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 산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가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국정원 연루 의혹 15개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했다. 국정원 적폐청산 TF는 지난 6월23일 출범 이후 국정원 댓글사건 관련한 사이버외곽팀과 원세훈 전 원장 삭제 녹취록 복원, 공영방송 장악문건 공개 등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한계점도 분명히 드러냈다. 특히나 간첩 조작 사건과 세월호 유가족 사찰, 채동욱 전 검찰총장 개인정보 유출 의혹 등 국정원 내부 직원들이 많이 연루된 사건일수록 조사 내용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정원 개혁위(위원장 정해구)는 지난 8일 보도자료를 통해 “적폐청산 TF는 출범 이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믿음 아래 공정한 절차와 기준에 따라 정치관여·직권남용 등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이탈해 국민적 의혹을 받은 15개 사건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를 진행했다”며 “개혁위는 그 결과를 보고받고 불법 행위 관련자 54명(전직 국정원장 등 직원 4명, 민간인 50명)에 대한 검찰 수사 의뢰를 권고했다”고 밝혔다.

개혁위가 이날까지 발표한 주요 15개 조사 사건은 △유우성 간첩수사 증거 조작 △세월호 참사 관련 △남북정상회의록 공개 및 유출 △18대 대선 국정원 댓글조작 △국정원 직원 ‘좌익효수’ △헌법재판소·사법부 사찰 △박원순 서울시장 사찰 △문화계 블랙리스트 △채동욱 전 검찰총장 뒷조사 △추명호 전 국장의 우병우 청와대 전 민정수석 비선보고 △보수단체 지원(2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개입 및 ‘논두렁 시계’ 피의사실 공표 의혹 △이탈리아 해킹프로그램(RCS)을 이용한 민간인 사찰 및 선거 개입 △명진 스님 불법사찰 △야권 지자체장 사찰활동 등이다.

▲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최승호 연출) 스틸컷.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최승호 연출) 스틸컷.
그러나 개혁위는 이날 발표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서도 유우성씨 여동생 유가려씨에 대한 가혹행위와 관련해 “다소 의심스러운 정황은 있으나, 주요 참고인 유가려가 외국인으로 국내에 거주하지 않고 있고 제한된 TF 조사 권한으로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었다”고 밝히는 등 상당수 조사가 미진했음을 고백했다.

개혁위는 국정원 직원의 유가려씨 가혹행위 등에 대해 “가해자로 지목된 신문관이 혐의를 강력 부인하고 있고, 다른 모니터 참관자들도 폭행을 목격한 바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며 “유가려에 대한 직접 조사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가혹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더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진상규명이 어렵다”고 해명했다.

유우성 변호인단 “간첩조작 지시·집행한 국정원 상층·대공수사팀에 면죄부”

하지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변호인단은 “적폐청산 TF가 이 사건의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증언을 할 유우성·유가려씨조차 면담 조사하지 않았다”며 “유가려의 입국 이후 합동신문센터 조사에서부터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 과정, 1·2심 재판 과정, 중국 공문서위조 등에 이르는 과정에서 드러난 수많은 의혹에 대해 제대로 조사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민변 변호인단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범죄에 가담한 단 한 명도 수사 의뢰를 하지 않는 등 이 사건 간첩조작을 지시하고 집행한 국정원 상층과 대공수사팀에 면죄부를 주고 있어 이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국정원 개혁위 발표는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제 식구 감싸기 식 부실조사에 근거해 제대로 진상규명이 된 내용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망스럽다”고 비판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을 변호했던 장경욱 변호사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유가려씨를 신문한 국정원 직원은 큰삼촌·아줌마·대머리 수사관으로 불리는 여러 명인데 TF는 신문관이 한 명인 것처럼 발표했고, 유우성 사건 법원 판결문에서도 가혹행위라고 인정한 것조차 조사 안 했다”며 “이번이 진상규명을 위한 마지막 기회일 수 있는데 국정원 수사국장 등 검찰이 재수사하도록 수사 의뢰도 안 했다”고 꼬집었다.

당초 적폐청산 TF에서 민변 변호인단에 유가려씨에 대한 조사가 가능한지 물어오자, 변호인단이 가려씨에게 의사를 확인한 후 조사에 응하겠다는 답변을 TF 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TF 측은 가혹행위 피해자가 조사에 받겠다고 했는데도 유우성·유가려씨를 불러 조사하지 않았다.

민주사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언론단체비상시국회의·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8개 노동·시민사회단체는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죄로 이병기 전 국정원장 등 3인을 지난 2월6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고발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민주사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언론단체비상시국회의·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8개 노동·시민사회단체는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죄로 이병기 전 국정원장 등 3인을 지난 2월6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고발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국정원의 세월호 유가족 등 사찰 의혹에 대한 조사도 마찬가지였다. 1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측은 국정원으로부터 사찰 의혹을 특정할 만한 정황 증거 자료까지 TF 측에 보냈지만, 이후 추가 조사나 피해 당사자들에 대해 조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세월호 특조위 관계자는 “RCS(이탈리아 해킹팀 제작 해킹 프로그램)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가 확인을 요구했을 때 RCS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국정원 직원 자살 사건에만 국한해서 조사한다고 했다”며 “결국 국정원 TF의 실질적인 조사는 국정원 직원이 한 것이고, 세월호와 관련해선 많은 단위에서 국정원 개입 의혹을 제기했는데 그런 부분이 조사는커녕 거의 언급도 안 됐다”고 지적했다.

검찰 수사 의뢰 54명 중 국정원 전·현직 임직원 4명뿐, 내부 직원 반발 의식?

실제로 4·16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 등도 세월호 참사 당일 청해진해운 김아무개 기획관리부장과 국정원 하아무개씨가 수차례 통화한 사실을 비롯해 세월호 수사 과정 곳곳에 국정원의 개입 의혹이 있었음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

국정원은 처음엔 세월호 사고를 당일 9시44분에 방송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가 국회 국정조사에선 “상황실에서 9시19분 YTN 뉴스 속보를 통해 사고를 최초 인지하고, 원장 등 지휘부에 ‘진도 부근 해상 500명 탄 여객선 조난신고’ 내용의 문제 메시지를 즉각 전파했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아울러 국정원 측은 언론 보도 내용을 문자 메시지로 전송받았을 뿐이라고 했지만, 미디어오늘 확인 결과 9시38분에 국정원 직원 하씨가 직접 청해진해운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사고 발생 후 이틀간 총 7차례 청해진해운 측에 전화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정원 개혁위는 지난 8일 조사결과 발표에서 “국정원(인천지부) 직원은 사고 당일 청해진해운 관리부장으로부터 두 차례(9시33분, 9시38분) 언론보도 내용을 문자 메시지로 수신했으나, 세월호 선원으로부터 현장 사고 상황을 연락받은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만 짧게 언급하는 데 그쳤다.

아울러 사고 다음 날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묵었던 해경 수사관 아파트 CCTV 영상에는 이 선장과 함께 뒤를 따랐던 2명의 인물이 수사관 집으로 들어가 밤새 이준석과 함께 있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당시 검·경합수부가 당사자로 지목했던 해경 경장은 CCTV 등장인물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자, 민변 등에선 이 선장이 아파트에서 제3의 인물을 접촉했을 의혹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있다.

지난 2009년 5월13일 SBS가 보도한  노무현 전 대통령‘논두렁 시계’관련 리포트.
지난 2009년 5월13일 SBS가 보도한 노무현 전 대통령‘논두렁 시계’관련 리포트.
정해구 위원장 “국정원 직원 (채동욱 혼외자) 첩보 수집 경위 납득 어렵다”

이 밖에도 국정원 개혁위는 2013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이끌었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아들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서도 국정원 윗선과 청와대 공작 의혹을 밝혀내지 못했다.

국정원 개혁위는 “국정원 존안(보존) 보고서·출력물 등 내부 자료를 면밀 확인하고 당시 청와대 파견관 등 관련 직원에 대해서도 심층 면담조사를 실시했으나, 채 전 총장 혼외자 관련 내용에 대해 청와대의 보고 요청이 있었다거나 국정원 지휘부에서 별도 보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며 “국정원 작성 자료가 조선일보에 유출된 증거나 정황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국정원 자체 TF로는 조사의 한계가 있었음을 고려하더라도, 정해구 위원장마저도 “국정원 직원의 (채동욱 혼외자) 첩보 수집 경위에 대한 해명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국정원 TF의 조사엔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국정원 간부와 직원 상당수가 연루된 의혹 사건에 대해선 내부 직원들의 반발이 컸던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정원 TF는 간첩증거 조작 사건에서도 “국정원 존안 자료 검색·관련자 조사에서 지휘부의 증거 조작 지시·묵인 등 국정원 차원의 조직적 증거 조작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국정원 개혁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개혁위는 TF 조사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자문기구 정도에 불과하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TF는 국정원 내부 직원 도움 없이는 메인서버 접근도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정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른바 ‘논두렁 시계’ 보도를 조장했다는 의혹을 검찰 수사 의뢰에서 제외했다. 국정원 TF가 국정원 간부 한 명 외에 ‘논두렁 시계’ 언론 플레이 지시·가담자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2015년 2월 언론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한 명품시계 보도가 국정원 작품이며 언론사가 연관돼 있다’고 주장했고, TF 조사관에게도 “지금 밝히면 다칠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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