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은 어떤 것일까.

법원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을 규정하고 판례로 정리해놓은 공안자료집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공개됐다.

지난 1996년 6월 대검찰청이 발간한 ‘판례에 나타난 이적표현물’이라는 공안자료집은 지난 1974년부터 1995년까지 각급 법원에서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한 도서 등이 수록돼 있다. 공안자료집은 1995년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공안자료집은 끈질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지난 9월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대검찰청은 정보공개법을 들어 “해당 정보에 포함돼 있는 성명 등 개인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천주교인권위원회는 판례 내용이 개인의 비밀 또는 자유를 추가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없고, 개인정보에 관한 내용은 부분공개를 할 수 있다며 이의신청을 제기했고 대검찰청은 검찰 사건번호와 피의자 성명을 가리고 공안자료집을 부분 공개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대검찰청으로부터 받은 300쪽이 넘는 공안자료집을 언론에 공개했다. 자료집에는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도서 1072종, 유인물 1584종 등 모두 2777종이 수록돼 있다.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도서들을 살펴보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쉽게 찾거나 구입할 수 있는 책이 포함돼 있다. 저자의 학문 사상 내용을 담은 저작물도 많아 자의적인 이적표현물 규정이라는 비판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고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노동자의 투쟁과 삶을 정리한 전태일 평전도 이적표현물로 규정됐다. 대표적인 책을 보면 맑스와 앵겔스의 ‘자본’, ‘공산당선언’,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E.H. 카의 ‘러시아 혁명’, 모택동의 ‘모순론’ 등 고전 책이 포함돼 있고,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 김지하의 ‘오적’, 권운상의 ‘녹슬은 해방구’ 등 대중 서적도 이적표현물로 규정돼 있었다.

이외 민주조선 조선대 교지 창간호, 전남대 총학생회 발간 ‘4·3 제주민중항쟁’, 전대협 사진집, 한총련 출범 선언문, 민중가요 노래집 ‘해방의 코스모스’,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KAL기 사건 의혹을 담은 유인물, ‘현대 그룹 계열사의 노동자 파업 투쟁에 대한 평가’라는 제목의 유인물 등 각종 학생, 사회 운동단체의 자료집 등이 이적표현물로 규정됐다.

공안자료집에서 규정된 이적표현물은 최근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지난 3월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을 운영하는 이진영씨는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반포 등 혐의로 구속됐다. 이씨는 공안자료집에서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강철서신’ 등을 홈페이지 올렸다. 이씨는 회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노동자의 책’을 링크했다. 검찰은 이 같은 행위가 이적표현물의 반포라고 보고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구형했다.

▲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홈페이지
▲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홈페이지
하지만 서울남부지법 제11형사부는 “피고인이 직접 (가지고 있는 이적표현물을) 작성한 것이 아니어서 그 내용들이 피고인의 사상 및 가치관과 전적으로 부합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씨는 이 사건으로 반년 이상을 구치소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기준도 동의할 수 없지만 국가보안법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 많아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도서 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이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지난 2010년 7월 “피고인이 이적표현물고 관련해 제5항(국가보안법 7조 5항, 국가 존립 안전, 자유적기본적 위태롭게 할 목적으로 표현물을 제작 등 또는 취득한 자는 형에 처함)의 행위를 하게 된 경위, 피고인의 이적단체 가입 여부 및 이적표현물과 피고인이 소속한 이적단체의 실질적인 목표 및 활동과의 연관성 등 간접사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이적행위 목적의 인정 기준이 매우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불확실하므로 해당 행위자의 과거 전력이나 평소 행적을 통하여 추단되는 이념적 성향만을 근거로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자의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동일한 표현물을 소지하더라도 누가 어떤 경위로 소지하느냐에 따라 최대 징역 7년형으로 처벌받기도 하고 처벌받지 않기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성준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는 “이번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공안자료집이 공개된 것은 처음으로 이적표현물과 관련된 내용 등을 공개할 수 있다는 첫 판례로 남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강성준 활동가는 “자료집에 나온 책 등을 이적표현물을 봐야 하는지, 법원의 판결에 어떤 영향을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사회적 논의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근본적으로 국가보안법의 자의적인 법 해석을 막기 위해 법을 개정하는 논의도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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