 축소해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토씨 하나 틀린게 없는’ 완벽한 사업제안서는 기초 중의 기초다.

“예를 들어 장애 아동의 여가생활이 사업 대주제라고 하자. 세부 주제를 정하고 나면 사업의 필요성을 제시하기 위해 논문을 뒤져야 한다. 장애 아동의 몇 %가 여가생활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거나 몇 %가 학교에 다니지만 그 외의 교육은 못 받고 있다거나. 이런 실태와 현황은 통계수치로 드러내야지 안 그러면 바로 탈락이다. 그 다음 기대효과도 잘 써야 한다. ‘아이들에게 이런 여가가 주어지면 이런 변화가 나타나더라’ ‘이런 교육을 했을 때 보호자 만족도는 어떠하더라’ 등의 사업 효과도 논문을 뒤져 찾는다. 세부계획, 예산안까지 잡으면 최소 일주일은 넘게 걸린다. 이렇게 해도 후원이 될까 말까 한 게 이쪽 현실이다.”(장애인권 관련 단체 관계자 B씨)

▲ 2016년11월24일 심상정·노회찬·이정미 정의당 이원 등이 전국경제인연합회 건물 앞에서 박근혜 정부 민간인 국정농단 사태 비판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2016년11월24일 심상정·노회찬·이정미 정의당 이원 등이 전국경제인연합회 건물 앞에서 박근혜 정부 민간인 국정농단 사태 비판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NPO 지원기관들도 그만큼 후원 심사에 공정성을 강화하는 추세다. 20여 명으로 구성된 한 대기업 산하 소규모 복지 재단도 500만 원을 지원하는 공모사업 심사를 위해 외부 전문가로 심사위원을 구성해 서류를 검토했다. B씨는 “한국장애인재단의 경우 1차 심사에 내는 예산안에 크레파스 얼마 짜리를 몇 개 살 것인지 명확히 적어야 하고 구체적으로 적지 않으면 감점된다”며 “투명성과 공정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예외도 있다. 영재센터처럼 ‘윗선의 지시’가 있을 때다. 한 대기업 계열사 사회공헌 담당자 C씨는 “들어보지 못한 단체가 파트너십 대상으로 올라올 때가 종종 있는게 사실”이라면서 “간부급 임원이 아는 단체에 후원을 하라고 지시가 내려온 경우”라고 말했다.

“기업, 사회공헌 본질 호도하면 사회적 신뢰만 잃을 것”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4여 년간 회계업무를 맡았던 D씨는 “보통 지출에 사수, 그룹장, 팀장, 부장 등 엄청난 결재라인을 거치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제안서는 실무자 선에서 자른다”며 “사회공헌 지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업에서 돈이 나가는데 ‘공익성이 뛰어나다’는 말 한 마디로 되겠느냐”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류부터 미비한데 사업의지나 공익성이 좋다? 모순적인 말”이라며 ”개인이나 팀 고과에 반영이 되기에 (계약 등은) 절대 허투루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박 위원장은 삼성 측 변론과 관련해 “(기업은) ‘자, 받아라’는 식으로 돈을 냈고 잘못은 받는 측에서 한 것이니 ‘우리가 면밀히 확인하지 못한 건 잘못이지만 귀책 사유는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이는 굉장히 시혜적인 관점으로 사회공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과 관련된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관리하는 윤리 경영으로 환경친화적 경영, 노동인권경영, 산업안전 경영 등을 포함한다. 지역사회 공헌은 이 중의 하나로, 박 위원장은 “진실된 사회공헌이라고 하면 수혜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지역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프로그램을 짤 때부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짜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민중의소리
▲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민중의소리

박 위원장은 “결국 기업의 빈곤한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기업을 향한 사회적 불신만 더 키울 것”이라 지적했다. “지금도 기업의 사회공헌을 기업의 이미지 세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한데 기본적인 준법경영을 하지 않고 잘못을 감추는 데만 급급하면 사회 책임 경영을 신뢰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는 지적이다.

영재센터는 삼성전자로부터 2015~2016년 동안 16억 원을 지원받았다. 2015년 한 해 삼성전자가 ‘대한빙상연맹’에 후원한 금액과 흡사한 규모다. 삼성그룹이 최순실씨가 실질적으로 소유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지급한 금액은 204억 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15년 대기업 255개 계열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연평균 사회공헌기금 지출 113억 8059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영재센터 계좌에 이체된 금액 중 3억 여 원은 최씨가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회사 더스포츠엠, 누림기획 등에 건너 갔다. ‘사무총장’으로 불렸던 장시호씨는 지난 8일 공판에서 사죄했다. 장씨는 최씨의 지시로 합계 16억 원에 달하는 후원금 제안서를 작성해 삼성전자 측에 전달한 연루자다. 장씨는 “제가 잘못한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드릴 말씀이 없고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특검 측은 피고인들의 주장을 확인하고자 삼성전자 측에 사회공헌과 관련된 자료제출을 요구했으나 삼성 측은 이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영재센터와 관련된 삼성 측 변론을 확인하기 위한 특검 측 증인으로 오는 27일 항소심 법정에 출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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